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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탁소리]
『명추회요(冥樞會要)』를 출간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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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택스님  /  2015 년 6 월 [통권 제26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4,549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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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초에 『명추회요(冥樞會要)』의 번역이 완성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감개무량함 속에서 한참 멍한 기분이었습니다. 자그마치 23년의 세월이 걸린 일이기에 무겁게 짊어진 짐을 내려놓을 수 있다는 그 홀가분함에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습니다. 

 

23년 전 1993년 7월초 즈음에 <선림고경총서> 완간을 앞두고 큰스님께 말씀 올렸습니다.

“<선림고경총서> 37권과 큰스님 법어집 11권 출간을 이달이면 다 마치게 되었습니다. 이번 출판을 1집이라 하면 2집으로 어떤 어록들을 준비해야겠습니까?” 

 


성철 스님을 시봉하던 젊은 시절부터 끊임없이 공부하고 연구하는 원택 스님 

 

제 나름으로는 이번 출판으로 선어록 발간사업이 끝난 것이 아니라 아직도 마음속으로는 큰스님께서 미진한 마음이 남아 계시리라는 짐작으로 여쭈어 보았던 것인데 “이번 책을 내면서도 이렇게 분주를 떨었는데 더 하기는 뭘 더해, 고만해라!”고 하시길래 다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시면, 다른 것은 몰라도 큰스님께서는 『선문정로』 1장 ‘견성즉불(見性卽佛)’에서 영명연수 선사의 『종경록』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임제정맥인 중봉 선사가 ‘고금을 통하여 천하의 사표는 영명 선사를 두고 누구이겠는가?’ 하고 찬탄하셨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인천보감』의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종경록』 100권은 종문의 지침으로 용수 이래의 최대 저술로 찬양받고 있다. 임제 정전인 황룡혜남 선사의 상수제자인 회당조심 선사께서 연세가 많으심에도 내가 이 책을 늦게 보게 된 것을 한(恨)한다며 항상 『종경록』을 애중하게 여기셔서 수중에서 놓지 않고 중요한 것을 요약하여 3권으로 된 『명추회요』를 만들어 세상에 널리 유전케 하였다’고 법문하고 계십니다. 『종경록』 100권은 너무 방대하니 후학들을 위해 『명추회요』를 번역했으면 합니다. 나중에는 『오등회원』도 번역해 보겠습니다.”

 

“영명연수 선사는 법안종 3세로 추앙받는 스님이신데 『명추회요』라도 번역해서 세상에 내놓으면 『종경록』 전체는 아니지만 『종경록』이 어떤 책인지 짐작은 하게 되겠제. 『명추회요』의 번역이 선수행과 교학 발전에도 도움이 되겠제! 그러나 그거 어려운 책이라 번역이 제대로 되겠나? 그리고 『오등회원』은 남송대의 사대부 서가에 반드시 꽂혀 있던 선어록이지만 우리 시대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지.”

 

“하지 말라.”고 하실 줄 알았는데 딱 부러지는 거절이 아니시고 번역 잘못될까를 걱정하시는 셈이니 저는 큰스님께서 허락하셨다고 생각하고 앞으로 2집을 준비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1993년 10월 초순에 한국 불교학자들과 야나기다세이잔(柳田聖山)을 비롯한 일본 선학자 몇 분을 초청해 해인사에서 ‘선종사에서 돈오사상(頓悟思想)의 위상과 의의’를 주제로 국제불교학술대회를 성대하게 개최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큰스님께서는 편찮으셔서 참석하지 못하셔서 얼마나 아쉬웠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날로부터 한 달이 못되어 11월 4일 아침에 큰스님께서는 열반에 드셨습니다. 해인사 연화대에서 인산인해로 밀려드는 조문물결 속에서 무사히 다비식을 치르고 100여 과의 사리를 수습하여 ‘성철 스님 사리 친견법회’를 개최하였는데 새벽부터 밀려드는 인파와 다가온 겨울날씨를 염려하여 20여 일간만 친견법회를 열고서는 이듬해 봄에 다시 사리친견법회를 열기로 하고 마무리하였습니다.

 


성철 스님 법어집과 선림고경총서 중 일부 

 

49재를 마치고 황망함 중에도 ‘무엇부터 해야 할까?’를 생각해보니 『명추회요』와 『오등회원』의 번역을 큰스님께 약속드린 일이 제일 먼저 떠올라서 먼저 『명추회요』의 번역에 착수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여기저기 수소문해 보니 『명추회요』의 원본을 한국에서는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마침 일본 동경의 고마자와대학교에 유학을 가 있던 사제 원충 스님에게 연락이 닿아서 『명추회요』 원본을 구해 복사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몇 달 후 『명추회요』(상·중·하) 복사본을 받아보게 되었는데 『종경록』 100권 중 10분의 1쯤 되는 양이라 하였습니다. 

 

<선림고경총서> 번역에 도움을 주었던 분들 가운데서 이창섭 옹에게 다시 번역을 부탁드리게 되었고, 3년여가 지난 1997년 5월쯤 초고 원고를 받았습니다. 불교대승경전인 천태·유식·화엄과 선어록이 중심이 되는 책이니 다시 윤문을 부탁하게 되었는데, 다들 어렵다고만 하고 조금씩 윤문하다가 되돌려 보내오니 세월만 흐르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세월 속에서 몇 분에게 도움을 받아 이만하면 되겠거니 하고 다른 분에게 보이면 “더 고칠 것이 많다.”는 대답만 돌아왔습니다. 이 대목이 한문 어록 번역의 어려움이니 “자기가 아닌 남이 한 번역은 틀렸다.”고 대답이 돌아옵니다. 

 

몇 년 전 중국 종교문화출판사에서 『영명연수 선사 전서 상·중·하』를 출판하였는데, 그동안 번역하는 데 어려움이 컸던 ‘인용문과 인용문 속의 인용문장에 대한 인용부호와 표점’이 잘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참 다행이다 싶어 대진 스님과 선암 스님에게 그동안 준비한 『명추회요』 원고와 이 책을 드리면서 마지막 윤문을 부탁하여 지금 이렇게 출판 소감을 쓰게 되었습니다. 

 

앞에 인용한 『인천보감』에 실린 적음(寂音) 선사를 찾아보니 혜홍각범 선사로서 그의 저서인 『석문문자선(石門文字禪)』에 실린 <제종경록(題宗鏡錄)>의 인용이어서 그 전문을 실어봅니다.

 

종경록 100권은 지각(智覺) 선사가 찬술한 것이다.

일찍이 이 책을 깊이 읽어보니, 방등부 경전을 넘나들며 망라한 것이 60종이었고, 중국과 다른 나라의 성현의 논(論)을 참작하여 꿰뚫은 것이 300가지였다. 천태종과 현수(賢首) 대사의 화엄종을 이해하고 유식종을 깊이 논하였으며, 세 종파의 다른 이치를 대략 분석하여 하나의 근원으로 귀결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여기서 의심을 종횡으로 일으킨 것은 심원한 이치를 탐색하고자 함이었고, 깊이 감추어진 도리를 쪼개어 밝힌 것은 치우치고 삿된 견해를 쓸어 내기 위한 것이었다. 그 문장은 영롱하게 빛나고 종횡무진하였으니, 중생들에게 자기 마음으로 성불하는 종취(宗趣)를 일깨워주고, 달마가 서쪽에서 온 전할 수 없는 적적대의를 분명히 일러주려는 것이었다.

 

전씨(錢氏, 전류(錢鏐))가 오월국을 지배할 때, 선사는 항주(杭州)의 영명사(永明寺)에 머물면서 그 도를 오월(吳越)지역에까지 크게 떨쳤다. 이 책이 처음 나왔을 때 멀리까지 전해져서 다른 나라의 군주들이 보고서는 모두 스님의 가풍을 우러르며 문하의 제자로 일컬었다. 학자들 중에는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가서 법을 받아 간 자가 이루 셀 수 없이 많았다.

 

선사가 입적한 후에 강학(講學)하는 무리들에게 이 책이 막혀 총림에서는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희령(熙寧, 1068~1077) 연간에 원조(圓照) 선사가 비로소 이 책을 출간하여 널리 대중에게 말하였다.

“옛날에 보살께서는 스승 없이 터득하는 지혜[無師智]와 저절로 터득하는 지혜[自然智]를 숨기고 오로지 보통지혜만을 써서 모든 종파의 강사들로 하여금 서로 질문공세를 펴도록 하고는 자신은 심종(心宗)의 저울대를 가지고 그 이치를 고르게 달아 지극히 정묘한 이치를 절충시켰으니, 가히 마음의 거울로 삼을 만하다.”

 

이로부터 납자들이 다투어 그 책을 전하여 읽게 되었다.

원우(元祐, 1086~1093) 연간에 보각(寶覺) 선사가 용산(龍山)에서 좌선하며 보냈는데, 비록 덕이 높고 연세도 많았지만 여전히 손에서 이 책을 놓지 않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이 책을 늦게서야 보게 된 것이 한스럽다. 평생 보지 못했던 글과 또 노력으로는 미칠 수 없는 이치가 그 속에 모두 갖추어져 있다.”

그리고는 요점만을 골라 세 권의 책으로 만들어 『명추회요』라 이름하고서 세상에 널리 전하였다. 이 두 분의 노스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후세에 총림에서는 숭상할 것이 없었을 터이다.

 

오래된 학자들은 날로 게을러져서 입을 다문 채 말이 없고, 늦게 들어온 자들은 날로 숨을 헐떡이며 공연히 근거 없는 말만 뱉을 뿐이니, 어찌 이 책을 알 것이며, 그 뜻을 논하고 음미할 수 있겠는가. 설사 그 책을 아는 이가 있다 하더라도 크게 마음에 두지 않고 그저 조사의 교외별전이거나 불립문자의 법이라고 여기는데 불과할 것이니, 어찌 다시 문자의 속뜻까지를 파헤칠 수 있겠는가.

 

그런 이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지 못한다. 달마 이전에 마명과 용수도 조사(祖師)였으나 논을 쓸 때에는 백가지 경전의 이치를 아울렀고, 광범위하게 볼 때에는 용궁의 책까지도 빌려다 보았다. 달마 이후에 나온 회양・마조・백장・황벽 선사도 조사였지만 모두 삼장(三藏)을 치밀하게 연구하고 모든 종파를 널리 공부하였다는 것이다.

 

지금 그들의 어록이 남아 있어서 가져다 볼 수 있으니, 어찌 달마의 말뿐이겠는가.

성인이 살았던 세상과 멀어질수록 중생들의 근기가 하열하여 생각이 치우치고 짧으며, 도를 배우는 일이 구차하고 간단해진다. 그들이 하는 일이라곤 그저 편안히 앉아서 도를 이루고자 하니, 마치 농부가 밭 갈고 김매는 일을 게을리 하면서 침을 흘리며 밥을 쳐다보는 것과 같다. 참으로 웃을 일이다.

내가 듣건대, 양자강이 민산(岷山)에서 발원됨에 그 근원이 잔을 띄울 수 있는데 불과하지만, 동쪽의 초나라에 이르러서는 만물에 모두 미치게 되니, 근본의 이익을 얻는 자가 많지 않겠는가. 도에 뜻을 둔 자는 항상 여기에서 얻는 것이 있을 것이다.

 

수행자들이 세상일에는 관심 없고 구름과 산을 벗하며 안락하게 여기며, 밝은 창가 깨끗한 책상에서 향연(香煙)을 사르며 이 책을 깊이 탐독해야 한다. 그리하면 전할 수 없는 오묘한 이치를 알아서 문자 속에 참으로 교외별전의 뜻 아님이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모두들 회당조심 선사처럼 이 책을 손에서 놓지 않고 늘 읽으면서 혜홍 스님의 간절한 부탁처럼 문자 속에서 교외별전의 깊은 뜻을 깨치시기를 기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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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택스님
본지 발행인
1967년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1971년 백련암에서 성철스님과 첫 만남을 갖고, 1972년 출가했다. 조계종 총무원 총무부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조계종 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 도서출판 장경각 대표, 부산 고심정사 주지로 있다. 1998년 문화관광부 장관 표창, 1999년 제10회 대한민국 환경문화상 환경조형부문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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