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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스승, 성철]
“큰스님은 내 삶의 지표이자 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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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주  /  2014 년 5 월 [통권 제13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575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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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 길상선사 주지 원담 스님 

 

 


 


꽃은 어디에 있든 다 아름답다. 꽃의 거처가 고속도로 옆이든 깊은 산골짜기든 상관없다. 자기 형편에 맞게 피어있는 그 자체로 세상에 향기를 전해 준다.

 

짧지 않은 시간 그나마 여유 있게 고속도로를 달릴 수 있는 이유는 곳곳에 피어난 꽃들 때문이다. 눈꺼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감기려던 눈도 형형색색의 꽃들 앞에서는 다시 힘을 낸다.

 

고속도로를 벗어나 지리산 자락에 들어서니 말 그대로 꽃천지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차에서 잠깐 내려 꽃들을 카메라에 담는다. 조금 더 오래 저들과 어울리고 싶었지만 정해진 시간을 맞추기 위해 다시 길을 달렸다.

 

경남 산청군 시천면 내대리. 일조량이 적어 벼농사를 지을 수 없을 정도의 지리산 깊숙한 오지이다. 여기에 길상선사가 있다.

 

절은 아담했다. 비로보전과 관음전, 지장전, 선방, 요사채 등이 전부다. 법당을 참배한 뒤 여기저기를 둘러보아도 주지 원담 스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물을 사람도 없어 절 한편에서 잠시 숨을 돌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원담 스님이 모습을 드러냈다. 밀짚모자를 쓰고 손에는 여러 가지 ‘연장’을 들고 있었다.
“절에는 저와 공양주 보살님, 선방에 있는 재가자 두 분뿐입니다. 일하시는 분들이 없으니 제가 손을 댈 곳이 많습니다. 하하.”

 


길상선사 전경

 

스님은 길상선사에서 ‘1인 다역’을 소화하고 있었다. 예불과 정진 등 스님으로서의 삶은 물론 화장실 청소부터 밭일까지 다 살펴야 한다.
“하기로 하면 일이 끝이 없습니다. 어떤 날은 아침 일찍 일을 시작해 저녁에야 다시 방에 들어간 적도 많아요. 그래도 내 일이니까 잘 해야죠.” 시골 할아버지 웃음을 보여주는 원담 스님과 자리를 옮겨 마주 앉았다. 스님은 정성스레 차를 내리며 말씀을 이어 나갔다.

 

마음공부의 근본도량으로 가꾸고 싶어

 

“제가 2005년에 길상선사에 처음 왔는데 그때는 법당 보살님과 사중을 관리하는 거사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살아보니 살림 규모가 크지 않은 조그만 절에서 여러 사람들에게 보시를 주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또 제가 누구에게 일을 시키는 것보다는 직접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어서 이렇게 일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지금 길상선사의 운영은 신도님들이 다 알아서 합니다. 저는 예불 올리고 도량만 가꾸면 됩니다. 또 틈틈이 제 공부 하면서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스님은 하루 세 번 예불을 빠지지 않고 올린다. 또 공양도 세 번씩 꼭 한다. 함께 하는 불자들이 적든 많든 하루도 어기지 않고 진행한다. 여법한 대중생활을 위해서다.

 

길상선사의 모든 대중들은 발우로 공양을 한다. 공양주 보살님의 일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함이다. ‘간결함’과 ‘효율성’을 중시하는 원담 스님의 스타일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길상선사 선방에서 정진 중인 천안 거사(김충주․74)는 “어떤 때는 마음이 아플 정도로 스님께서 열심히 살고 계신다. 정해진 일과를 이어나가면서도 선방에서 같이 정진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스스로를 경책하게 된다.”고 전했다.

 

 


객을 위해 차를 내려주시는 원담 스님


 

하루 종일 사찰을 살피는 일이 잦지만 그래도 스님은 매일 아침 1시간 이상의 참선을 빼놓지 않는다.
“성철 큰스님께서는 ‘수좌는 매일 일과로 아침저녁마다 면벽을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언뜻 보면 쉬운 일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 일정 역시 매일 실천하려 합니다.”

 

원담 스님이 절의 중심을 잡고 나서부터는 신도들의 기도와 수행도 안정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매월 초하루 법회와 둘째주 토요일의 참선정진, 관음재일의 삼천배는 물론 능엄주, 광명진언 독송 등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아비라기도도 60파트와 20파트로 나뉘어 각각 이어진다. 또 매년 7월 말 ~ 8월 초, 12월 말 ~ 1월 초에는 각각 여름과 겨울 수련회를 여는데 100명이 넘는 불자들이 함께 한다. 주목할 것은 모든 일정을 신도들이 “알아서” 진행한다는 것이다.

 

스님은 “매월 진행하는 아비라기도 60파트는 길상선사 주지를 맡은 이후 계속해오는 것이다. 60파트를 소화할 때는 하루 20시간씩 기도한다. 일반적인 아비라기도보다는 훨씬 강도가 세다. 여름과 겨울에 하는 수련회에는 가족단위 참석자들이 많아 좋은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고 있다.”고 전했다.

  

그렇다면 원담 스님은 길상선사가 어떤 절이 되기를 바라고 있을까?
“자율 속에 운영되고 있는 길상선사는 앞으로 사람들이 와서 어떤 수행을 하더라도 편안하게 정진하는 곳으로 자리 잡았으면 합니다. 절을 하건 기도를 하건 참선을 하건 마음공부의 근본도량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성철 큰스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저 역시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원담 스님은 길상선사가 지리산의 수행 문화를 이끄는 절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것이 스승의 유지를 이어가는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원담 스님에게 성철 스님과의 인연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아버지 같았던 큰스님

 

스님은 어린 시절 부모님을 여의었다. 넉넉하지 않은 환경이었지만 스님은 ‘공부’에 대한 꿈이 있어 28살까지 다양한 분야를 공부를 했다. 그러다 더 이상 공부만 하기에는 여러 사정이 녹록지 않아 제법 큰 회사에 들어갔다. 3년여 동안 회사를 다녔지만 그마저도 신통치 않았다. 그래서 다시 공부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평생 공부를 할 수 있는 곳이 어디일까 고민하던 스님의 머릿속에 ‘출가’가 떠올랐다. 불교와 절, 스님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던 스님은 서울 남산에 있는 국립도서관에 다니면서 관련 서적들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불교 책을 보기 시작한 지 일주일 쯤 지났을 때 스님은 출가를 결행했다. 

 

“원 없이 공부 좀 해보자 생각하고 출가를 했습니다. 이것저것에 끄달리지 않고 평생 공부만 하고 싶었어요.”
처음에는 보은 법주사로 갔다. 출가하러왔다고 했지만 법주사의 스님은 “학생 같았던” 원담 스님의 모습을 보고 “고시생은 받지 않는다.”며 돌려보냈다. 두 번째로 간 곳은 인제 백담사. 만해 한용운 스님의 기상이 살아있는 곳이어서 갔다. 며칠 지냈지만 백담사 역시 스님과 잘 맞지 않았다. 다시 길을 나섰다. 이번에는 평창 월정사로 향했다. 희찬 스님이 당시 주지를 맡고 있었다. 여기서 스님은 삭발을 했다.

 

 


겁외사를 찾은 원담 스님이 성철 스님 동상 앞에서 예를 올리고 있다.

 

“월정사에서도 며칠을 살았는데 뭔가 허전했습니다. 그래서 3일 동안 매일 새벽예불을 마친 뒤 희찬 스님을 찾아뵙고 ‘저를 다른 절로 보내달라’고 청을 드렸습니다. 희찬 스님께서는 해인사를 추천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날로 짐을 싸 해인사로 갔습니다.”

 

그렇게 해인사로 와 행자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한 달 반 정도 지난 어느 날 행자반장이 스님을 불렀다.
“백련암에서 행자가 필요하다고 하네. 전 행자가 가볼 생각이 있는가?”
“백련암이 어떤 곳인데?”
“방장 성철 큰스님이 계신 곳이라네. 큰스님은 도인으로 소문이 자자해.”
“도인? 그럼 내가 가겠네.”

 

원담 스님은 “저도 도를 닦으러 왔기 때문에 도인이 계시다는 말에 선뜻 가겠다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원담 스님은 성철 스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해 전혀 몰랐다고 한다.

 

백련암과의 인연이 되려고 했는지 당시 해인사 큰절에서는 재무 천제 스님, 회계 원명 스님, 원주 원정 스님 등 문도 스님들이 주요 소임을 보고 있었다. 사형(師兄)스님들도 백련암으로 올라가는 ‘전 행자’에게 반가움을 표시했다. 스님 나이 32살이던 1976년 11월의 일이다.

“그렇게 백련암에 갔는데 원택 스님이 원주, 원행 스님이 공양주, 원천 스님이 시찬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까지 모두 4명이 큰스님을 모시게 됐습니다.”

 

원담 스님의 눈에 비친 성철 스님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백련암에 처음 갔을 때 원행 스님이 원담 스님을 성철 스님에게 안내했다.


“방에 들어가 인사를 하려고 하는데 큰스님이 굉장히 동안(童顔)으로 보였습니다. ‘도인이 너무 젊은 거 아닌가?’하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그래서 인사를 드리고는 스님께 여쭈었습니다.
‘스님 되게 젊어 보입니다?’ ‘그래 내가 몇 살로 보이노?’ ‘40대로 보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니 환갑을 진작 넘기신 큰스님께서 기분이 좋으셨던지 웃으시면서 ‘그래? 여기서 잘 있어봐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백련암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딱 보기에도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상황이다. 원담 스님은 “큰스님이 너무 편안해 보였다. 그래서 그런 당돌한 질문을 했었던 것 같다.”며 “나중에서야 큰스님의 존재를 확인했고 대단하신 분이라는 것을 알았다.”며 웃었다.
“그렇게 백련암 생활을 시작한 뒤부터는 맨날 혼나고 깨지고 그랬습니다. 큰스님께서는 저만 보면 ‘촌놈’이라고 하셨어요. 하하.”

 

원담 스님 역시 행자생활을 시작한 뒤 ‘백련암 커리큘럼’에 따라 공부를 시작했다. ‘예불대참회문’과 ‘능엄주’를 외우고 한문공부를 한 뒤 본격적으로 일어공부를 했다. 일어 소설을 읽을 정도가 되자 경전을 보기 시작했다. 스님은 『화엄경』과 『구사론』, 『유식』까지 본 뒤 『기신론』을 본 뒤 백련암에서 나왔다. 선방에 갈 생각으로 나왔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앞이 깜깜했다. 그래서 3일 만에 다시 백련암으로 돌아왔다. ‘출가’가 아닌 ‘가출’이었다.

 

가출 뒤에는 벌이 내려졌다. 일주일간 매일 삼천배를 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이렇게 좌충우돌의 연속이었지만 원담 스님에게 성철 스님은 언제나 편안한 ‘아버지’였다.
“백련암에 있을 때 큰스님에 대해 특이하다는 생각을 못했어요. 그냥 편한 아버지 같은 생각뿐이었습니다. 도인이다 뭐다 모르고 아주 아버지 모시듯 그렇게 시봉하며 살았어요.”

 

그렇게 백련암 생활을 마친 뒤 스님은 본격적으로 선방에 다니기 시작했다. 스님은 ‘마음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요 물건도 아닌 이것은 무엇인가?’를 화두로 들었다.

 

“첫 안거는 지리산 벽송사 선원에서 보냈습니다. 그 후 문경 봉암사, 봉화 각화사, 해인사, 김천 수도암 등에서 살았습니다. 수도암에 갔을 때는 현재 해인총림 방장이신 법전 스님께서 후학들을 이끌고 계셨는데 방부를 들이겠다고 하니 큰스님 허락을 받아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다시 백련암에 가서 살다가 나중에 허락을 받고 수도암에서 정진했습니다. 후에도 지리산 칠불암선원, 봉암사, 부산 범어사, 순천 송광사, 평창 상원사 등에서 계속 있었습니다.”

 

평생을 선방에서 정진하면서 보고 느꼈던 성철 스님의 핵심 가르침은 무엇일까? 원담 스님은 “깨달음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잘라 말했다.

“불교의 핵심이 깨달음입니다. 그 중에서도 화두 타파를 통한 깨달음이 가장 빠른 길입니다. 큰스님께서도 이것을 계속 강조하셨어요. 저는 화두 타파를 못했으니 지금도 화두 챙기는 것 밖에 할 일이 없습니다. 화두 챙기는 시간이 지금도 제일 즐겁습니다.”

 

 

 

원담스님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길상선사 선방에서 정진을 하고 있다.


 

원담 스님은 성철 스님이 열반하기 전 5개월여 동안 곁에서 모셨다. 그때에도 성철 스님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생활을 이어갔다고 한다.
“큰스님께서는 몸이 아무리 아프시더라도 정확하게 일과를 보내셨습니다. 밤 10시면 어김없이 잠자리에 드셨고 새벽 2시면 일어나셨어요. 당신의 잠자리는 꼭 직접 펴고 또 직접 정리하셨습니다. 그 상황에서 규칙적인 생활을 하시는 것을 보며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어요.”

 

성철 스님의 마지막을 함께 하고 또 열반을 지켜보면서 원담 스님 역시 많은 혼란에 빠졌다.
“큰스님께서 돌아가시니 뭔가 하나 쏙 빠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제 지난날을 되돌아보니 그동안 큰스님 은덕으로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큰스님께서 열반하신 뒤로는 반듯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절 이외의 공간에서는 자지 않고 또 신도님들 집에 가지 않습니다. 나름 스님답게 살아보려 이 두 가지만은 꼭 지키려 합니다.”

 

원담 스님은 성철 스님을 “제 삶의 지표이자 표준이 되어 주신 분”이라고 말했다. 또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던 스승”이라고 했다.
“오직 깨달음을 위해 사셨고 또 깨달은 후에는 후학들에게 그것을 가르치려고 노력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큰스님의 이런 마음을 잘 헤아리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원담 스님은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도 “화두 챙기는 일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했다.
“내 호흡이 다할 때까지 ‘이뭣고’를 챙겨야죠. 이것만이 제 살길이고 밥값을 하는 것입니다. 또 그렇게 해야만 부처님 제자이자 성철 큰스님 상좌로 사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정말 이번 생에 공부를 마친다는 생각으로 할 것입니다. 그렇게 깨달아서 정말 큰스님 살림살이가 무엇이었는지를 한 번 확인해 보고 싶습니다. 그래야만 저의 출가 목적도 달성하는 것이니까요.”

 

원담 스님의 표정은 진지해졌다. 막 70에 들어선 선객(禪客)에게서 결연한 의지가 엿보였다. 오랜 시간의 인터뷰를 마치고 나와 경내를 둘러보니 꽃들은 그대로 아름다웠고 바람은 청량했다. 원담 스님과 길상선사가 지리산의 꽃으로 자리매김 될 날이 그리 멀지 않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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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주
백련불교문화재단 부장. 현대불교신문 기자,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월간 <불광> 기자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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