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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읽는 성철 스님]
청년 이영주, 스님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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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주향산  /  2018 년 6 월 [통권 제62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291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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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넘치는 큰 일들은/ 붉은 화롯불에 한 점 눈송이요/ 바다를 덮는 큰 기틀이라도/ 밝은 햇볕에 한 방울 이슬일세./ 그 누가 잠깐의 꿈속 세상에/ 꿈을 꾸며 살다가 죽어가랴/ 만고의 진리를 향해 모든 것 다 버리고/ 초연히 나 홀로 걸어가노라.” 1936년 봄 25세 청년 이영주가 세속의 인연을 끊고 은사 동산스님에게 계를 받고 스님 성철이 된 뒤 ‘수행자의 기개’를 밝힌 출가시(出家詩)이다.

 


해인사에서 출가한 직후의 성철 스님 모습

 

조선이 일제에게 완전히 국권을 빼앗기고 2년 뒤인 1912년 4월 6일(음 2월 19일)에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에서 지리산의 기운을 안고 태어난 이영주(李英柱), 어려서 서당에도 다니고 소학교에 들어가 공부를 해보았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소년 시절의 영주는 그런 불만을 오로지 독학으로 동서고금의 고전을 읽으며 달래고 있었다.

 

그러다 스무 살이 지난 어느 날 우연히 만난 어떤 스님에게서 영가 대사의 《증도가(證道歌)》를 얻어 읽다가 ‘어두운 밤에 길을 밝혀줄 등불을 만난 것’ 같은 희열을 느꼈다. 이 《증도가》가 그의 인생행로를 완전히 바꾸고 꽉 막힌 채 억눌려 있던 한국 불교를 살리게 되었으니, 그것을 전해준 스님과의 만남은 필연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 스님은 한국불교를 살리려고 잠시 모습을 보여준 관음보살의 화현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라를 빼앗기지 않았으면 유학을 공부하여 선비 학자의 길을 가거나 과거를 거쳐 정승 ‧ 판서가 되어 백성을 살피는 훌륭한 인재가 되는 꿈을 꿀 수도 있었겠지만, 현실이 그 길을 아예 가로 막고 있었다. 일본인들을 따라 신학문을 배우고 고시에 합격해 총독부 고위 관리가 되거나 “황군(皇軍)의 장군”이 되는 길을 택하는 선비의 후손들도 있었다.

 

그러나 꼿꼿한 선비 집안의 기백을 물려받은 그의 성품상 그럴 수는 없었다. 이영주가 어린 시절부터 동서양 고전을 탐독하고, 《증도가》를 만난 뒤 곧바로 참선 수행자의 길로 들어서기로 결심하는 데에는 이처럼 고통스러운 시대 상황이 한 몫을 했을 것이다.

 

고향 집에서 가까운 지리산 대원사에서 젊은 이영주가 치열하게 참선하고 있다는 소식은 가야산 해인사에까지 전해졌다.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고 하지만 참 수행자가 가물에 콩 나듯 희귀했던 그 시절, 젊은 재가자가 출가자보다도 더 치열하게 수행하고 있다는 소식이 빠른 속도로 전해지는 것은 당연하고도 당연한 일이었다.

 

대원사 주지의 서신을 받은 효당(최범술) 스님이 대원사로 찾아왔다. 효당 스님의 권유에 해인사로 간 이영주를 당시 백련암에 주석하고 있던 동산 스님이 발견했고, 동산 스님은 내심 이 청년을 ‘큰 그릇’으로 키워야겠다고 결심 했으리라. 동산 스님이 “참선을 잘하려면 스님이 되어야 한다.”고 출가를 권하지만, 출가와 재가라는 형식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청년 이영주는 쉽게 그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던 중 “여기 길이 있다. 아무도 그 비결을 말해주지 않는다. 그대 스스로 그 문을 열고 들어가기까지는 ….” 동산스님의 이 결제 법문이 재가 수행자 이영주의 마음을 움직였다. “내가 그 문을 열고 들어가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 그 비결을 알아내리라!”

 

큰 그릇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그런 큰 울림이 필요했으리라. 이렇게 해서 가야산 호랑이 성철이 태어났다. 이 호랑이를 낳은 동산 스님은 일반적으로 ‘은사 스님’이라는 호칭으로는 담아낼 수 없는 어른이었다. 동산과 성철의 만남, 성철이라는 큰 그릇을 알아본 동산이 아니었으면 한국 불교가 어찌 되었을까.

 

이영주가 은사 동산 스님에게서 계를 받고 스님 성철이 된 뒤 찍은 이 사진을 보자. 이목구비(耳目口鼻)가 또렷한 데에다 똑바로 서 있는 자세에서는 누구도 범접하기 어려운 기백이 흘러넘치지 않는가. 꽉 다문 입 속에서 “이제부터 나는 성철이다.

 

아무도 뚫지 못한 암벽을 뚫고 새 길을 밝혀내리라! 내 가는 길에는 그 어떤 장애물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고 사자후를 토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세상을 쩌렁쩌렁 울리고 한국 불교를 살려낼 가야산 호랑이 성철 스님이 출가한 1936년은 이 땅을 강점하고 있던 일제가 만주를 넘어 중국 본토를 집어삼키려는 야욕을 불태우면서 우리 백성들에 대한 수탈이 더욱 거세질 때였다. 난세에 영웅이 나오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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