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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로 세상 읽기]
‘흉내 내기’에서 벗어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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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군도  /  2018 년 8 월 [통권 제64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4,095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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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지화상은 누가 뭐라 물어도 다만 손가락을 들었다. 후에 동자가 있어 어느 때 방문객이 묻었다: “스님께서 어떤 법요를 설하던고?” 동자 역시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화상은 이 말을 듣고 칼로 동자의 그 손가락을 잘랐다. 동자는 아파 통곡하며 달아날 때 화상이 불렀다. 동자가 머리를 돌리자 이때 화상이 손가락을 들어보였다. 동자는 홀연히 깨쳤다.”(주1) (『무문관』 제3칙)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은 모방이다.”고 말했다. 예술의 높고 깊은 경지도 처음에는 ‘흉내 내기’에서 비롯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어느 경지에 올라섰는데도 ‘흉내 내기’가 계속 지속된다면 곤란하다. 그대로 남의 것을 따라하는 흉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무문관』제3칙 ‘구지수지俱胝竪指’에 등장하는 동자승은 스승의 흉내를 아주 잘 냈는가 보다. 스승 구지화상은 누가 뭘 물어 와도 손가락을 들어 보일 뿐 말이 없었다. 그래서 그의 이름도 ‘구지’로 불렸다.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동자승역시 누가 스승님의 가르침이 무엇이냐고 물어 오면 똑같이 손가락을 치켜 세웠다. 이 얘기를 전해들은 구지화상이 어느 날 동자승을 불러 “부처가 무엇인고?” 물었다. 이에 동자승이 스승이 늘 하던 대로 손가락을 들어보였다. 그 순간 구지화상 이 냅다 칼로 그 손가락을 잘라 버렸다. 그리곤 아파서 도망치는 동자승을 불러 세우곤 또 다시 묻는다. “부처가 무엇인고?” 동자승은 버릇처럼 손가락을 치켜세우려 했으나 손가락이 없다. 그 때 불현듯 영묘한 깨달음이 열리게 됐다는 일화다.

 

그렇다면 동자승의 깨달음은 무엇일까? 그는 매양 그랬듯이 스승을 흉내 내던 손가락이 없어진 사실을 접하고 홀연히 자신의 세계가 활짝 열리는 것을 깨닫게 된다. 개안開眼이 이루어진 것이다. 스승 구지화상은 바로 이것을 깨우쳐 주었다. ‘흉내’는 그저 안주安住에 그칠 뿐 뛰어넘는 경지를 터득하지 못한다. 스승이 가르쳐주는 내용을 달달 외우고 어긋남 없이 실천하는 제자는 모범적이라 할 수 있으나 스승을 뛰어넘지 못한다. 더욱이 스승이 가르쳐주는 것도 자신의 삶이라 할 수 없다. 즉 자신의 세계는 없고 스승이 그어준 세계에 갇혀 살 뿐이다.

 

손가락 잘린 동자의 깨달음

 

뛰어난 위인들의 삶에는 반전과 역설이 있다. 발명가로 유명한 에디슨이 어릴 적 계란을 부화하기 위해 자기 몸으로 몇 날 며칠을 품고 있었다는 일화는 그냥 웃어넘길 일이 아니다. 처음엔 어미 닭의 부화를 ‘흉내’ 내는 일이었으나 훗날 엄청난 발명의 세계를 열게 한 시도였다는 점에서 남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에디슨 역시 동자승처럼 부처를 잘못 가르쳐주고 있는 손가락이 잘리는 아픔을 경험했을 것이다. 품에 안고 있는 것만이 부화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면 부화를 위한 전부의 세계를 아는 길에 접어들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곧 에디슨이 그만의 깊은 경지를 터득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동자승이 그랬던 것처럼 에디슨도 흉내 내기를 통해 개안의 세계를 무한히 넓혀나가게 된 것이리라.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다. 몇 번의 실패가 나를 좌절하거나 비굴하게 해서는 안 된다. 에디슨이 자신의 경험을 통해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말했던 것처럼 지금의 실패야말로 나에게는 값진 경험이자 교훈이다. 실패는 기본기를 다지는 과정이다. 기초가 튼튼해야 어떠한 비바람에도 무너지지 않는 높은 건물을 지을 수 있다. 흉내를 잘 내야 실패하는 법도 배울 수 있다. 따라서 흉내 내기는 기본기를 다지는 연습이자 연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예술은 모방이다’고 말한 이유는 흉내가 곧 탄탄한 기본기로 다져질 수 있기 때문이다.

 

 

라싸 지빵곤빠에 있는 미륵불

 

 

요즘 전 세계적으로 화제를 모으고 있는 방탄소년단. 그들이 마침내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2018 빌보드 뮤직 어워드에서 미국 인기가수 저스틴 비버를 제치고 2년 연속 탑소셜아티스트상을 수상했다고 한다. 세계적인 뮤지션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어디에 있을까? 다름 아닌 연습, 그리고 또 연습이었다. 연습은 애초 흉내 내기에서 시작된다. 발성과 안무는 처음부터 독창적인 게 아니었다. 남들의 것을 그대로 따라 하길 수천 수만 번. 처절하리만큼 혹독한 이런 반복적인 연습을 통해 그들만의 음악세계를 구축한 것이다.

 

이렇듯 흉내 내기는 기본기를 다지는 과정이자 완성을 위한 첫걸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불교는 1천7백년이 훨씬 넘는 역사를 자랑하면서도 ‘아류亞流’라는 비판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즉설즉답卽說卽答으로 변방의 3류 인생이거나 ‘짝퉁’에 불과하다는 지적이다. 정통 선불교禪佛敎를 내세우고 있으나 거의가 중국불교를 모방하는 수준이다. 또 회통불교會通佛敎라고 하나 정체성을 찾아볼 수 없는 ‘짬뽕불교’라는 비난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그 원인은 하나다. 한국불교만의 독보적이고 독창적인 세계를 갖지 못한 때문이다. 흉내를 벗어나 스스로의 세계를 갖춰야 하는데 여전히 원숭이처럼 흉내 내기에서 만족하고 있는 것이다. 총림에서 나오는 법어는 여전히 옛 중국선사들의 법문 흉내 내기와 다를 바 없고, 저마다 내세울 특색이 없는 게 현실이다. 다시 말해 자기만의 산풍山風이 없다. 스님들은 활구活句보다 사구死句에 익숙하고 대학교수들도 이해하기 어려운 난해한 법어를 아무렇지 않게 설파하고 있다. 교화와 포교에 정말로 부합하지 않은 무익한 법어들 일색이다.

 

아류 아닌 본류로 살아가야


반면 이런 풍토 속에서도 과거 성철 스님이 ‘살아있는 부처’로 추앙받은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성철 스님은 그만의 독특한 지도력으로 한국불교의 격을 높였다고 평가된다. 그가 이따금씩 속세에 전해오는 법어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한 예를 들어보면 1986년 부처님오신날 법어는 압권이다. “교도소에서 살아가는 거룩한 부처님들, 오늘은 당신네의 생일이니 축하합니다. 술집에서 웃음 파는 엄숙한 부처님들, 오늘은 당신네의 생일이니 축하합니다. … 넓고 넓은 들판에서 흙을 파는 부처님들, 우렁찬 공장에서 땀 흘리는 부처님들, 자욱한 먼지 속을 오고 가는 부처님들, 고요한 교실에서 공부하는 부처님들, 오늘은 당신네의 생신이니 축하합니다.”  

 

농익어 있는 선지禪旨와 속인들의 아픔과 애환을 달래는 활구로 부처님 오신 참뜻을 살린 이 표현들은 지금도 누가 감히 흉내낼 수 없는 명법문으로 회자되고 있다.

 

성철 스님이 입적하신지 올해로 25년이 지난 한국불교는 현재 위기상황에 직면해 있다. 300만 불자 수 격감이란 통계는 그냥 온 게 아니다. 당송시대 중국선사들의 법문을 21세기 오늘날에도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 작금의 상황이 그저 가슴 아플 뿐이다. 흉내 내기에 불과한 죽은 법문을 하고 있는데 누가 귀 기울이고 관심이나 가져주겠는가?

 

차차석 교수(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가 편저한 『중국의 불교문화』에 따르면 중국의 수많은 위경僞經 가운데 『상법결의경』이 있다. 불교계의 개혁을 주장한 경전이다. 북위 말기부터 북주의 폐불(574〜579)에 이르는 6세기 중엽에 저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경전은 상법시기 불교계에 나타나는 승속의 타락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무분별한 조탑造塔・조상造像・사경寫經 등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면서 이타적 대승불교의 실천을 강조한다. 아울러 사회개혁의 완성도 이룰 것을 촉구하고 있다.

 

또 다른 경전으로 『범망경』은 남북조시대 임금의 비법非法과 승려들의 비행을 바로 잡으려고 만든 것으로 10중계와 48경계를 주장했다. 따라서 계율을 취급하는 경전으로 분류됐다. 어쨌든 이들 경전들은 잘못 가고 있는 중국불교를 바로 잡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것이 중국불교의 독창성을 확보하고 중국불교의 성격으로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중국불교의 위경은 정법불교에 배치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하지만 중국불교의 활로를 찾기 위한 자구책으로 독자성을 구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한국불교는 무엇보다 정체성을 확보해야 한다. 아류가 아닌 본류로 살기 위해선 흉내 내기에서 시급히 벗어나야 한다. 그래야 원효 성사나 성철 대선사와 같은 기라성들이 줄줄이 배출될 수 있다. 그러려면 손가락 정도가 아니라 온몸을 파괴하는 아픔을 감내해서라도 한국불교를 새로이 열어가야 할 것이다.

주)
(주1) “俱胝和尙, 凡有詰問, 唯擧一指. 後有童子, 因外人問: ‘和尙說何法要?’ 童子亦竪指頭. 胝聞遂以刀斷其指. 童子負痛號哭而去, 胝復召之. 童子廻首, 胝却竪起指, 童子忽然領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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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군도
선시 읽는 법을 소개한 『마음의 밭에 달빛을 채우다』를 펴내 적지 않은 반향을 일으켰다. 「오도송에 나타난 네 가지 특징」·「호국불교의 반성적 고찰」 등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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