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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음미하는 부처님 말씀]
‘먹고사는 일’의 거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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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학  /  2018 년 10 월 [통권 제66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4,803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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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책에서 읽은 이야기입니다. 조금 길지만 그대로 옮겨 보겠습니다.

그 여자를 본 곳은 한 대형 마트 계산대 앞이었다.
여자의 등에는 아이가 업혀 있다. 아이의 목은 간신히 머리를 매단 것처럼 심하게 꺾였다. 깊이 잠든 모양이다. 이런 아이를 볼 때마다 나는 불안감을 느끼기보다는 내심 탄성을 지르게 된다. 저러고도 멀쩡할 수 있다니.

 


 

 

나도 모르게 고개를 길게 한 바퀴 돌린 다음 오른쪽 어깨 방향으로 꺾어본다. 아이의 각도에 미치려면 턱없이 부족하다. 역시 나는 어른인 게 확실하다. 내가 왜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됐을까. 이유는 없다. 굳이 찾는다면, 쓰레기 분리 배출을 하듯이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낸 다음이었다는 것이다. 나는 당분간 시간을 최대한 낭비하는 데 몰두해야 한다.

 

“어이, 박 대리.”
늘 듣던 부장의 목소리다. 나는 늘 하던 대로 속으로 숫자를 센다.
‘하나, 둘, 셋…아홉.’
“어이, 안 들려.”
숫자 세기는 아홉에서 멈춘다. 대신 소리 내어 말한다
“1초만 더 기다려 주시지 그랬어요.”
“뭐, 뭐라고?”
부장 책상 위에 사직서를 올려놓는다. 내가 그 동안 셌던 ‘하나, 둘, 셋…열’까지의 숫자 묶음이 무더기로 쏟아져 천장에 닿는다.

 

갓 입사를 하고 회식을 하는 자리였다. 부장이 말했다.
“화가 날 때는 말이야, 마음속으로 열까지 세 봐. 유명한 외국 스님이 쓴 책에서 읽은 건데, 효과가 아주 좋아.”
부장은 이밖에도 온갖 종류의 ‘마음 다스리는 법’에 대해 열정적으로 강의했다. 나는 그의 강의가 끝나기 한참 전부터 하나, 두울 하고 숫자를 세고 있었다.

 

“밥이 만든 죄인”

 

잠깐 딴 생각을 하는 사이에 나는 줄을 선 것도 아니고 아닌 것도 아닌, 조금 애매한 위치에 서게 됐다. 사람들이 눈빛으로 채근한다. 빨리 태도를 결정하라고. 나는 한 걸음 정도 옆으로 비켜선다. 옆에 세워졌던 쇼핑 카트에 부딪친다. 곧바로 나는 ‘죄송합니다’ 하고 사과한다. 화장기 없는 얼굴의 여자가 옅은 웃음으로 괜찮다는 대답을 대신한다.

 

내 차례가 되었을 때 쇼핑 카트를 뒤로 물려 여자에게 차례를 양보한다. 여자는 이번에도 말이 없다. 대신 내 얼굴을 뚫어질 듯 바라본다. 윗니로 아랫입술을 살짝 물고 있다. 나는 눈을 맞추기가 어색해져서 아이의 목으로 눈길을 옮긴다. 역시 머리는 잘 붙어 있다.

 

여자는 아주 천천히 계산대 위에 물건을 올린다. 양파, 감자, 당근 그리고 잔뜩 공기를 부풀려 담은 시금치가 계산대 위에 놓인다. 하나씩 담긴 투명 봉지 속의 채소들이 빤히 나를 쳐다보는 것 같다. 나는 재빨리 감자의 움푹 들어간 부분에서 눈과 코를 찾는다. 그런데 도무지 입을 찾을 수 없다. 감자는 울상이 된다. 이번에는 감자와 눈을 마주칠 수 없다. 나는 또 아기의 목으로 눈길을 옮긴다. 그런데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아기 포대기 아래로 보이는 엄마의 파르르 떨리는 손이다. 손아귀에서 벗어나려는 듯 깡통이 바동거린다. 작은 분유통이다. 나도 모르게 아기에게 바짝 다가간다. 손가락 끝으로 살짝 분유통을 들어 올린다. 아이 엄마가 돌아본다. 조금 전 감자의 얼굴과 똑같다.

 

나는 내가 산 물건을 최대한 어지럽게 계산대에 올리고는 계산도 끝나기 전에 카드를 내민다. 계산원의 시야를 가리는 위치에 선다. 평소에는 하지 않던 포인트 적립까지 한다. 일부러 두 번이나 틀리게 번호를 입력한다. 천천히 봉지에 물건을 담는다. 이것저것 많은 물건을 사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 그래, 이 정도면 아이 엄마가 안전하게 마트를 벗어났겠지, 하고 한숨을 돌린다. 짜릿하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살아 있다는 실감.

에스컬레이터 앞이 왁자지껄하다. 보안 직원의 한 손에는 영수증, 다른 한 손에는 분유통이 들려 있다. 나는 천장에 매달린 CCTV를 한참 동안 쏘아 본다.

 

여자를 둘러싼 사람들의 표정은 제각각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텔레비전 뉴스 화면을 보는 듯, 사태의 전말은 환히 알지만 어떤 개입도 않겠다는 태도. 나는 아이가 이 와중에도 깨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사정도 변명도. 보안 직원은 사무실로 가자고 다그친다. 울면 안돼, 울면 안돼, 하면서 여자의 정면으로 다가간다. 계산대에서 돌아보던 그 얼굴이 아니다. 평화롭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살짝 입꼬리가 올라간다. 나는 봉지 속 감자의 얼굴에 그 입 모양을 그려 넣는다. 바로 그때 한 노신사가 보안 직원에게 말한다.

 

“젊은 양반, 내가 이 아이의 할애비라 치고 그 분유 값을 내가 치르면 안 되겠소?”
“안 됩니다, 어르신. 규정대로 해야 합니다.”
“꼭 그래야겠소? 좋은 게 좋다는 뜻으로만 하는 말이 아니오.”
“어르신 뜻은 알겠지만, 그건 제 권한 밖입니다. 계속 이러시면 경찰을 부를 수밖에 없습니다.”
노신사가 다시 무슨 말을 하려는 순간 다른 목소리가 마트 안의 공기를 바꾼다.
“자, 경찰을 부르든 염라대왕을 부르든 우선 아이부터 살리고 봅시다.”

 

노스님이었다. 이런 곳에 왜 스님이? 한순간에 모든 상황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스님은 어디서 언제부터 이 상황을 지켜본 걸까? 스님이 손에 든 물병에는 모락모락 김이 오른다.
“내 이곳을 지나다가 화장실 신세를 좀 지려고 들렀는데 나보다 더 급한 사람이 보이더군요. 이 아이 좀 보시오. 한참을 굶은 것 같지 않소. 빨리 먹여서, 엄마 대신 울게 할 힘이라도 내게 해 봅시다. 그런데 내가 아이를 키워 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소. 자 빨리 어떻게들 좀 해 보시구려.”

 

하나둘씩 여자들이 나와 아이와 엄마를 둘러싼다. 비로소 엄마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린다. 조금도 소리는 나지 않는다.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사람들이 소리 내어 우는 까닭은, 슬픔에 빠져 죽지 않기 위해서라는 것을. 나는 계산대 앞에서 분유통을 살짝 들어 올렸던, 딱 그만큼의 힘을 담아서 여자에게 손수건을 건넨다. 돌아서면서 나는 하나, 둘, 셋 숫자를 세는 연습을 다시 시작한다. 앞으로는 절대 아홉에서 멈추는 일은 없을 것 이라고, 몇 번이고 다짐한다.

지난 호에 이어서 또 ‘밥’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호의 이야기는, ‘걸식’이야말로 출세간의 수행자를 고귀하게 하는 행위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번 호에는 세간의 사람들에게 ‘밥’이란 어떤 의미인가에 대해 얘기해 보려 합니다.

 

사람은 먹지 않고 살 수 없습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사람은 밥에게 먹히기도 합니다. 세간이든 출세간이든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밥에 먹히는 경우는 세간과 출세간이 반대입니다. 출세간의 수행자가 스스로 (돈을 벌어서) 밥을 먹는다면, 그것은 밥에 먹히는 것입니다. 죄(범계)가 됩니다. 세간의 사람들이 스스로 벌어먹지 않으면, 그것이 밥에 먹히는 것입니다. 죄가 됩니다. 밥버러지 수준이라면 도덕적으로 죄가 되겠지요. (대놓고 말을 못 할 뿐이지)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골칫덩어리인 불로소득도 이에 해당합니다. (물론 세금으로 그 죄를 탕감받긴 합니다만.) 빼앗아 먹거나 훔쳐 먹으면 당연히 사법적으로 죄가 됩니다.

 

앞에서 읽은 이야기의 주인공은 ‘밥이 만든 죄인’입니다. 배고픈 아이에게 먹이기 위한 것이었어도 훔치는 건 명백한 범죄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다 죄를 짓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만으로는 그 여자의 사정을 다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추정은 가능할 것입니다. 남편이 집을 나갔다. 이혼 상태도 아니다. 법적으로는 엄연히 남편이 있기 때문이 정부 보호 대상이 아니다. 갓난아이 때문에 취직을 하기도 어렵다. 일가친지로부터 받을 만큼 도움을 받았다. 밤새워 죽을까를 고민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다음날 울다 지쳐 잠든 아이를 보고는 무엇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뿐이다. 사정이 이쯤 되면 이 여인에 대 한 단죄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물론 입건이 됐다 해도 정상 참작으로 훈방되었겠지만 말입니다. 어쨌든 여자에게 죄를 묻는다면 마땅히 사회(국가)도 그만큼의 책임을 져야 할 사안입니다. 하지만 그런 국가(사회)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불교적 해법은 무엇일까요.

 

‘땀’ 흘려 ‘돈’ 버는 일의 당당함

 

이 아이와 엄마에게 불교는 무엇을 해 줄 수 있을까요? 업연業緣이므로 피할 수 없다. 다 마음먹기에 달렸다. 마음을 비워라. 이런 가르침을 베풀어야 할까요? 아니면 ‘깨달음’을 얻으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고 설파해야 할까요?

 

앞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이야기의 화자인 ‘나’는 ‘선우善友’, ‘노신사’는 ‘보살’, ‘노스님’은 ‘부처님’에 비유해 보는 건 어떨까요. 진정한 친구라면 친구의 허물까지 나눌 수 있습니다. ‘보살’은 기꺼이 ‘중생’의 아픔을 나의 것으로 여깁니다. ‘부처님’이라면 당연히 선악, 시비, 호오, 미추를 초월하여 일단 중생의 생명 그 자체를 끌어안을 것입니다. 그것이 섭수攝受겠지요. 그 다음 ‘공업共業’의 소이연으로서 사회의 책임을 물을 것입니다. 그것이 절복折伏이겠지요.

 

개인의 업(범죄 행위)에 대해서 책임을 묻는 일에는 국가도 종교도 게으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공업共業으로서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국가(사회)가 스스로 꾸짖기에는 삼권분립으로 부족합니다. 불교(종단)와 같은 종교가 할 일이기도 합니다.

 

앞으로 어떤 세상이 오든 ‘먹고사는 일’은 인류의 모든 구성원이 감당해야 할 고통입니다. ‘깨달음’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부처님도 육체적 생존 문제만큼은 철저히 세간에 의지하지 않았습니까?

 

부처의 길과 세간의 길이 엄연히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세상사람 모두가 깨달음을 얻는다 해도 세간의 일은 그대로 남습니다. 그것을 혼동하면 불교는 위선과 무능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숫타니파타』에 「다니야의 경」이라고 불리는 17편의 게송이 있습니다. 목동 다니야와 부처님이 대화를 나누는 형식의 게송으로 이루어진 이 경은, ‘세간의 삶’과 ‘출세간의 삶’을 극명하게 대조시키면서 각자의 길을 밝혀 보입니다. 첫 두 게송만 보겠습니다.

 

(다니야)
“나, 이미 밥을 지었고 우유도 짜 놓았습니다.
처자와 함께 마히 강변에 사는 까닭에,
언덕 위 움막의 지붕을 덮고, 불도 지폈습니다.
하늘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뿌리소서.”

 

(부처님)
“나, 성내지 않노니, 마음의 황무지는 사라졌네.
하룻밤 마히 강변에서 지낼 터이지만,
천하가 나의 움막인즉 불이 무슨 소용이리.
하늘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뿌리소서.”

 

이 경의 주된 의도는 출세간의 삶이 얼마나 뛰어난 것인가를 밝히는 것입니다. 당연히 출가중심주의의 색채가 짙습니다. 다니야 또한 종국에는 부처님을 찬탄하고 귀의합니다. 하지만 다니야는 ‘목동’으로서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남편과 아비로서 자기 정체성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자신의 책임에 투철합니다. 이 경의 내용을 출가우월주의로만 받아들일 까닭은 없습니다. 다니야는 연기(무아)의 가르침에 입각한 성실하고 정직한 직업인의 모범입니다. 저는 ‘먹고사는 일’에 대한 그의 당당함이 한없이 부럽습니다. ‘먹고사는 일’은 언제 어디서나 고통스런 일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덧붙임: 사과드립니다. 이 글의 처음 이야기는 ‘한 책에서 가져온 것’이 아니고, 이 글 을 위해서 제가 지었습니다. 어떻게든 살아야 하는 우리의 현실을 그대로 바라보기 위해서 그랬습니다만, 의도대로 됐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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