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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스승, 성철]
“실참실오(實參實悟)의 큰스님 가풍 되살릴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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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주  /  2014 년 3 월 [통권 제11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259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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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 정인사 주지 원행 스님 

 

  

 

 

언론에 아는 사람이 나오면 그냥 반갑다. 마치 직접 만난 것처럼 좋다. 좋은 일의 주인공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지난 1월말 교계 주요 언론에는 창원시불교연합회의 보시행이 연일 보도됐다. 관련 기사와 사진을 보니 반가운 얼굴이 눈에 띄었다. 바로 창원 정인사에서 대중들과 함께 호흡하고 있는 원행 스님이었다.

 

원행 스님이 회장 소임을 맡고 있는 창원시불교연합회는 지난 1월 24일 ‘이웃사랑 자비나눔 한마당’을 열고 지역복지관과 주민자치센터, 다문화지원센터 등이 추천한 저소득 한부모가정 30가구와 모범청소년 21명, 다문화가정 20가구, 무의탁노인 20명, 시각장애인협회, 국립마산병원 등에 성금 4,200만 원과 물품을 전달했다.

 

이 행사는 올해 24회째로, 창원시불교연합회가 신행단체 금강자비회와 함께 매년 새해 초에 열고 있다고 한다. 1991년 지역 불교계 신년하례를 겸해 시작했다. 경제 상황 등 여러 모로 여의치 않은 이때에 나눔을 실천하는 좋은 기사를 보고 나서 괜히 우쭐해졌다.

 

설 명절을 보내고 원행 스님을 만나기 위해 정인사로 향했다. 마산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주택가에 정인사가 있다. 지상 3층, 지하 1층의 절은 다른 여느 성철 스님 문도사찰처럼 그리 크지 않은 규모였다.

 


창원 정인사 전경

 

원행 스님의 방으로 향하는데 법당에서 아비라기도 소리가 들린다. 백련암에 가지 못한 불자들이 ‘출퇴근’ 아비라기도를 하고 있는 중이다. 30명이 넘는 불자들이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마음을 모으고 있었다.

 

절을 올리고 원행 스님과 마주 앉으니, 스님은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만난 성철 스님 제자들과는 인터뷰 시작부터 다르다. 자세히 보니 도구들이 꽤 ‘빈티지’하다. 하나같이 20년이 넘은 것들이라고 한다. 요즘에야 선방에서도 즐겨 마시는 기호식품이 되었지만 20년 전이라면 커피도 ‘고급’이던 시절이었을 터. 인터뷰가 진행될수록 스님의 ‘한 박자 빠른’ 움직임은 출가이후 지금까지 계속돼 왔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사명 대사가 되겠다는 꿈

 

스님은 어린 시절부터 스님들을 자주 봤다. 탁발하러 세간에 나온 스님들이 어린 시절 집에 자주 머물렀을 정도로 집안이 불교와 인연이 깊었다. 탁발 나온 스님들을 보며 “저 분들은 어떤 사람들일까?”가 항상 궁금했다. 그러다 우연히 사명 대사를 주인공으로 하는 전기를 읽게 됐다. 어렸지만 스님은 “우리와는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확신을 갖기 시작했다.

 


원두 커피를 갈고 있는 원행 스님


 

‘다른 세상’으로의 진출(?)을 꿈꿨던 스님은 고등학교 1학년 때 사명 대사의 출가 본사인 직지사로 향했다. 직지사에서 사명 대사와 똑같이 출가해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교복을 입은 채 가방을 들고 김천역에서 직지사까지 걸어서 찾아가 “스님이 되고 싶다.”고 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식량이 없어 더 행자를 받을 수 없다.”는 말 뿐이었다. ‘큰 기대’를 가지고 갔지만 ‘실망’만 가슴에 담아 왔다. 고2때는 경산의 환성사로 갔다. 그런데 환성사는 고향인 영천과 너무 가까웠다. 뭔가 모를 불안감 때문에 역시 귀가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군 제대를 한 뒤 대구에 있을 때 우연히 놀러 간 대성사에서 훗날 사형(師兄)이 된 만수 스님을 만났다. 만수 스님을 통해 해인사 백련암에 성철 스님이 주석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만수 스님은 “출가를 하려거든 성철 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정진하라.”고 추천했다. 결국 스님은 1974년 정월에 백련암으로 향했다. 어렸을 적부터의 ‘소원’이 이루어진 셈이다.

 

백련암 뒷방에서 며칠을 머물던 원행 스님에게 성철 스님과의 공식 ‘면접’ 시간이 주어졌다. “왜 왔노?” “사명 대사처럼 확철대오(廓撤大悟) 하려고 왔습니다.” “출가하면 강원 갈래? 선방 갈래?” “선방 가겠습니다.” “이놈아! 선방에 사는 것이 그렇게 쉬운 줄 아나?” “어렵더라도 성불할 때까지 세세생생토록 선방에 살겠습니다.” “이놈 봐라. 하하하.” 선방에 가겠다는 ‘패기’ 넘치는 말에 성철 스님은 껄껄 웃었다.

 

한 겨울에 백련암으로 출가한 스님은 겨울추위 못지않은 혹독한 환경과 싸우며 행자생활을 시작했다. 당시에는 절이 국립공원 안에 있는 까닭에 땔감용으로 큰 나무를 밸 수 없었다. 작은 가지들을 모아 불을 지펴야만 했다. 국과 밥만 짓는 방안의 새벽 온도는 8도 이상으로 올라가지 않았다. 그래도 성철 스님을 비롯한 대중들은 여법(如法)한 생활을 이어갔다. 겨울이 지나고 봄, 여름, 가을로 시간이 흘러도 각 계절에 맞는 울력들은 항상 대중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또 ‘백련암 커리큘럼’도 이수해야 했다.

 

원행 스님은 행자생활을 하면서 곁에서 모신 성철 스님의 일상생활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큰스님께서는 정말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어른이셨어요. 새벽예불부터 취침에 이르기까지 정해진 하루 일과를 절대 어기는 일이 없었습니다. 또 몸에 밴 근검절약도 대중들에게는 산교육이었습니다.”

 

원행 스님이 채공(菜供)을 하던 시절, 한 번은 울력을 마치고 국수를 공양으로 준비했다. 스님은 국수 한 그릇에 김 한 장씩을 넣었다. 잘게 빻아 넣으니 그릇 안이 제법 풍성해졌다. 대중들이 다 같이 국수를 먹으려던 순간 성철 스님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니 아부지가 재벌이가 이놈아! 김 두 장으로도 충분히 여러 그릇에 나눌 수 있는데 이게 무슨 짓이고?” 그렇게 성철 스님은 ‘여지’를 주지 않았다.

 

그렇게 2년 반 정도를 백련암에서 보낸 원행 스님은 첫 정진으로 1976년 하안거를 해인사에서 보냈다. 그런데 정진 한 달이 조금 지나자 상기병(上氣病)이 왔다.

 


쳥량사 불사 당시 상황을 빼곡하게 정리한 원행 스님의 일지


 

“참으려 했지만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큰스님께 사정을 말씀드렸습니다. 평소에는 엄하기만 하던 큰스님께서는 자상하게 대응법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건 약도 없다. 화두를 놓고 쉬어야 한다. 안 그러면 점점 더 병이 깊어져. 쉬는 시간에는 산에 가든지 절을 해. 그래도 화두를 완전히 놓지는 말고 좌복 위에 앉아 숨을 발바닥 중심까지 끌어다 쉬는 기분으로 하면 차차 나을 것이다’는 등의 격려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큰스님의 또 다른 모습을 봤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원행 스님의 상기병과의 혈투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해인사에서의 정진 이후 원행 스님은 김천 수도암, 양산 통도사 극락암, 해남 대흥사, 문경 봉암사, 보은 법주사 복천암 선원 등에서 정진을 이어갔다. 그러다 1984년 음력 1월에 해인사 산내 암자인 청량사와의 인연이 시작됐다.

 

“돈오돈수의 가르침 이어가야”

 

"1983년 하안거를 복천암 선원에서 나고 백련암으로 왔습니다. 건강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아서 백련암에서 단식을 13일간 했습니다. 그런 후 보식(補食)을 한 달간 해야 했습니다. 생각만큼 건강회복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때 원택 스님이 청량사에 가서 몸도 추스르고 약도 먹으라고 권유를 해 가게 된 것입니다.”

 

당시만 해도 청량사는 해인사 대중 누구도 쳐다보지 않던 곳이었다. 정부에서 지어준 법당인 보호각과 요사채, 방앗간 등 전각 몇 채만 있었다. “문의 위아래가 틀어져 주먹이 들어갈 정도였고 요사채 뒤 처마 지붕의 기와가 어디로 없어졌는지 하늘이 보였다.”고 한다. 그러던 곳에 원행 스님의 사형인 원정 스님이 살았는데, 길게 살지 않은 원정 스님 후임으로 청량사를 맡은 사람이 바로 원행 스님이다.

 

스님은 “선뜻 마음이 안 날 정도로 어려운 곳이 청량사였다.”며 “그래도 차근차근 절을 살려내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한다. 스님은 지금도 1984년 당시의 다이어리를 가지고 있는데, 거기에는 일지(日誌)식으로 정리해둔 매일 매일의 기록이 적혀 있었다. 스님을 졸라 일지의 일부분을 들여다봤다.

2월 28일 - 내일 나무를 해야 한다. 곧 음력 2월이면 일꾼도 귀하고 등산객도 많고 국립공원 사람들도 왕래가 잦아질 것 같다. 세 사람이 통나무 일 하다.
3월 7일 - 지난 번 둥굴이 나무 자르고 쪼개다. 차 씨, 권 씨 두 사람 3일은 해야 할 것 같다. 원타 스님 오다.
3월 9일 - 원해 스님 전기 공사. 둥글이 나무일 마무리. 계산 두 사람×3일. 하루 일당 7천원 총 4만 2천원, 새참 4천 2백원, 불공 8명 2만 2천원.

3월부터 12월까지의 달력에도 그 날 그 날 했던 일들이 빼곡하게 메모되어 있다. 이렇게 불사를 한 결과 오늘날 청량사의 기초가 되었다.
“모든 형편이 어려웠던 청량사에 와서 저는 그저 오솔길을 찻길로 넓히고 전기 들여온 것 밖에 한 일이 없어요. 지금 같은 청량사 중창불사는 다 원타 스님하고 원암 스님이 했습니다. 두 스님이 참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스님은 1988년 원택 스님의 권유로 당시 마산 참회원으로 옮겼다. 마산에서 성철 스님의 가르침대로 108참회와 능엄주를 주로 하는 예불을 하며 포교당 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들이 처음부터 수월했던 것은 아니었다. 산중생활에 익숙했던 터라 도심에서의 포교 방향을 잡는 것이 쉽지 않았다.
“당시 제 의식 속에는 ‘수좌’라는 생각이 남아 있었습니다. 수좌로만 살면서 받는 것에 익숙했습니다. 정진만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도심에 나와 보니 대중들에게 저도 무엇을 주어야 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사람들이 잘 모이지 않아요. 처음에는 시행착오도 많았어요. 하하.”

 

생각 끝에 원행 스님은 복지 불사를 시작했다. 스님이 처음으로 손을 댄 것은 어린이포교. 1989년 여름불교학교를 열었는데 130여명의 어린이들이 몰려왔다. 그렇게 몇 년을 운영하다 제도적인 교육시설의 필요성을 느끼고 1996년 10월 ‘사회복지법인 금강 어린이집’을 개원했다. 어린이집 건물과 시설설비 일체를 ‘사회복지법인 금강’ 자체부담금으로 설립했다. 그리고 2005년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어린이법회를 15년간 이끌어 온 곽인철 거사를 관장으로 금강노인종합복지관을 개관하고 이와 함께 각종 복지시설 수탁에도 뛰어들었다.

 


금강노인종합복지관에서 어르신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는 원행 스님 

 

 현재 정인사가 ‘사회복지법인 금강’을 통해 운영하고 있는 시설은 ‘금강노인종합복지관’, ‘금강노인문화센터’, ‘마산금강노인복지센터’, ‘마산노인일자리창출지원센터’, ‘경상남도노인보호전문기관’, ‘경남학대피해노인쉼터’ 등에 이른다. 명실상부한 창원지역의 불교계를 대표하는 복지도량이 되었다. 

 

사찰 밖 활동에 열심이라고 해서 정인사 내부의 프로그램이 부실한 것도 절대 아니다. 매주 토요일 중 · 고등학생 법회, 일요일 어린이 법회가 계속 이뤄지고 있고 매월 초하루부터 일주일간 월초 참회기도를 진행한다. 또 매월 첫째 목요일(오전 9시 ~ 오후 3시 30분)에는 광명진언을, 매월 둘째 목요일에는 능엄주 54독을 하고 있으며 관음재일 법회도 진행하고 있다.

 

아비라기도는 매년 음력 1월과 7월 두 차례에 걸쳐 실시된다.
정인사의 이러한 상구보리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의 정신은 모두 성철 스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라고 원행 스님은 밝혔다. 


“큰스님께서는 ‘돈오돈수(頓悟頓修)’를 강조하셨습니다. 봉암사 결사 때부터 말씀하셨던 것처럼 돈오돈수역시 부처님 근본 가르침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죠. 조선시대와 일제를 거치면서 왜곡된 불교를 바로잡고자 하셨습니다. 돈오돈수는 큰스님만의 사상이 아닙니다. 고불고조(古佛古祖)들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입니다. 법문을 하실 때에도 조사들의 말씀을 항상 인용하셨어요.
큰스님께서는 돈오돈수를 입으로만 얘기한 것이 아니고 직접 실참실오(實參實悟)를 하셨습니다. 말과 행동이 일치된 것이었죠. 그렇기 때문에 큰스님께서는 아직도 수많은 대중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성철 스님 가르침에 대한 원행 스님의 확신은 확고했다. 그러고 보니 원행 스님은 출가 40년을 맞았다. 소감을 묻는 질문에 “본분사를 잊지 않는 사람이 되었으면 그만”이라며 웃는다.

 

정인사 현관에는 ‘圓覺道場何處 現今生死卽是(원각도량하처 현금생사즉시)’라는 글씨가 걸려 있다. ‘깨달음의 도량이 어디 메뇨? 지금 나고 죽는 바로 이자리라네’는 뜻이다. 원행 스님을 만나면서 이 주련의 뜻에 가장 부합하게 살고 있는 사람이 바로 스님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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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주
백련불교문화재단 부장. 현대불교신문 기자,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월간 <불광> 기자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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