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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법문 해설]
현상과 본질의 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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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  2018 년 7 월 [통권 제63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4,361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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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 같은 유위법

 

현상과 본질은 철학에서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다. 현상이 겉으로 드러난 것으로서 표피적이고 가변적인 것이라면 본질은 현상 이면에 있는 근원적이고 불변적 성질을 말한다. 예를 들어 들판에 피어 있는 꽃은 겉으로 나타난 현상이다. 꽃은 인식의 대상으로 눈앞에 존재하지만 화무십일홍이라는 말처럼 가변적이고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하다.

 

『금강경』에서는 그와 같은 현상에 대해 ‘인연因緣으로 성립된 유위법有爲法’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유위법의 특성은 ‘이슬 같고[如露]’, ‘번개처럼 사라지는 것[如電]’이라고 했다. 반면 본질은 그런 현상 이면에 존재하는 존재의 근원적 성질이나 이법을 말한다. 불교에서 볼 때 한 송이 꽃이라는 현상은 연기緣起라는 이법에 의해 존재한다. 연기법이라는 이법은 우주에 항상 존재하는 것[常住法界]이므로 꽃이라는 현상의 본질이다.

 


포탈라궁 전경

 

그런데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관점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idea처럼 현상을 초월해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현상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헤겔은 후자의 입장을 취하는데, 그는 “본질은 현상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본질은 현상을 초월해 있지 않으며, 근원적으로 보면 현상과 본질은 소통한다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이런 관계를 가장 잘 설명한 것이 화엄에서 말하는 이理와 사事라는 개념이다. 이理는 우주적 원리이자 연기법과 같은 존재의 본질에 해당한다. 반면 사事는 인식의 대상으로 눈앞에 펼쳐져 있는 삼라만상과 같은 현상이다. 화엄학에서는 이와 사가 분리된 것이 아니라 상호 소통한다고 보았는데, 그것을 설명하는 것이 ‘이사원융의理事俱融義’라고 할 수 있다.

 

존재의 공성과 이법의 실재성[事虛理實]

 

일반적으로 ‘이理’는 이법理法, 본체本體를 의미하는 반면 ‘사事’는 이법에 의해 드러난 무수한 사상事相이나 본체에 의해 드러난 작용作用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사원융이란 현상과 본질, 본체와 작용이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상호 소통하는 불이不二의 관계라고 설명한다. 

 

눈앞에 펼쳐져 있는 무수한 존재들은 이理에 대응되는 현상[事]들이다. 한 송이 꽃, 계절의 변화, 태양과 구름, 산과 대지, 무수한 생명체들도 모두 사事로 표현되는 현상들이다. 그런데 무수한 현상만 있고 그것을 관장하는 이理가 없다면 세상은 무질서와 혼돈에 빠지고 말 것이다. 겨울에 꽃이 피고, 물이 거꾸로 흐르고, 악인이 복을 받는 등의 일이 벌어질 것이다. 따라서 무수한 현상[事]들이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보편적 질서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연기법이다.

 

그런데 이법을 어떻게 이해하는 가에 따라 사유의 양태가 갈라진다. 이법을 초월적인 것으로 이해하면 그 이법은 모든 존재를 넘어서 있는 이데아나 신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연기법이라는 이치는 개별적 사물을 초월해 있는 질서나 절대자가 아니다. 연기의 원리를 결정하는 것은 초월적 이법이 아니라 무수한 존재들 그 자체들이기 때문이다. 현상으로 드러나 있는 나무, 산, 강, 토양 같은 무수한 현상[事]들이 빚어내는 유기적 관계와 질서가 곧 연기법이다. 따라서 현상과 본질, 작용과 본체는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체계 속에 있다.

 

이사원융의 의미를 설명하는 첫 번째 원리는 ‘사허이실事虛理實’이다. 눈앞에 드러난 현상과 작용으로써 사事는 실체 없는 허상[事虛]이고, 그 이면에 있는 이법이 진짜 실상[理實]이라는 것이다. 한 송이 꽃은 작용이고 개별적 현상[事]이므로 실체가 없다. 처음부터 꽃이었던 것도 아니고, 영원히 꽃인 것도 아니며, 스스로 꽃인 것도 아니다. 꽃이라는 개별적 작용, 개별적 현상으로서의 존재는 연기라는 보편적 이법에 의해 비로소 존재하기 때문이다.

 

현상은 실체가 없음으로 피고 지는 꽃처럼 흘러가고 변화하지만 이법은 실상이므로 영원하다. 이理는 고착화된 형상으로 머물지 않음으로 무상無相의 특징을 갖고 있다. 무상이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무수한 현상으로 드러날 수 있다. 귤은 어디서나 귤이 아니라 회수를 건너가면 탱자가 되는 것도 이런 이치다.

 

물론 현상[事]도 현상으로 고착화된 것이 아니라 현상 자체가 또 다른 이理로 작용한다. 여기서 이사원융의 첫 번째 명제인 “연기하는 사법[緣起事法]은 허공처럼 자성이 없으므로[虛空無性] 전체가 온전히 이理”라는 명제가 성립한다. 한 송이 꽃은 그 자체로는 실체 없는 현상이므로 무자성無自性이다. 꽃은 무수한 존재들의 상호의존 관계 속에서 드러남으로 눈앞에 드러난 꽃은 허상이고, 우리가 보는 현상의 본질은 연기라는 이법이다. 그래서 무수한 현상을 보지만 그것은 물거품일 뿐이며 실상은 이법이다. 여기서 개별적 현상은 공空한 것으로 부정되고, 현상의 이면에 있는 이법이 실상으로 긍정된다.

 

우리가 보는 무수한 현상들은 이법의 현현이라는 것에서 두 번째 명제가 나온다. “진실한 이법[眞性理法]은 실재이기 때문에 이법은 전체의 사事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우리가 보는 것은 개별적 현상들이 아니라 연기라는 이법의 드러남이다. 눈앞의 현상과 작용이 실상의 반영이라면 비록 인연따라 명멸하더라도 그것은 허상이 아니라 이법이라는 실상의 작용이다. 여기서 현상은 거짓이고 이법이 실상이라는 첫 번째 명제는 다시 전복된다.

 

개별 사상들이 곧 이법이라는 것에서 세 번째 명제가 도출된다. “이와 사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므로[不相離] 이와 사는 함께 존재한다[理事俱存].”는 것이다. 한 송이 꽃과 한 송이 꽃을 피게 해 준 연기적 관계는 분리될 수 없음으로 꽃도 있고, 꽃을 피게 한 연기적 관계도 있다. 여기서 꽃이라는 현상과 연기라는 본질이 동시에 긍정[俱存]된다. 이사理事가 동시에 긍정되 고 드러나는 쌍조雙照가 된다.

 

넷째는 “두 뜻이 서로를 빼앗음으로[相奪] 이와 사가 쌍으로 끊어진다[理事雙絶].”는 것이다. 한 송이 꽃[事]은 무수한 관계라는 연기[理]를 통해 존재한다. 따라서 이理는 눈앞의 현상이 거짓임을 폭로함으로써 사를 박탈한다. 반면 무수한 관계라는 연기법은 헤겔의 주장처럼 한 송이 꽃이라는 현상에 의지해 드러남으로 이번에는 사事가 이理를 박탈한다. 이렇게 사도 없 고 이도 없는 구민俱泯이 됨으로 쌍차雙遮라는 상호부정이 된다.

 

쌍차쌍조雙遮雙照

 

다섯째는 “사가 이를 온전히 드러내면서도[事全理] 사는 무너지지 않는다[事不壞].”는 것이다. 한 송이 꽃이라는 현상과 작용은 연기라는 이법이 드러난 것이다. 연기라는 이법은 한 송이 꽃에 의지해 드러난 것이므로 우리는 꽃이라는 현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이법을 보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송이 꽃이라는 사는 눈앞에 존재한다. 따라서 사가 비록 이의 드러남이라고 해도 눈앞의 현상으로서 사는 그대로 존재한다.

 

여섯째는 “이가 사를 온전히 하면서도[理全事] 이는 없어지지 않는다(理不失).”이다. 연기적 관계라는 이법이 한 송이 꽃이라는 현상을 만들어냈다. 이는 한 송이 꽃이라는 사에 의지해 자신을 완전하게 드러낸다. 이렇게 이는 사에 의지해 드러났지만 그렇다고 사만 있고 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일곱째는 “둘이 함께 존재하면서도[俱存] 함께 성립하지 않음[俱不立]”이다. 한 송이 꽃이라는 현상은 분명 이의 드러남이므로 한 송이 꽃을 통해 이와 사는 모두 존재한다. 그러나 현상 없이는 이도 없고, 이 없이는 현상도 없음으로 둘은 동시에 또 없는 것이다. 이와 사는 다 존재하는 구존俱存인 동시에 모두 사라지는 쌍절雙絶이 된다.

 

여덟째는 “함께 없어지면서도[俱亡] 함께 사라지지 않음[俱不泯]”이다. 한 송이 꽃이라는 실체적 현상은 없고, 그렇다고 현상과 분리된 이법도 없다. 하지만 꽃이라는 현상은 여전히 있고, 그 이면에 연기라는 이법도 여전히 존재한다. 둘 다 부정[雙遮]되지만 동시에 둘 다 긍정[雙照]되는 존재의 중도성이 드러난다. 아홉째는 “앞의 여덟 가지 명제가 서로 수순[相順]하면서도 함께 나타남[俱現]”이다. 지금까지 설명한 여덟 개의 명제가 서로 위배되거나 모순되지 않고 서로 조화롭게 상호 수용됨을 의미한다. 열째는 “모두 각자가 서로 빼앗으면서도[相奪] 사라지지 않음[不泯]”이다. 한 송이 꽃은 연기적 관계로 존재함으로 본질[理]은 현상[事]이라는 개별상을 박탈하고, 연기라는 이치[理]는 무수한 현상들[事]에 의지해 나타남으로 현상은 다시 본질을 박탈하는 상탈相奪이 된다. 이렇게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빼앗지만 여전히 본질은 본질대로, 현상은 현상대로 존재한다.

 

이상과 같이 열 가지로 정리된 이사원융의는 현상과 본질, 본체와 작용이 둘이 아닌 불이不二임을 밝히고 있다. 그럼에도 본질과 현상이 없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특성대로 존재하고 있다. 그래서 본질도 없고 현상도 없는 쌍차가 되고, 동시에 본질도 있고 현상도 있는 쌍조가 된다. 결국 이사원융의는 존재의 중도적 특성을 밝히는 교설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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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성균관대 초빙교수.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선의 생태철학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연구교수, 조계종 불학연구소 선임연구원, 불교신문 논설위원, 불광연구원 책임연구원, <불교평론> 편집위원 등을 거쳐 현재 성철사상연구원 연학실장으로 있다. 저서로 『선의 생태철학』 등이 있으며 포교 사이트 www.buruna.org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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