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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禪에 관한 이런 저런 이야기]
“여여 여여로 상사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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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웅연  /  2018 년 8 월 [통권 제64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4,706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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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의 ‘어깃장’

 

집에만 있는 편이다. 출장명령이나 떨어져야 해외를 간다. 직장의 특성 상 불교성지를 위주로 돌아다니게 되고, 불교성지는 거의가 더운 나라에 있다. 유적보다 더위가 먼저 마중을 나온다. 게다가 입국入國할 수 있다는 건 거기가 평시平時라는 것이다. 고만고만한 민족들이 고만고만한 체제 안에서 고만고만한 고민을 안고 살아들 가는 풍경으로만 보인다. 대충 구경하고 대충 물어보며 혼자 그늘만 찾아다닌다. 나는 내 삶이 너무 무겁다고 생각한다. 숙소에 칫솔이 없으면 이도 닦지 않고, 귀찮아서 비행기에 짐도 부치지 않는다. 제법 다니다보니 이국異國에 대한 설렘은 줄어드는데, 기내금연의 불안과 고통은 전혀 변화가 없다. “담배 피우러 왔니?” 같이 간 길손들에게서 꼭 욕을 먹는다. 다행히 오기傲氣는 꽤나 있어서, 먹은 욕에 비례해 기사가 잘 써진다. 생각이 많은 성격은, 어디를 가더라도 어디 가지 않는다. 엇비슷한 일정과 엇비슷한 안전과 엇비슷한 기분의 반복 속에서, 나라 밖 외근은 또 다시 그렇게 마무리된다. 고국에 돌아오면 지면紙面이 기다리고 있고 월급이 기다리고 있다. 앞으로도 이 정도로만 무거웠으면 좋겠다. 평화로운 삶을 원한다면, 일단 지긋지긋하게 지겨운 삶부터 쟁취해야 한다. 청풍명월淸風明月이 내 안에 찌들어 있는 것 같다.

 

 


북한산 승가사 통일호국 대탑. 사진: 박경희 불자 제공

전강영신(田岡永信, 1898~1975)은 경허성우鏡虛惺牛의 법을 이은 만공월면滿空月面의 회상會上에서 공부했다. 어느 날 경허의 오도송悟道頌에 대해 한소리를 했다.
= 아랫사람도, 가끔은 행복하게 살고 싶다.

忽聞人語無鼻空(홀문인어무비공)
문득 ‘콧구멍 없는 소’라는 말에
頓覺三千是我家(돈각삼천시아가)
‘온 우주가 곧 나’라는 사실을 알았도다.
六月燕巖山下路(유월연암산하로)
6월에 연암산을 내려가는데
野人無事太平歌(야인무사태평가)
할 일 없는 사람이 태평가를 부르는구나.

“다 좋은데 마지막 구절이 법루法漏인데요. ‘유월연암산하로’는 그대로 두되 그 다음 글귀를 제 나름대로 붙여보겠습니다.”
= 사장님의 고급 정장에 땟국이 묻었으니 제가 지워보렵니다 .

만공이 말했다. “어찌해보려는가?”
= (부장님 말투로) 자국이 조금이라도 남으면, 넌 작살난다.

전강이 춤을 추면서 답했다. “여여 여여로 상사뒤야.”
= 너무 겁주지 마십시오. 저는 존경하는 사장님을 위해 늘 ‘깨춤’을 춰왔습니다.

만공의 대꾸. “손자가 할아비를 놀리는 것일세, 참으로 손자가 할아비를 놀리는 것일세.”
= 4월15일은 태양절이고 1월8일은 은하절이 될 수 있다.

농부가는 농부 여럿이 일을 할 때 부르는 노래다. 오래된 과거엔 전국 어느 논밭에서나 비슷비슷한 농부가들이 울려 퍼졌다. 소재와 가사는 조금씩 다르더라도 공통적으로 풍년을 기원하는 민요다. 이런저런 농부가를 찾아봤는데, 요堯 순舜 신농神農 하우夏禹 등 농사깨나 안다는 중국 전사前史 시대의 신인神人들을 동원하기도 하고, 각월各月과 절기마다 이행해야할 업무목록을 열거하기도 하고, 새참 내올 때 막걸리 잊지 말라고 당부하기도 한다.

 

 

물론 농사는 입으로 짓는 것이 아니어서, 농부가의 핵심은 내용보다 형식에 있다. 모를 내거나 김을 매는 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일이 잘 끝나고 빨리 끝난다. 기계가 아닌 인간들은 농부가의 균일한 박자에 힘입어 기계에 가까워졌고, 그리하여 나름대로 최대의 효율성과 생산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후렴으로 되풀이되는 ‘여여 여여로 상사뒤야’는 노동집약의 정점에 서서 또 다른 노동집약을 재촉한다. 마치 사내들이 육성으로 구보驅步를 하는 꼴인데, 입에서 나오는 소리지만 그 소리가 가볍지 않다. 처자식의 안위를 지켜야 하는 근육들이 떼 짓고 뭉쳐서 만들어내는 소리다.

20대 후반까지만 해도 평생이 실업자이거나 떠돌이일 줄 알았다. 내가 번 돈으로 내가 먹을 밥을 사서 먹고, 한 여자를 이토록 오래 먹여 살릴 줄은 그때는 꿈에도 몰랐다. 회사는 나를 칭찬할 때에도 괴롭힐 때에도 나에게 꼬박꼬박 돈을 줬다. 가끔 더 주기도 했고 밀려도 주기는 줬다. 그는 노임勞賃으로 자신의 권능을 입증하면서 나약하고 게으르고 욕심 많은 나를 붙들어 세웠다.

 

이제는 출근도 하나의 습관이어서, 일터에 나가지 않으면 마음이 자못 불편하다. 연차를 하루 쓴 날은 괜히 죄지은 거 같다. 조직이 주는 일을 하고 조직이 바라는 일을 하면서 조직이 주는 돈을 타먹는 게 모든 조직원들의 통일된 삶의 양식이다. 빨간 이념이고 파란 이념이고, 똑같이 시장市場이고 밥벌이더라. 나는 여기까지 늙었다.

생사일대사生死一大事를 해결하기 위해 납자들은 선방에서 결연히 화두를 든다. 나는 대처帶妻의 신분이어서 그 시간에 돈 벌 궁리를 하거나 피할 궁리만 한다.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는데, 더 이상 그 ‘어쩜’을 거부할 기력이 없고 의향도 없다. 돌이켜 보면, 별의 별일들을 용케도 통과했고 별 거지같은 것들이 그래도 나를 이만큼 만들어놓았던 것이다. 밟아줘서, 조금 은 고맙다고 해야겠다.

 

인간의 숙명적 굴레인 카르마karma를 ‘일 업業’으로 번역한 건 절묘한 선택이었다. 수없이 작은 일들이 지탱해줘야만 비로소 ‘태어남’과 ‘죽음’이라는 큰일이 형성된다. 생명은 끊임없이 모양을 바꿔가며 세상에 나와서는, 일하고 일벌이고 일을 치르다가 돌아간다. 사람을 만나지 않고 부딪히지 않으면 돈이 생기지 않았다. 그래서 옆에 있으면 불편한 사람이나 나를 욕하는 사람도 그저 ‘일’이라 여기면서 넘어간다. 그들은 내게 길바닥에 솟은 돌부리이거나 영혼 없는 비바람일 뿐이다. 무엇보다, 내가 잠자코 일을 해야 내가 살고 또한 그가 산다.

 

파이프에서 물이 새든, 오줌보에서 오줌이 새든, 주머니에서 돈이 새든, 밖으로 말이 새든, 기관에서 공금이 새든, ‘샌다’는 건 그리 좋은 어감이 아니다. 오도송에 ‘누수’가 있었다면, 하자가 있다는 뜻일 거다. 일할 필요가 없는 자만이 할 일 없이 태평가를 부를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이 일하지 않기 위해 남에게 일을 떠넘기거나 세상에 일을 내온 것이 불한당不汗黨들의 세계사다. 나는 땀 흘리지 않고 피 흘린 적 없는 깨달음은 신뢰하지 않는다.
“사람이 재산”이라는 말은, 비문非文이다. “사람이 먼저”라는 자들은 대부분 사람을 털어먹으려던 자들이었다. 나는 나를 열심히 살아감으로써 남에게 폐가 되지 않으려 한다. 오직 내가 참은 만큼만 미래가 됐다. 하루치의 살아냄이 쌓이고 쌓여서, 일생이 견딜 만한 것으로 순화되고 재기再起는 꽃핀다.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이며, 번뇌를 보리로 역전시키는 힘들은 각 오 열정 인내… 해묵었지만 유효한 가치들의 누적에서만 발생한다. 여울에 걸려 허우적거리는 송사리에게, 넥타이를 매어주고 싶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바람 앞의 잡놈.

마음씨 좋은
주모酒母가 되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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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웅연
집필노동자. 연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시절 조사선(祖師禪)에 관한 수업을 몇 개 들으며 불교와 인연을 맺었다. 2002년부터 불교계에서 일하고 있다. ‘불교신문 장영섭 기자’가 그다. 본명과 필명으로 『길 위의 절(2009년 문화체육관광부 우수교양도서)』,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선문답』, 『불행하라 오로지 달마처럼』, 『눈부시지만, 가짜』, 『공부하지 마라-선사들의 공부법』, 『떠나면 그만인데』, 『그냥, 살라』 등의 책을 냈다. 최근작은 『불교에 관한 사소하지만 결정적인 물음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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