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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식 이야기]
유식무경(唯識無境)에서 ‘무경’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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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해  /  2018 년 6 월 [통권 제62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4,845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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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 기본적 물음들 중의 하나는 다음과 같은 것일 수 있다 : 어떻게 번뇌를 떠날 수 있는가, 어떻게 마음대로 마음을 유지할 수 있는가? 이 물음은 마음의 컨트롤 방안에 관한 물음이다. 이 물음은 붓다 이전의 물음이었고, 붓다의 물음이었고, 붓다 이후 오늘의 물음이기도 하다.

 

 


 

 

답안들은 이미 많이 제시되었지만, 새로운 물음들도 다시 제기되었으니, 그 답안들을 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라는 것이었다. 유식불교는 마음의 컨트롤을 돕기 위해 마음의 구조나 상태에 대한 논의를 전개했고, 그 논의들은 다양한 논서에서 소개되고 있다.

 

필자는 저러한 물음들을 염두에 두면서 “유식무경”에서의 ‘무경’의 의미를 논서를 참고삼아 살펴보려 한다. 무경의 의미를 찾음에 있어서 우선 다음과 같은 물음이 유용할 수도 있다.

 

1) 무경은 경계의 공무(空無, 아무 것도 없음)를 말하는가, 2) 아니면 경계의 무-자성을 의미하는가, 3) 아니면 경계의 무-변계소집성을 의미하는가? 첫째 물음은 꿈의 비유를 들을 때 주로 떠오르는 물음이고, 둘째 물음은 일체유심조라는 말을 들을 때 주로 떠오르는 물음이고, 셋째 물음은 유식수행론을 들을 때 주로 떠오르는 물음이다. 이 셋 중의 어느 것이 무경의 의미일까?

 

유식불교의 창시자 중의 한 분인 세친은 꿈의 비유를 들어 무경을 설명하고 있는데, 그 설명은 경계의 공무를 말하는 듯이 여겨지기도 한다. 세친은 『유식20론』을 지었고, 현장은 이것을 한역하였다.

현장이 번역해 소개한 세친의 『유식20론』 중에서 제15송과 제16송은 다음과 같다 :

 

“1) 현재적 지각이라고 해도 꿈 등과 같다. 2) 이미 현재적 지각을 일으켰을 때라고 하면 3) 봄과 경계는 이미 없다. 4) 어찌 현량(現量)이 있다고 인정하겠는가. 5) 앞에서 말한 것 같이 흡사 경계인 듯한 식이 있어, 6) 이것으로부터 기억이 생겨난다. 7) 아직 깨어나지 않은 때는 알 수 없는 점이, 8) 꿈에서 본 것이 실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 게송은 다름과 같이 풀어서 이해해 볼 수 있을 것이다: 1) ‘현재적 지각’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외부 경계가 없는 꿈과 같다. 2) 왜냐하면 ‘현재적 지각’에 대해 우리가 (반성적으로 분별하면서) 말하는 순간에 말해지는 것은 이미 지나간 ‘현재적 지각’일 뿐이고, 3) ‘현재적 지각’을 성립시켰던 안식과 색경(色境)도 이미 사라져서 없기 때문이다.

 

4) 사후에 반성적으로 분별되는 ‘현재적 지각’을 어찌 현량(현재적 지각)이라고 말하겠는가? 5) (반론:사후적으로 기억될 수 있기 때문에, 이전에 지각될 때의 경계는 실제로 있었다.) 이전에 지각된 경계라는 것도 이미 제6의식이 전5식을 반성하면서 흡사 대상인 듯이 분별하였던 것에 불과하다.

 

6) 반성하면서 흡사 대상인 듯이 분별하여 저장해 두었던 것으로부터 기억이 생겨나므로, 기억되는 경계도 반성적 분별 이전의 경계가 아니고, 따라서 실제로 있던 경계라고 할 수 없다.

 

7) (반론: 만약 꿈속의 경계와 꿈에서 깼을 때의 경계가 모두 실제가 아니라면, 꿈에서 깬 사람이 꿈속의 경계가 실제가 아님을 아는 것 같이, 꿈에서 깨어 있는 사람은 현재의 경계도 실제가 아니라고 알아야만 할 것이다.) 아직 꿈에서 깨어나지 않은 때는 꿈속의 경계가 실제가 아니라는 점을 알 수가 없듯이, 8) 허망분별에서 아직 깨어나지 못한 사람은 외부 경계가 실제가 아니라는 점을 알지 못한다.

 

제16의 게송의 후반부에는 다음과 같은 해설이 덧붙여져 있다 :

 

“논하여 말한다. 아직 깨어나지 않은 때에는 꿈속의 경계가 외부에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님을 알지 못하지만, 깨어났을 때에는 곧 그것을 아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세간은 허망분별에 익숙하고 혼미해져서 꿈속에서 있음과 같기에, 모든 있다고 보인 것은 모두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다.

아직 진정한 깨달음을 얻지 못하면 스스로 알 수가 없다. 만약 어느 때에 저 출세간을 다스리는 무분별지혜를 얻으면, 곧 진정한 깨달음이라고 부른다. 이것 이후에 얻어지는 세간의 청정지혜[후득지]가 현전하는 지위에서는 저 경계가 실제가 아니라는 것을 실제대로 명료히 안다.

 그 의미는 [꿈에서 깨어남과 진실한 깨달음에서] 평등하다.” 

 

꿈의 비유만으로 보면, 경계는 꿈속의 경계인 셈이니, 경계는 공무와 같이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꿈에서 현실로의 깨어남의 비유는 분별지에서 무분별지로 깨어남에 대한 비유이다. 이 점에 착안하면, 무경이라는 말은 무분별지에게는 분별지의 경계가 없다는 말로 이해되고, 더 나아가 후득분별지에게도 이전과 같은 식의 분별지의 경계는 없다는 말로 이해된다.

 

3성론으로 이해해 보면, 무분별지는 원성실성을 경계로 삼기에 변계소집성의 경계가 없고, 후득분별지는 의타기성을 경계로 삼기에 변계소집성의 경계가 없다는 것이 무경의 의미라고 이해될 수 있다.

 

2) 무경이 경계의 무-자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물음은 현장이 『성유식론』제7권에서 소개된 유식무경에 대한 4지혜의 논증을 읽을 때 생겨날 수 있다. 그 중 3지혜에 대해 먼저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4가지 지혜를 성취한 보살은 그에 따라 유식무경을 깨달을 수 있다. 1) 제1은 심식의 상이한 양상을 아는 지혜이다. 이를테면, 동일한 처소에서 아귀, 사람, 천인은 행업(業)의 차별됨을 따라 보는 것이 각기 상이하다.

[예를 들면 같은 물에 대해서도 아귀는 고름으로, 사람은 먹는 물로, 천인은 보석으로 장식된 땅으로 인식한다.] 경계가 만약 실제로 있다면, 이런 일이 있음이 어떻게 성립하겠는가? 2) 제2는 대상 없이도 현재의 심식이 경계를 얻을 수 있음을 아는 지혜이다.

 

이를 테면, 과거, 미래, 꿈속의 경계, [비추어진] 영상 등을 연할 때, 현재의 심식은 그것들을 얻을 수 있지만, 이미 경계는 없다. 다른 것들도 역시 응당 이러하다. 3) 제3은 자신이 응당 전도되지 않아야 함을 아는 지혜이다. 이를테면, 만약 우매한 범부의 지혜가 실제의 경계를 얻는다고 하면, 그는 응당 자연히 전도가 없음을 이룩하면서, 공용[수행]으로 말미암지 않고도 응당 해탈을 얻어야 한다.”

 

제1의 지혜의 해설에서 언급된 바, 동일한 처소에서 아귀, 사람, 천인은 행업의 차별됨을 따라 보는 것이 각기 상이하다는 것은 경계의 무-자성을 알려준다고 볼 수 있다.

 

제2의 지혜의 해설에서 언급된 바 과거, 미래, 꿈 속의 경계, 비추어진 영상 등을 연할 때, 현재의 심식은 그것들을 얻을 수 있지만, 이미 경계는 없다는 것도 경계의 무-자성을 알려 줄 수 있다.

 

제3의 지혜의 해설에서 언급된 바, 만약 우매한 범부의 지혜가 실제의 경계를 얻는다고 하면, 그는 응당 자연히 전도가 없음을 이룩하면서, 수행으로 말미암지 않고도 응당 해탈을 얻어야 한다는 것은, 경계의 무-자성을 말하는 것 같지가 않다.

 

왜냐하면 경계의 무-자성이란 마음먹기에 따라 경계의 성품이 달라진다는 것을 의미할 터인데, 제3의 지혜의 해설에서는 오직 수행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무경이라고 강조하기 때문이다.
제4의 지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고 있다 :

 

“4) 제4는 세 가지 지혜를 따라 전변됨을 아는 지혜이다. 4-1) 첫째는 자유로운 자의 지혜를 따라 전변됨을 아는 지혜이다. 이를테면, 이미 마음의 자유로움을 얻은 자에게서는 땅 등을 전변시키려는 욕구를 따라 모두 이룩된다.

 

경계가 만약 실제로 있다고 하면, 어떻게 전변시킬 수 있겠는가? 4-2) 둘째로 관찰자의 지혜를 따라 전변됨을 아는 지혜이다. 이를테면, 뛰어난 선정을 증득해서 제법의 관찰을 수행하는 자에게서는 하나의 경계의 관찰을 따라 많은 모습이 현전한다.

 

경계가 만약 실제라고 하면, 어찌 마음을 따라 전변되겠는가? 4-3) 셋째는 무분별지를 따라 전변됨을 아는 지혜이다. 이를테면, 실제를 증득한 무분별지를 일으킬 때는 일체의 경계의 모습이 모두 현전하지 않는다.”

 

첫째에서 언급된 바, ‘마음의 자유로움을 얻은 자에게서는 땅 등을 전변시키려는 욕구를 따라 모두 이룩된다’는 것, 또 둘째에서 언급된 바, ‘뛰어난 선정을 증득해서 제법의 관찰을 수행하는 자에게서는 하나의 경계의 관찰을 따라 많은 모습이 현전한다’는 것은 경계의 무-자성을 지지해주는 듯할 뿐, 경계의 공무를 지지해 주지는 못하는 듯하다. 경계가 공무라면 전변시킬 것도 없고, 현전시킬 것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에서 언급된 바, ‘실제를 증득한 무분별지를 일으킬 때는 일체의 경계의 모습이 모두 현전하지 않는다’는 것은 경계의 무-변계소집성을 지지해주는 듯할 뿐, 경계의 공무를 지지해주지는 못한다. 경계가 공무라면 수행의 대상이 공무가 되어 수행이 이뤄질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실제를 증득한 무분별지’에 대해서는 일체의 경계의 모습이 모두 현전하지 않는다고 말해졌다. 이 말은 무분별지의 경계가 원성실성이라는 말로 이해될 수 있다. 원성실성은 모든 법이 평등하여 무차별하다는 것을 이르는 말인데, 이는 모든 법들이 ‘현존한다’는 동등한 측면에서만 알아차려질 뿐, ‘각자의 특징들을 갖는다’는 상이한 측면에서는 알아차려지지 않는다는 점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일체의 경계의 모습이 모두 현전하지 않는다’는 말은 제법이 현존하는 것으로 알려지기는 하지만, 제법이 각자의 특징들에 있어서 알려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이런 점들에 의거하면, 무경이란 범부에게 경계의 무-자성을 알려주고, 수행자에게 경계의 무-변계소집성을 알려주려는 말일 뿐, 경계의 공무를 알려주려는 말은 아닌 셈이다.

 

공무는 번뇌에 잠기에 할 수 있지만, 무-자성과 무-변계소집성은 번뇌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다. 무-자성과 무-변계소집성에 대한 앎을 지닌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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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해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교 철학박사, 성균관대 철학과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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