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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탁소리]
임제록 출간을 준비하며 2. 남의 잘못된 주장에 속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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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택스님  /  2017 년 8 월 [통권 제52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4,969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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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流(도류)야, 秖如自古先德(지여자고선덕)은 皆有出人底路(개유출인저로)니라. 如山僧指示人處(여산승지시인처)는 秖要爾不受人惑(지요이불수인혹)이라. 要用便用(요용변용)하야 更莫遲疑(갱막지의)하라.
如今學者不得(여금학자부득)은 病在甚處(병재심처)오. 病在不自信處(병재부자신처)라. 爾若自信不及(이약자신불급)하면 即便忙忙地(즉변망망지)하고 徇一切境轉(순일체경전)하여 被他萬境回換(피타만경회환)하고 不得自由(부득자유)요, 爾若能歇得念念馳求心(이약능헐득염념치구심)하면 便與祖佛不別(변여조불불별)이니라.

도를 배우는 수행자들[道流]이여! 옛날부터 훌륭한 큰스님들에게는 모두 사람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길이 있었다. 예컨대 산승이 그대들에게 가르쳐 보이는 것은 다만 그대들이 ‘남의 잘못된 주장에 속지 말라’는 것이다. 자신의 지혜의 바른 안목을 사용하고 싶으면 곧바로 사용하고 결코 머뭇거리거나 의심하지 말라.

 

요즈음 공부하는 그대들이 깊은 깨달음의 견처를 얻지 못하는 그 병통이 어느 곳에 있는가? 그 병은 스스로를 철저하게 믿지 못하는 데 있다. 그대들이 만약 자기 스스로를 철저하게 믿지 못하면 곧 허둥지둥 분방하게 온갖 역순경계에 휩쓸려 끌려다니게 되어 만 가지 경계에 얽매어져서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 그대가 만약 한 생각 한 생각마다 밖으로 치달려 구하는 마음을 쉴 수만 있다면 조사인 부처와 다름이 없다.

 

<성철스님의 강설>

 

자고(自古)로 선덕, 즉 큰스님들은 나고 죽음의 길을 완전히 해탈한 대자유인이었습니다. ‘선덕(先德)’은 구경각을 성취한 사람, 참으로 철두철미하게 견성해서 성불한 사람을 말하니, 먼저 공부한 선배라는 가벼운 말이 전혀 아닙니다.

 

‘산승(山僧)’은 이 『임제록』 전체 속에서 임제스님 자신을 말합니다. 임제스님이 사람들을 지도해 주는 것은 “다만 다른 사람에게 속지 말 것을 요구한다. 바른 안목으로 무엇이든 쓸 때는 그대로 쓰고 조금도 머뭇거리거나 주저하지 말고 의심하지 말고 자유자재하게 법을 쓰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제일 골자(骨子)가 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속지 않는다.”는 이것이 제일 어려운 것인데, 보통 다른 사람한테 속지 않는다는 말만이 아니고, 부처한테도 속지 않고 조사한테도 속지 않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부처에게도 속지 않고 조사에게도 속지 않을 만큼 그런 큰 안목을 갖추어야 합니다.

 

이전 큰스님들도 최후에 인가할 때 “오불기여야(吾不欺汝也)라, 오늘부터 내가 너를 속이지 못 한다.”고 말을 많이 합니다. 깨치기 전까지는 수행자들에게 이렇게도 속이고 저렇게도 속이는데, 그렇지만 악의로 속이는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 하든지 제자들이 하루 바삐 얼른 바른 눈을 뜨도록 방편으로 이리도 속이고 저리도 속이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수행자가 법을 성취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한테 속지 않아야 하는 것”인데, 이 다른 사람이란 중생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부처와 조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공부를 성취했다는 것은 부처에게도 속지 않고 조사에게도 속지 않아서, 공부를 지시(指示)하고 인가(認可)하는 큰스님이 마침내 “금일시지오불기여야(今日始知吾不欺汝也)라, 오늘부터는 비로소 내가 너를 속이지 못함을 알겠구나.” 하는 이 말을 바로 들어야합니다. “속이지 못 한다.”는 이 말의 뜻은 공부를 성취해 봐야 아는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도 닦는 사람들이 진정 견해를 얻지 못하는 것은 병이 어느 곳에 있는가 하니, 정지정견(正知正見)을 얻지 못하고 밤낮 남한테 속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처한테도 속아 살고 조사한테도 속아 살고 자꾸 속아가며 사는데, 그 병이 어느 곳에 있느냐면 자기 스스로를 믿지 않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자신을 믿는다면 무엇을 믿는다는 말인가? 이 믿는다는 것은 신해(信解)의 믿음이 아니라 구경(究竟)의 믿음, 증신(證信)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심명(信心銘)』의 믿음이 구경을 성취한 믿음[證信]이듯이 결국 구경각을 성취한 믿음입니다.

 

그대들이 만약 실제로 자기 마음이 부처임을 증신(證信), 구경의 믿음을 깨달아 갖지 못한다면, 정신없이 분주하게 일체의 경계에 휘둘리며, 동풍이 불면 동쪽으로 서풍이 불면 서쪽으로, 바람 부는 대로 물결 치는 대로 자기 중심은 하나도 없이 흔들리며 칠전팔도(七顚八倒), 일곱 번 넘어지고 여덟 번 엎어지게 될 것이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일체 경계에 이리저리 끄달리고 수만 가지 경계에 얽매여서 자유는 하나도 없게 됩니다.

 

‘치구(馳求)’는 보통 세상에서 재물을 구하고 명예와 지위를 구하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에서는 부처가 되고 싶고 조사가 되고 싶다는 것을 말합니다. 밖으로 치달려 구하는 마음, 네가 만약 생각 생각에 부처가 되고 싶고 조사가 되고 싶은 마음을 내려놓는다면 조사인 부처와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치구심을 버린다는 것은 부처도 구할 필요가 없고 조사도 구할 필요가 없는 그런 대자유인을 말하고, 부처도 조사도 구하지 않는 출격대장부를 말하는 것입니다. 부처를 구하고 조사를 구하는 그런 생각이 있고 불도를 닦아야 하고 공부를 더 해야 할 처지에 있는 사람이면 부처와 조사와 같을 수 없습니다. 부처도 필요 없고 조사도 필요 없어야, 조사인 부처와 다름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불조(佛祖)’라 하지 않고 ‘조불(祖佛)’이라 했는데 조사가 부처와 똑같은 지위에 있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임제스님이 처음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실제 종문에서 말하는 조사(祖師)는 완전히 구경각을 성취해 견성성불한, 모든 면에서 부처님과 똑같이 원만구족한 사람을 조사라 하지, 그렇지 못한 사람은 조사라 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서 임제스님이 조불(祖佛), 조사인 부처님이라 이렇게 강조해 표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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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택스님
본지 발행인
1967년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1971년 백련암에서 성철스님과 첫 만남을 갖고, 1972년 출가했다. 조계종 총무원 총무부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조계종 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 도서출판 장경각 대표, 부산 고심정사 주지로 있다. 1998년 문화관광부 장관 표창, 1999년 제10회 대한민국 환경문화상 환경조형부문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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