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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감… 남을 돕는 일이 나를 돕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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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웅연  /  2017 년 9 월 [통권 제53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4,911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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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감 결핍으로 많은 사람들이 고생하는 시대다. 좀처럼 자신감이 없으니까 자신을 사랑하지도 못하고 신뢰하지도 못하는 것이다. 자아존중감, 줄여서 자존감이란 ‘주체성과 관계성의 원만한 조화’라고 정리할 수 있다. 스스로가 가진 재능을 한껏 발산하는 동시에, 그 재능을 타인을 위해 기꺼이 보시하면서 얻어지는 만족감이다.

 

주체성의 계발을 통한 관계성의 확장. ‘나는 이 세상에 살아도 될 만한 존재’라는 확신이라 불러도 좋다. 반면 자존감이 없다는 건 ‘존재감’이 없다는 것이다. ‘나는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에 지레 움츠러들거나 겁먹어서 남들에게 잘 다가가지 못한다. 특히 ‘있으나마나한 존재’가 심지어 ‘없어져야 할 존재’보다 더 절망적인 법이다. 후자는 관계성이 굳이 필요가 없을 정도로 주체성이 막강해서, 매우 이기적이고 뻔뻔하다.

 

너무 순수하고 착해도 탈이다. 태생이 더럽고 치사한 사바세계에 좀처럼 적응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우울증 환자들은 십중팔구 자의식이 강한 성격이다. 좋은 쪽으로 발현되면 엄청난 생산성과 창의성으로 나타나지만, 나쁜 쪽으로 발현되면 대인관계의 불화와 자기부정에 빠진다. ‘이렇게 훌륭한 나를 왜 인정해주지 않나’ 하는 억울함과 ‘왜 저러고들 사나’ 하는 멸시감이 축적되면서 점점 세상과 멀어진다. 문제는 이런 ‘나’는 혼자이고 저런 ‘남’은 부지기수라는 것이다. 압도적인 쪽수 차이로 인해 절대 이길 수가 없다. 그리고 증오의 불길은 오로지 나만 불태운다.

 

곧 이승이 냉혹할수록 내가 자비로워야만 한다. 가끔은 나를 내려놓을 줄 알아야 나의 숨통이 트이고, 남을 위해 기도할 줄도 알아야 내가 행복해진다.

“관대한 태도는 남을 위한 것 같지만 결국 나를 위한 덕목이다. 재주가 많으면 더 고생하는 법이다. 일을 잘 하는 사람이 일을 더 많이 하는 게 이치다. 더 많이 가진 자가 더 많이 베푼다는 마음으로 살아라. 그래야 속 편하다.”

심리상담사 1급 자격증을 지닌 어느 비구니 스님은 이렇게 독자들을, 그리고 인터뷰를 하는 나를 토닥였다. 남을 돕는 일이 나를 돕는 것임을 알 때 진정한 자존감이 샘솟는 법이다. 그래야, 또는 그나마.

 


 

 

제94칙 

동산의 편치 않음(洞山不安, 동산불안)

 

동산양개(洞山良介)가 병이 들었다는 소식에 어떤 스님이 문병을 갔다.
“화상께서 병이 나셨는데, 병들지 않은 이도 있습니까?”
“있느니라.”
다시 물었다.
“그럼 병들지 않은 이가 병간호를 해드립디까?”
“노승이 그를 보살펴야 할 책임이 있느니라.”
“화상이 그를 보살필 때는 어떻습니까?”
“그에게 병이 있는 것을 보지 않는다.”

1년에 두세 번씩은 감기에 걸린다. 용케 면하는 해도 있지만 거의 이렇다. 찌뿌둥한 기분이 싫어서 환절기가 되면 나름 철저히 대비한다. 손도 자주 씻고 과로도 웬만하면 피하는데 그래도 어김없이 걸린다. 특히 코가 막히면 글을 쓸 수가 없어서 괴롭다. 몸이 마음을 지배한다는 걸 실감하는 시간이다.

 

다행히 한 이틀 앓고 나면 글머리가 돌아온다. 이전처럼 열심히 일한다. 먹어야 하고 자야 하고 벌어야 하고…. 끊임없이 나를 못 살게 구는 몸뚱이이지만, 나는 그를 원망하지 않고 또 그를 위해 산다. 이러구러 산다. 우리는 모두가 적어도 자기 자신에게만은 보살이다.

 

부처님도 아팠고 큰스님들도 아프다. 그러면 건장한 젊은이들이 당신들의 병수발을 든다. 하지만 이들도 결국엔 늙는다. 잘난 몸이든 못난 몸이든…. 끝내 감옥이고 적폐다. 육체는 시간과 놀아나게 마련이고 언젠가는 육체를 잃을 존재들은 누구나 독수공방 과부가 될 운명이다. 혼자 남은 여자가 아들을 낳아 열심히 키우듯, 인간은 밥 먹고 잠자고 똥 싸는 것 이상의 인간을 남겨야 한다. 몸을 극복한 마음은 깨달음이 된다. 그리고 나의 깨달음은 장차 다른 이들의 몸속에서 부활할 것이다.

 

제95칙
임제의 한 획(臨濟一劃, 임제일획)

 

임제의현(臨濟義玄)이 원주에게 물었다.
“어디서 오는가?”
“마을에 가서 황미(黃米)를 사가지고 왔습니다.”
임제가 다시 물었다.
“살 것은 다 샀느냐?”
“다 샀습니다.”
임제가 돌연 주장자로 땅에 줄을 그었다.
“이것도 샀느냐?”
원주가 갑자기 “할!” 하고 소리를 질렀다. 임제는 주장자로 그의 머리통을 때렸다. 이 소동을 듣고 이번엔 전좌(典座)가 와서 임제에게 말했다.
“원주는 화상의 뜻을 모릅니다.”
임제가 전좌에게 물었다.
“그러면 그대는 뜻을 알았는가?”
전좌가 문득 임제에게 절을 했다. 임제는 그도 때렸다.

안거(安居) 철이 되면 커다란 대중방 벽에 큼지막한 용상방(龍象榜)이 붙는다. 3개월 동안 해야 할 각자의 임무를 적어놓은 명부다. 철저한 분업이 이채롭다. 전좌(典座)는 별좌(別座)라고도 한다. 대중이 참선하면서 앉는 좌복을 비롯해 침구와 식재료를 관리한다. 원주(院主)는 절 살림 전체를 총괄하는 소임이다.

 

‘주지(住持)’라는 단어는 중국 당나라 백장회해(百丈懷海, 749-814) 선사가 처음 사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땅에 오래 머무르며 불법(佛法)을 수호한다는 ‘구주호지(久住護持)’의 준말이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는 명언을 남긴 백장이다. 그는 철저하게 주체적이고 이성적인 불교를 지향했다. 법당에 불상을 따로 두지 않는 것도 백장이 만든 선가(禪家)의 전통이다. 도(道)에 밝은 주지와 그의 법문이 부처님을 대체한 것이다.

 

종교적 상징이 아닌 살아있는 인간이 곧 부처였다는 사실에서, 공부의 됨됨이를 점검하는 법거량(法擧量)이 활성화되었었음을 알 수 있다. 원주는 절일이 바빠서 도통 마음공부를 할 겨를이 없는 소임이다. 부처를 돈 주고 사올 줄은 알아도 부처를 제 힘으로 얻을 줄은 모른다. 스승이 유행어처럼 밥 먹듯이 던지던 ‘할’을 흉내낼 따름이다. 전좌는 맞기가 싫어서 굴복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이것도 답이 아니었다. 사실 ‘도’라는 게 ‘알고 모름’의 문제가 아니다. 인생을 안다고 해서 인생이 술술 잘 풀리던가? 다만 맞으면서 자기도 모르게 조금씩 커갈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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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웅연
집필노동자. 연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시절 조사선(祖師禪)에 관한 수업을 몇 개 들으며 불교와 인연을 맺었다. 2002년부터 불교계에서 일하고 있다. ‘불교신문 장영섭 기자’가 그다. 본명과 필명으로 『길 위의 절(2009년 문화체육관광부 우수교양도서)』,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선문답』, 『불행하라 오로지 달마처럼』, 『눈부시지만, 가짜』, 『공부하지 마라-선사들의 공부법』, 『떠나면 그만인데』, 『그냥, 살라』 등의 책을 냈다. 최근작은 『불교에 관한 사소하지만 결정적인 물음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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