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과 손가락 사이]
“삶은 바다와 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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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목 / 2018 년 8 월 [통권 제64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4,336회 / 댓글0건본문
법정 스님이 쓴 한 구절이 눈에 띈다. “산중에 홀로 살면 사람은 청각이 아주 예민해진다.… 산중 은거자의 귀는 자신을 에워싸는 세계를 먼저 귀 받아들인다.”(주1) 그렇다. 대지의 움직임은 소리로 가득하다. 소리는 세계의 존재들이 알리는 소식 즉 그 움직임, 속도, 이동, 위치이다. 그것은 귀가 알아차린다.
원형과 사각형, 그 기하학적 형식
산중의 암자 또는 언덕 위의 초가삼간은, 가만히 들여다보면, ‘산-집’이라는 삼각(→사각), ‘언덕-지붕’이라는 반원(→원)의 결합체다. 삼각-사각은 땅으로, 반원-원은 하늘로 연결된다. 하늘은 질서-로고스의 표상이다. 사람에게 둥근 머리=영혼에 해당한다. 사람 속의 하늘의 상징이다. 삶의 고음高音-높음-이상이다. 몸=신체는 사각형으로, 사람 속의 땅을 상징한다. 삶의 저음低音-낮음-현실現實이다. 하늘=원형[圓]=이상은 ‘머무름 없이 변화 ・ 순환하는 시간’을, 땅=사각형[方]=현실은 ‘안정된 일상의 현실 공간’을 은유한다. 현실의 삶은 늘 이상을 향한다. 지상의 꽃과 언덕도 바라보지만, 부단히 머리를 들어 저 하늘의 해와 달과 별을 쳐다보듯, 지상은 늘 천상으로, 사각형은 끝내 원형으로 수렴돼 간다.
헌데, 원형이란 무엇일까. 한 마디로 ‘나 자신’이다. 중국 성리학의 에피스테메(=무의식적인 인식의 틀)를 이루는 저 렴계濂溪 주돈이(周敦頤. 1017∼1073)의 「태극도太極圖」에서, 태극太極이 둥근 원이 결국 갈래갈래 갈라진 만물들의 그것(둥근 원)이듯이,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 1899-1986)가 “달 혹은 달이란 말은 많으면서 하나인, 우리의 존재”라고 읊었듯이, 사람들이 찾아 나선 둥근 달이란 놀랍게도 나 자신의 ‘쌩얼’(화장하지 않은 얼굴) 아닌가. 수많은 호수나 시내에 비친, ‘많으면서’ 그러나 결국은 ‘하나인’ 달. 이처럼 갈래갈래 얽히고설킨 삶 속에서, 조각조각 너덜너덜 흩뿌려진 수많은 나. 그러나 끝내 닿고 보면 하나로 존재하는 나. ‘걸어도 걸어도 그 자리, 가도 가도 떠난 자리’ [行行到處, 至至發處] 아닌가.
어쨌든 원형과 사각형이라는 두 기하학적 형식의 결합은 우주생명의 기본이자 ‘나=자아’의 기본 형식을 이룬다. ‘나’는 흘러가는 저 무정한 시간에 제한받고, 발 딛는 공간에 제약받는다. 쇼펜하우어가 “나는 (…) 결코 공간의 바깥에 탈출할 수가 없고, 어디까지나 이 공간과 함께 간다. 그것은, 공간은 나의 지성에 부속하고, 두개골 속에 표상기계로서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대로, 인간은 ‘공간’과 함께한다. 한국인은 대한민국의 영토에서, 일본은 일본의 영토에서 자신의 몸을 정의하고 해석하고 제한하고 구속한다. 여하튼 시・공간은 인간을 제약하는 무의식적인 ‘형식’이다. 그래서 우리가, 알든 모르든, 시공간은 우리 스스로를 조정하는 불안하고 불편한 조건들이다.
이 가운데 시간의 제한, 압박은 가장 우리를 불안케 한다. 그 최종적 불안은 죽음이다. 그래서 인간은 시간의 불안 불편으로부터 벗어나려 몸부림친다. 다음 글을 잠시 보자.
“LIFE IS LIKE THE SEA. … ETERNAL. YET THE LIFETIME OF EVERY WAVE IS BUT AN INSTANT. ALL I ASK IS… LET ME LIVE MY FULLEST BEFORE I CRASH TO THE SHORE”(삶은 바다와 같은 것. … 영원한 것. 그러나 파도의 삶이란 한 순간일 뿐. 나의 바람이란 내 삶을 마지막까지 온전히 사는 것. 해안에 부딪혀 부서지기 전까지). - 미국 일리노이주 서든 일리노이 대학 내의 호숫가 비석에 새겨진, 22세로 요절한 대학생 Gary D. Morava(1952∼1974)가 학창시절에 쓴 시이다. 파도로서의 삶, 해안에 가서 부서지기 전에 최대한으로 출렁거려 보고 싶은 삶의 힘. 이처럼 삶은 주어진 시간 내에 남김없이 태워야 할 불꽃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왠지 죽음에 대한 콤플렉스, 유한한 삶을 구박하고 닦달하는 느낌이 물씬 풍긴다. 시간에 대한 저항, 혹은 일탈. 아니면 의도적 망각 혹은 삭제를 원하는 인간의 얄팍한 마음들. 시간의 불안은 버리고, 공간은 덜 불안하니 그대로 두고. 뭐 이런 식이면, 둘 사이의 교란-어긋남-삐걱거림은 당연하다. 이것은 현재 우리 삶의 분열을 의미한다. 예컨대 현대예술에서는 원-원형과 사각-사각형의 형태 사이에 분열이 현저하다. 아닐라 야페는 말하듯이, “거의 관련이 없거나 대체로 엉성한 배치 속에서만 등장한다. 원과 사각형의 분리는 20세기 사람들의 마음상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현대인의 영혼은 뿌리를 잃고 분열의 위험에 직면한 것이다.”(주2) 나는 이에 동의한다.
지상의 모든 둥근 형태들은 결국 태양의 원圓에 귀속된다. 무덤, 구릉, 언덕, 산봉우리도 그런 연관과 계보 속에 살아 움직이며 의미를 갖는다. 조은은 『무덤을 맴도는 이유』(문학과 지성사, 1996)에서 말한다. “알 수가 없다/ 내가 자꾸 무덤 곁에 오게 되는 이유/무덤 가까이에 몸을 둬야/겹겹의 모래 구릉 같은 하늘을 이고/나를 살게 하는 것들이/무덤처럼 형체를 갖는 이유”(『무덤을 맴도는 이유』, p.80)라고. 무덤⇄모래구릉⇄하늘처럼, 순환의 고리를 갖고 있다. 산이나 언덕의 둥그스름한 곳이 더욱 더 낮아지면 모두 무덤으로 간다. 봉분으로 남았다가 그것마저도 평지로 변한다.
불일암 후박나무 아래 법정 스님 계신 곳
그 밑은 무엇인가. “백골白骨이 진토塵土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白骨爲塵土魂魄有也無]”(포은 정몽주의 단심가丹心歌)의 경지, 혼돈(카오스)의 지하로 내려선다. 높은 산정-로고스에서 낮고 깊은 암굴暗窟-카오스로 향하는 것이다. 그곳은 융이 말하는 대로, ‘아래쪽-어두운 곳-심층-최하층-나(자아)를 잃어버림-물질성-화학물질-탄소-세계 자체’(주3)이다. 그곳은 모든 것을 환영하고 수용한다. 모든 것을 ‘손님으로 받아들이는-맞이하는’ 땅은 성스럽다. 성토聖土다! 겹겹의 아우라를 가진 눈부신 저 땅의 침묵과 부름을 우리는 아는가. 누가 진짜 주인인가. 몸인가. 땅인가.
산은 높은 봉우리(산정), 어중간의 언덕이나 평지, 낮은 골짜기를 함께 가졌다. 깊은 산 속에 산다는 것은 두 발의 한쪽은 ‘우뚝 솟아오름-삶’에다 다른 한쪽은 ‘깊이 잠김-죽음’에다 몸을 둔 것이다. 형체-질서와 비형체-카오스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것이다. 죽으면 서 있던 직립의 몸통들은 모두 산 속의 땅에 묻힌다. 그래서 산 속의 생활은 생과 사, 그 양면을 동시에 살아가는 묘한 방식이다. 법정 스님은 이 대목을 짚어둔다: “이제는 다시 산의 살림살이에 안주할 때가 되었다. 옛 선사의 법문에, 때로는 높이높이 우뚝 서고/때로는 깊이깊이 바다 밑에 잠기라[有時高高峰頂立, 有時深深海底行], 이런 가르침이 있는데, 안거 기간은 깊이깊이 잠기는 그런 때다. 그 잠김에서 속이 여물어야 다시 우뚝 솟아오를 수 있는 저력이 생긴다.”(주4)
로고스는 ‘높이높이’, 카오스는 ‘깊이깊이'
로고스는 ‘높이높이’를, 카오스는 ‘깊이깊이’를 지향한다. 살아서는 산의 정상, 정수리처럼 우뚝 솟아 높아지고자 한다. 고고함의 표상이다. 그랬던 것들이 차츰 낮아져서 평지, 그것은 다시 그 이하의 어두운 곳으로 숨어든다. 암굴이라는 고요하고 깊은 은폐와 말소의 경지를 향한다. 그윽하고도 또 그윽하다는 『노자』 (왕필론) 제1장의 ‘현지우현玄之又玄’처럼, 카오스는 보 다 더, 점점 더 깊은 곳(=심층)을 향해가서 결국 ‘세계 그 자체’가 된다. 종교의 명상과 수행은 보통 이쪽으로 향한다.
그런데, 심층 세계를 담당하는 대지는 카오스 쪽에서 로고스를 분해 · 해체하기도 하지만 카오스를 다시 로고스 쪽으로 이끌어 재생 ・ 생성하는 힘을 갖고 있다. 법정 스님은 말한다. “대지의 맨살에 닿는 것은 좋은 일이다.” “대지는 단순한 흙이 아니다. 흙, 식물, 그리고 동물이라는 순환을 통해 흘러가는(움직이는) 에너지의 원천이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땅과 접촉 하고 흙에 뿌리박은 삶이 필요하다. 인간의 삶은 자양분을 공급하는 흙으로부터 차단되면 살 수 없는 나무와 같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흙을 가꾸는 기회를 가져야 한다.”(주5) 대지의 맨살=살갗은 늘 우리를 부른다. 흙은 죄를 지은 자이든, 탕자들이든 귀환하는 것들은 누구나 부드럽고 자비로운 손가락으로 어루만져서, 죄다 받아준다. 흙의 세례로 인간은 세계의 에너지에 합일한다. 그렇다. 대지의 흙 없이는 생명은 누임-쉼-평온이라는 완결성을 얻지 못한다. 마무리는 흙이 한다. 안아주고 쓰다듬어주는 힘, 그것이 결국 우리를 깊은 곳으로 안내하고 감춘다. 땅의 감춤이라는 권능 즉 지장地藏의 힘이다. 계절에 춘하추동이 있듯, 땅에도 생生→장長→수收→장藏의 내공이 있다. 이 가운데도 주인공은 ‘장’이다. 생로병사生老病死, 성주괴공成住壞空, 생주이멸生住異滅에서 ‘사-공-멸’이 주인공이듯 말이다.
죽음도 미리 배워 두어야
흙은 시간을 견디는 모든 공간적인 것들의 기본형식이다. 아니 시간의 경과를 느리고 거칠게 보여주는, 이른바 시간의 발자국이거나 상처 혹은 고통이다. 마치 바람이 자신의 움직임을 알아줄 ‘종’[=풍경風磬]이 없이는 자신의 존재 위치나 상태를 알리지 못하듯이. 아니, 바꿔 말하면, 종 또한 ‘바람’ 없이는 자신의 아름다운 목소리나 자태를 드러내지 못하듯이. 무명풍도 이 육신 없이는 일어날 곳이 없다. 아니 이 육신도 무명풍 없이는 휘날릴 수 없다. 대지 위의 산천초목이라는 형체를 가진 ‘공간적’인 표현 없이는 위대한 무시무종의 시간도 그것을 기려주고 챙겨줄 형식이 없다.
산에는 꽃이 피었다 진다, 봄가을 없이. 시간은 그렇게 꽃이 ‘피고 짐’으로 자신의 영원한 모습을 주름잡아 분절分節하여서 보여준다. 나무의 시간도 붉고 푸른 이파리로 보여준다. 그것이 나무의 민낯=맨얼굴=본래면목이다. 이 풍진 세상의 풍광은 그저 증감增減도 없이, 공허 속을 출렁이는, 풍류風流일 뿐. 즐거움도 기쁨도 없이, 아름다움도 추함도 없이, 그저 출렁출렁 흔들릴 뿐이다. 이 풍진 세상 그 끝자락을 부여잡은 무덤 곁으로, 내가 가고 싶은 이유는 ‘아름다운 마무리’ 때문이다. 법정 스님의 말대로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 ‘초심’을 회복하는 일이다.
나는 누구이며, 순간순간 어디로 가는가를 짚어보며, ‘홀로 서는 것’. 그러나가 끝내, ‘다 내려놓아야’ 한다. 법정 스님은 『아름다운 마무리』에서, “죽음도 미리 배워 두어야 한다.”고 하며, 죽음의 의의를 밝힌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때가 되면 그 생을 마감한다. 이것은 그 누구도 어길 수 없는 생명의 질서이며 삶의 신비이다. 만약 삶에 죽음이 없다면 삶은 그 의미를 잃게 될 것이다. 죽음이 삶을 받쳐주기 때문에 그 삶이 빛날 수 있다./ 얼마 전 한 친지로부터 들은 말이다.”(주6)
살아있는 한 손발을 움직여야 한다. 허공 속에서 손발은 움직인다. 그 헛 ‘짓’이 역사이다. 모든 ‘짓’에는 의미가 있고, 역사가 있다. 삶이 아름다운 것은 이 ‘헛짓’, ‘무명의 바람’ 무명풍無明風이기 때문이다. 그 사이에서 손짓, 발짓, 몸짓이 살아난다.
주)
(주1) 법정 스님, 『간다, 봐라』, 리경 엮음, 서울:김영사, 2018, p.18.
(주2) 아닐라 야페, 「시각 예술에 나타난 상징성」 속의 ‘원의 상징’ 부분을 참고하였다. [카를 G 융 외 지음, 『인간과 상징』, 이윤기 옮김, 서울:열린책들, 2011, p.383]
(주3) “정신의 심층은 어두운 곳으로 내려갈수록 개체적 독자성을 잃게 된다. ‘보다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갈수록, 즉 자율적인 기능 체계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집단적인 것으로 변모하다가 마침내는 육체의 물질성인 화학 물질로 보편화하면서 결국 그 특이성을 잃어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육체를 이루고 있는 탄소는 탄소 그 자체에서 더도 덜도 아니다. 그러므로 마음도 그 ‘최하층’으로 내려가면 곧 ‘세계’ 자체이지, 더도 덜도 아닌 것이다.”(아닐라 야페, 「시각 예술에 나타난 상징성」 [카를 G 융 외 지음, 『인간과 상징』, 이윤기 옮김, 서울:열린책들, 2011, p.412에서 재인용]).
(주4) 법정 스님, 「지금이 바로 그때」, 『아름다운 마무리』, 서울:문학의 숲, 2008, pp.114∼115.
(주5) 법정 스님, 『간다, 봐라』, 리경 엮음, 서울:김영사, 2018, p.66. ・
(주6) 법정 스님, 「죽음도 미리 배워두어야 한다」, 『아름다운 마무리』, 서울:문학의 숲, 2008, p.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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