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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법문 해설]
고구마 줄기처럼 연결된 존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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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  2018 년 5 월 [통권 제61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4,509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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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라는 연극과 주인공


셰익스피어는 인생을 한 편의 연극에 비유했다. 인생이 연극이라면 나 자신은 그 연극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별 볼일 없고 주목받지 못하는 존재라고 생각하며 인정욕망에 허덕인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은 각자 자신만의 고유한 라이프 스토리를 가지고 있고, 각자 자기 삶의 주인공으로 살아가고 있다.

 


 

 

주인공(主人公)이라는 이 말은 소설이나 연극에서 스토리를 끌고 나가는 주연을 말한다. 그런데 이 말은 그런 문화적 장르가 등장하기 이전부터 사용되어 왔다. 특히 선사들은 인간의 노예근성을 깨뜨리고, 내면의 불성(佛性)을 깨닫게 하고자 자주 썼던 말이다. 모든 중생들이 객체나 조연이 아니라 각자 자기 삶의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선사들은 밖을 향해 구원자를 찾아 헤매지 말고 내면으로 돌아와 주인공을 맞이하고, 주인공으로 당당히 살아갈 것을 강조한다. 인생은 스스로 주인공이 되어 멋지게 연기를 펼쳐야 하는 무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생이라는 연극은 자기 혼자 출연하는 1인극이 아니다. 주인공이 주인공으로서 위상을 가지려면 수많은 조연들이 등장해야 한다. 그들도 저마다의 캐릭터를 갖고 있어야 하며, 그런 캐릭터에 따라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충실해야 주인공의 캐릭터가 살아난다. 배역을 맡은 조연이 악역을 잘 소화해야 주인공의 선량함이 돋보이는 식이다. 따라서 주인공은 주인공 밖에 있는 무수한 조연과 조건들에 의해 비로소 주인공으로 탄생하는 것이다.

 

주연과 조연의 이런 관계는 비단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연극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양지 녘에서 피어나는 붉은 진달래는 잿빛 산색에 생기를 불어넣는 봄 산의 주인공이 틀림없다. 하지만 진달래가 봄 산의 주인공이 되기까지 수많은 조연들의 숨은 연기와 무대 뒤의 분주함이 있었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저마다 자신들에게 주어진 역할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수행해 냈기에 진달래는 봄 산의 주인공으로 만인의 주목받을 수 있다.

 

이를테면 지구는 태양 주변을 돌며 계절의 변화를 만들고, 구름은 허공에 떠도는 습기를 모아 빗방울을 만들고, 바람은 비구름을 산비탈로 데려와 대지를 적시게 하고, 태양은 따사로운 온기를 불어넣어 새싹이 돋아나게 하고, 토양은 지난 가을에 떨어진 낙엽을 버무려 자양분을 공급하고, 무수한 박테리아와 미생물들도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 했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수많은 조연들이 열연을 펼친 결과로 진달래는 봄 산을 붉게 장식하는 주인공이 되었다.

 

이렇게 보면 인간의 삶은 물론 모든 존재들은 주연과 무수한 조연이 함께 어우러져 만들어가는 한 편의 연극이 분명하다. 이 연극이 성공하려면 주인공은 물론이고 무수한 조연들도 제 역할을 잘 수행해야 하고, 무대장치와 같은 조건들도 잘 맞아야 한다. 조명은 조명대로, 음향은 음향대로, 분장은 분장 대로 각각의 소품들도 모두 제 자리에서 조화를 이루어야 비로소 한 편의 멋진 연극이 완성된다.

 

모든 존재는 이처럼 주연과 무수한 조연들의 조화 속에서 각자의 삶을 펼치고 있음을 밝히는 것이 십현연기의 마지막 문에 해당하는 ‘주반원명구덕문(主伴圓明俱德門)’이다. 이 말의 뜻은 주인공과 조연이 자신의 특성뿐 아니라 상대방의 특성까지 동시에 갖추고 있다는 뜻이다. 주인공은 주인공이고 조연은 조연이 아니라 주인공 속에 조연이 있고, 조연 속에 주인공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이치에 대해 법장은 “일체 만법이 모두 그러하므로 하나를 들면[隨擧其一] 바로 주를 삼아 연대하여 연기하니[連帶緣起], 곧 주와 반이 있게 된다[便有主伴].”고 했다.

 

표면적으로 보면 모든 연극은 주인공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주연은 스토리를 끌고 가는 근간이며, 조연들은 주연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저마다의 역할이 주어져 있을 뿐이다. 그러나 화엄의 눈으로 보면 주인공과 조연은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 주인공에게 조연의 캐릭터가 온전히 숨어있고, 조연에게도 주인공의 캐릭터가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 ‘주반구덕(主伴俱德)’의 이치다.

 

고구마 줄기처럼 연결된 존재


존재의 연극무대에서 보면 주연과 조연은 각자 다른 위상으로 분리되어 있는 동시에 또 상호 전환되는 일체성을 갖고있다. 물론 1차적인 것은 개별적 특성이라는 존재의 차별성이다. 성철 스님은 주(主: 주인공)와 반(伴: 조연)이 갖는 이런 차별성에 대해 “주주반반 각불상견(主主伴伴 各不相見)”이라고 했다. 주인공과 조연은 각각의 개별적 캐릭터를 지니고 있으며, 주인공 속에서는 조연을 볼 수 없고, 조연 속에서는 주인공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 현상일 뿐이고 그 이면을 보면 주인공과 조연은 상호 전환되는 통합성을 동시에 갖고 있다. 성철 스님은 이를 ‘주주반반 원명구덕(主主伴伴 圓明具德)’이라고 설명했다. 주인공과 조연이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에게 조연의 캐릭터가 내포되어 있고, 조연에게 주인공의 캐릭터가 함축되어 있다는 것이다. 주인공 속에 조연이 있고, 조연 속에 주인공이 있기 때문에 이를 ‘원명구덕(圓明具德)’이라고 설명했다.

 

주와 반의 이와 같은 특성은 주인공과 조연이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불이(不二)를 말하는 것이며, 주인공과 조연의 상호관계성을 말하는 것이다. 나아가 고정불변의 주인공도 없고, 확정된 조연도 없음으로 주연과 조연이라는 실체성이 해체된다. 여기서 개체적 존재의 무아(無我)가 드러난다. 주인공과 조연이라는 정체성이 해체되면 주와 반을 가르는 경계가 소멸되어 주와 반이라는 차별을 초극하는 중도(中道)가 실현된다.

 

이런 관계는 사실 주와 반의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주(主)를 알려면 주를 지탱하고 있는 반(半)을 알아야 한다. 반을 알려면 그 반을 지탱하고 있는 또 다른 반을 알아야 한다. 이렇게 주와 반의 관계성을 확장해 들어가면 반은 반이라는 역할을 부여받은 또 다른 주인공임을 알게 된다. 그렇게 주인공은 조연인 반에 의해서 존재하고, 조연인 반은 또 다른 조연인 반에 의해서 주인공으로 존재한다. 존재의 무대 위에서 모든 존재들은 이렇게 서로에게 기대어 주인공이 되고, 서로를 떠받치면서 조연으로 존재한다.


이상과 같은 존재의 중층적 상호관계성에 대해 법장은 “하나를 들면[隨擧其一] 주를 삼아 연대하여 연기한다[連帶緣起]”고 했다. 주와 반의 관계에서 보듯이 모든 존재는 연기적 관계의 산물이다. 각각의 사물들은 주인공처럼 개별적이고, 고유한 존재로 드러나 있다. 하지만 그 모든 존재들은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 무수한 조연들과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눈앞에 드러나 있는 주인공 하나를 들어 올리면 수많은 조연들이 줄줄이 달려온다. 마치 고구마를 수확할 때 고구마 줄기를 잡아 올리면 줄줄이 고구마가 달려 나오는 것과 같은 이치다.

 

법장은 이런 관계성을 ‘하나의 줄기를 잡아 당기면 연대하여 일어난다[連帶緣起]’고 표현했다. 모든 존재는 서로 연대해 있고, 그와 같은 상호 관계 속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겉보기에는 각각 독립적 실체로 있는 것 같지만 하나를 들어 올리면 관계의 사슬은 전체와 잇닿아 있다. 존재의 이와 같은 관계성을 십현문에서는 ‘인드라망경계문’이라고 했다. 온 우주를 감싸고 있는 인드라의 그물같이 하나로 엮여 있기 때문이다.

 

화엄십현문은 단계적으로 하나씩 들어가는 문이거나 열 개의 문이 각각 독립적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 아니다. 어떤 문으로 들어가도 존재의 실상이라는 지평으로 연결된다. 이 문을 통해 들어가도 존재의 실상이라는 세계가 나오고, 저 문을 통해 들어가도 존재의 실상이라는 세계가 펼쳐진다. 그럼에도 굳이 열 개의 문을 세워 놓은 것은 중생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산꼭대기로 올라갈 수 있도록 하려면 가파른 직선 코스는 물론 완만하게 돌아가는 길도 있어야 한다. 동쪽에서 올라가는 길도 있어야 하고, 서쪽에서 올라가는 길도 있어야 한다. 따라서 정상에서 보면 하나의 문[一門]은 열 개의 문으로 확산되고, 아래에서 보면 열 개의 문은 정상이라는 하나로 수렵된다. 하나가 곧 일체이고 일체가 곧 하나이니, 서로 상즉상입해서 걸림 없이 자유로운 사사무애연기로 확장되는 것이 십현문이다.

 

주반원명구덕문을 통해 얻는 가르침은 존재의 실상에 대한 것만이 아니다. 우리들에게 주는 또 다른 가르침은 주인공으로 당당히 살아가라는 것이다. 나는 무수한 조연들의 도움으로 지금 이 순간 주인공으로 살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그런 자부심이 타자에 대한 오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주인공으로 살고 있지만 내가 주인공으로 살 수 있도록 해주는 무수한 조연들 역시 또 다른 주인공임을 알아야 한다. 그런 이치를 깨닫고 실천할 때 우리는 매 순간 주반원명구덕문으로 들어가고, 너와 내가 어깨동무를 하고 함께 걸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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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성균관대 초빙교수.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선의 생태철학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연구교수, 조계종 불학연구소 선임연구원, 불교신문 논설위원, 불광연구원 책임연구원, <불교평론> 편집위원 등을 거쳐 현재 성철사상연구원 연학실장으로 있다. 저서로 『선의 생태철학』 등이 있으며 포교 사이트 www.buruna.org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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