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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법문 해설]
서로 다른 문으로 들어가기[異門相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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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  2018 년 10 월 [통권 제66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4,293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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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매트릭스를 보면 모피어스는 네오에게 빨간 약과 파란 약을 보여주며 선택하라고 한다. 어떤 약을 선택하는가에 따라 그가 들어가 속하게 될 세계는 달라진다. 빨간 약을 선택하면 현실의 허구를 깨닫고 진실을 위해 싸우는 레지스탕스의 길로 가게 되고, 파란 약을 선택하면 가짜 세계에서 펼쳐지는 안락한 삶에 안주하게 된다. 극단적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우리들의 삶에서도 이와 같은 양자택일은 일상적으로 벌어진다. 그리고 네오처럼 어떤 것을 택하는가에 따라 우리들의 삶도 판이하게 달라지는 것이 현실이다.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 남성과 여성, 네편과 내편 등 우리 앞에는 늘 선택을 강요하는 두 개의 문이 열려 있다.

 

파란 약 빨간 약

 

대개의 경우 어쩔 수 없이 두 개의 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한다. 일단 하나를 선택하면 그 세계의 질서와 힘에 갇히게 되고, 다른 문으로 드나드는 자유는 허용되지 않는다. 이처럼 대립과 갈등으로 점철된 이항대립적 세계가 중생들의 세상이고 인간들의 삶이다. 이와 같이 서로 다른 문으로 들어가 대립적 구도 속에 서는 것을 ‘두 극단’이라는 뜻에서 ‘양변兩邊’ 또는 ‘극단적 바라 봄’라는 뜻에서 ‘변견邊見’이라고 한다. 양변의 세계는 빨간 약과 파란 약을 분별하는 세계이며, 서로 소통하거나 동화될 수 없는 갈등과 대립의 세계이다.

 

이와 같은 변견을 초극하려면 두 개의 문중에 하나만 선택하고, 그 속에서 펼쳐지는 가치와 질서에 매몰되는 진영논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나와 남이 서로의 문으로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빨간 약을 선택한 사람이 파란 약도 먹어야 하고, 파란 약을 선택한 사람이 빨간 약도 먹어야한다. 그런 인식과 실천 속에 아상我相이라는 자기중심적 울타리가 해체되고, 분절된 너와 나는 하나로 통합되는 연결고리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화엄華嚴은 이와 같이 분별과 고립을 넘어 관계와 소통, 걸림 없는 자유가 법계의 실상이라고 한다. 법계의 실상은 고립적 자성은 없다는 개체의 공성空性, 모든 존재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연기緣起, 온 우주가 걸림 없이 소통한다는 무애無碍 등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현수법장은 이와 같은 법계의 원리를 ‘제법무애도리諸法無碍道理’라고 했다. 모든 존재들이 걸림 없이 상호소통하고 함께 어우러지는 원리라는 뜻이다. 법장은 이런 원리를 세 가지 개념으로 압축해 설명한다. 즉 서로 다른 문으로 들어가는 ‘이문상입의異門相入義’, 서로 다른 몸이지만 본질은 같은 몸이라는 ‘이체상즉의異體相卽義’, 본체와 작용이 상호 융합한다는 ‘체용쌍융의體用雙融義’가 그것이다. 이번호에서는 이 가운데 첫 번째에 해당하는 이문상입異門相入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서로 다른 문으로 들어감’이란 존재의 특성을 설명하는 것이므로 어떤 물리적 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즉 갑・을, 동・서, 나무・돌 등 서로 다른 존재들이지만 그들은 본질과 작용을 서로 공유하고 있음을 설명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각기 다른 존재들이 분리된 존재들이 아니라 서로 소통하고 어우러지는 상즉相卽의 존재임을 설명하는 교설이다.

 

화엄에서 법계의 작용을 설명할 때 등장하는 개념이 체體와 용用이다. 체體는 본질 또는 본체를 말하며, 용用은 체의 작용을 말한다. 예를 들어 대기의 순환이 체라면 그로 인해 내리는 비는 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대기의 순환이 없으면 비가 오지 않고, 비가 내리지 않으면 대기는 순환하지 않는다. 체의 측면에서 보면 서로 다른 존재지만 사실은 동일하기 때문이 ‘서로 같음’이라는 상즉相卽이 된다. 이런 원리를 확장하면 나무가 곧 돌이고, 돌이 곧 나무라는 논리가 성립한다. 나무는 곧 돌이므로 돌이라는 특성을 빼앗고, 돌은 곧 나무이므로 나무라는 특성을 빼앗는다. 따라서 상즉이라는 특성은 서로의 특성을 빼앗는 상탈相奪이라는 특징도 갖게 됨을 알 수 있다.

 

용用의 측면에서 보면 서로 다른 존재일지라도 작용을 공유하기 때문에 너 속으로 내가 들어가고, 내 속으로 너가 들어오는 상입相入이라는 작용이 성립한다. 각각의 특성이 서로에게 침투하면서 돌은 나무의 특성에 기대고, 나무는 돌의 특성에 기대게 된다. 따라서 작용을 설명할 때는 ‘서로 의지함’이라는 상의相依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이문상입은 상입에 대한 설명이므로 작용의 측면에서 존재들이 ‘서로 의지함’을 설명하는 대목이다. 이상과 같이 존재를 작용의 관점에서 보면 상입과 상의라는 특징을 동시에 띤다.

 

주지하다 시피 불교에서는 모든 존재는 인연에 의해 존재한다고 설명한다. 인연이라는 개념은 인因과 연緣이라는 두 개의 의미가 합쳐진 말인데, 인은 주主가 되고 연은 객客에 해당한다. 『십지경론』에 따르면 “인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고 연에서 생기며[因不生自緣生], 연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고 인에서 생긴다[緣不生自因生]”고 했다. 하나의 존재는 인만으로는 발생하거나 존재할 수 없고 인의 생성변화를 돕는 조연助緣이 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연도 연만으로도 있을 수 없고 연이 될 수 있는 인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인이 없으면 연이 있을 수 없고, 연이 없으면 인도 있을 수 없다. 인과 연은 서로 의지하여 연기적 관계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서로 침투하고, 서로 의지하는 상입과 상의를 설명할 때 등장하는 개념이 유력有力과 무력無力이다. 존재를 용의 관점에 설명하면 어떤 힘과 그 힘의 작용이라는 현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법장은 “모든 연의 역용力用이 서로 의지[互相依持]하면서 서로 모습을 빼앗기[互相形奪] 때문에 온전히 유력有力하다는 뜻과 온전히 무력無力하다는 뜻을 각각 가지고 있어야 비로소 연기가 성립된다.”고 했다.

 

서로 다른 존재가 상호 의지하려면 어떤 상황에서는 온전히 힘을 발휘하는 유력의 상태에 있어야 하고, 어떤 상황에서는 어떤 힘도 발휘하지 않는 무력의 상태에 있어야 한다. 그렇게 유력과 무력이라는 작용이 동시적이면서 상호적으로 작용해야 하나의 관계적 작용이 성립될 수 있다. 이에 대해 법장은 “연기는 반드시 서로 의지하여 유력과 무력을 갖추어야 하니, 만약 한 가지 연이라도 빠지면[如闕一緣] 일체가 성립되지 못한다[一切不成].”고 했다. 주체의 힘과 객체의 힘이 동시에 작동해야 연기적 관계가 작동한다는 것이다.

 

하나의 상태에 작용하는 두 개의 힘

 

유력과 무력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한 알의 씨앗이 새싹을 틔우는 상황을 예로 들 수 있다. 한 알의 씨앗이라는 인因이 싹을 틔우려면 촉촉한 봄비, 따사로운 햇살, 토양 속의 자양분 등 수많은 조건 즉 연緣이 작동해야 한다. 이 때 씨앗의 상태를 계속 유지하려는 힘과 새싹으로 돋아나려는 힘이 동시적으로 존재한다. 이 두 힘이 어떻게 작용하는가에 따라서 씨앗의 상태가 달라진다. 씨앗으로 싹트려는 힘이 유력이라면 씨앗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려는 힘은 무력이라고 할 수 있다. 싹트려는 힘이 있고, 씨앗의 상태를 유지하려는 힘은 없을 때 씨앗은 새싹으로 변한다. 반면 씨앗을 싹틔우려는 힘은 없고, 씨앗의 상태를 유지하려는 힘이 있다면 씨앗의 상태는 그대로 유지된다.

 

이처럼 존재란 곧 어떤 상태를 지칭하는 것이기도 한데, 그 상태를 결정짓는 것은 완전하게 힘이 작용하는 유력과 어떤 힘도 작용하지 않는 무력이라는 함수이다. 이 두 힘의 상호작용에 따라서 씨앗이 싹을 틔우기도 하고, 씨앗의 상태로 유지되기도 한다. 따라서 모든 존재는 유력과 무력의 동시적 작용에 의해 만들어진 상태이며, 그 두 힘의 중도적 상태가 그 존재를 규정한다고 할 수 있다.

 

만약에 씨앗의 상태를 유지하려는 힘과 새싹으로 돋아나려는 힘이 동시에 작용한다면 연기의 원리가 성립하지 못하기 때문에 씨앗은 싹을 틔울 수 없다. 힘이 작용하는 유력과 힘이 작용하지 않는 무력이 동시에 요철凹凸처럼 맞아떨어져야 서로의 힘이 서로에게 침투하는 상입相入이 되고, 그 두 힘이 서로에게 의지하는 상의相依가 되어 연기가 성립한다.

 

만약 유력만 있거나 무력만 있으면 오류가 발생하게 된다. 이에 대해 법장은 “유력만 있고 무력이 없으면 결과가 많아지는 허물이 발생한다[有多果過].”고 했다. 씨앗의 상태로 남고자 하는 힘도 있고, 새싹으로 피고자 하는 힘도 있다면 새싹과 씨앗이 동시적으로 생기는 오류가 발생한다. 새싹이면 새싹이고, 씨앗이면 씨앗이지 새싹이면서 씨앗일 수는 없다. 반면 “무력만 있고 유력이 없으면 결과가 없는 오류가 발생한다[有無果過].”고 했다. 씨앗도 없고, 새싹도 없는 단멸의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결국 유력만 있어도 연기는 성립하지 않고, 무력만 있어도 연기는 성립하지 않는다. 모든 존재는 유무, 색공을 동시에 구비해야만 상입과 상의라는 연기가 성립되고, 그와 같은 이치에 의해 하나의 존재는 성주괴공하게 된다.

 

유력은 유有의 측면이고, 무력은 공空의 측이다. 모든 존재는 유와 무의 동시적 작용으로 존재함으로 ‘진공묘유眞空妙有’라는 특성을 띠게 된다. 씨앗이 새싹으로 돋을 때는 씨앗의 상태를 유지하려는 힘이 사라지므로 진공眞空이고, 여러 인연을 모아 새싹을 틔우려는 힘이 전면으로 드러나면 묘유妙有가 된다. 이처럼 작용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존재의 역용은 끝없는 관계의 사슬을 타고 가는 무진연기無盡緣起로 확장된다. 이렇게 보면 유력과 무력의 관계가 역동적으로 변모하며 어떤 상태를 만들어 내는 것이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부여 궁남지 연꽃. 사진 서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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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성균관대 초빙교수.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선의 생태철학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연구교수, 조계종 불학연구소 선임연구원, 불교신문 논설위원, 불광연구원 책임연구원, <불교평론> 편집위원 등을 거쳐 현재 성철사상연구원 연학실장으로 있다. 저서로 『선의 생태철학』 등이 있으며 포교 사이트 www.buruna.org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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