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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어록의 뒷골목]
쓰레기에게 인사를 하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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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웅연  /  2017 년 5 월 [통권 제49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4,794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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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는 처세(處世)에 대해서도 가르쳤는데 사행(四行)이라 한다. △현실의 갖은 불행을 지난날의 업보로 여겨 달갑게 받아들이는 보원행(報怨行) △그때그때의 인연과 조건에 순응하는 수연행(隨緣行) △아무 것도 기대하거나 아무 것에도 기대지 않는 무소구행(無所求行) △보원행과 수연행과 무소구행을 견지함으로써 청정한 본성을 훼손하지 않는 칭법행(稱法行)을 합쳤다. 그야말로 진리라 칭해도 거짓되거나 민망하지 않은 삶이다. 그것은 인내와 달관이 만든다.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이 동요하지 않는다면 부처란다. 움직이지 않고 휘둘리지 않는 마음이 무심이다.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마음을 ‘마음대로’ 다룰 줄 안다면.

 


 

 

부처님을 믿게 하려고 동쪽으로 왔다면 달마는 그냥 포교사다.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에 대한 선사들의 뚱딴지같은 답변도 마찬가지다. 그대가 부처인데 어디서 부처를 찾느냐는 타박이다. 삶은 어떤 식으로든 흘러가고, 생명은 어떤 식으로든 살아낸다. 한심한 인생과 고귀한 인생이 따로 없다. 누구나 죽음 앞의 촛불이고 윤회 앞의 벌레들이다. 삶과 하나가 되어 걷거나 견딜 뿐, 삶을 따로 떼어내어 손가락질하거나 닦달하지 않는 것이다. 존재하는 그대로가 진실이고 완성! 달마는 지금 이 순간에도 막 오고 있다. 바람이 분다.

 

제84칙 구지의 한 손가락(俱胝一指, 구지일지)

 

구지 화상은 도를 물어오는 이를 만나면 다만 손가락 하나를 세웠다.


구지(俱胝) 선사와 관련해 엽기적인 일화가 전해 내려온다. 그는 누가 도(道)를 물을 때마다 말없이 검지를 치켜세웠다. 그래서 이름이 구지다. 동자승 하나가 스님을 흉내 내고 다녔다. 어린 생불(生佛)이 났다는 소문에 온 동네가 떠들썩해졌다. 선사가 조용히 동자승을 불렀다. “어떤 것이 불법(佛法)인고?” 동자승은 우쭐대면서 늘 하던 대로 손가락을 올렸다. 순간 스님은 품에 숨겼던 칼을 꺼내 아이의 손가락을 순식간에 잘라버렸다.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는 동자승을 스님이 불러세웠다. “어떤 것이 불법인고?” 본능적으로 손가락을 세웠지만 손가락은 보이지 않았다. 아이는 크게 깨쳤다.

 

요즘 같으면 심각한 아동학대다. 당장에 철창 신세였을 것이다. 대문짝만한 뉴스에 깔려 죽었을 수도 있다. 폭행치상 현행범으로 체포된다 해도 구지 선사의 입장에선 할 말이 없다. 그러나 “크게 깨쳤다”는 기록이 사실임을 전제하면, 동자승에겐 이보다 더한 은혜도 없을 것이다. ‘애당초 아무 것도 없음(本來無一物)’을 알아버렸는데, 손가락 하나 잃은 게 무에 대수일까. 아이의 일생은 앞으로 창창할 것이다. ‘여하튼 태어났으니 그저 살아갈 뿐’이라는 엄청난 성공가도.

 

제85칙 국사의 탑 모양(國師塔樣, 국사탑양)

 

숙종(肅宗) 황제가 임종에 든 남양혜충(南陽慧忠) 국사에게 물었다.

“스님께서 열반에 드시면 무엇을 해드리리까?”
남양이 말했다.
“나를 위해 무봉탑(無縫塔)을 세워주시오.”
황제가 말했다.
“그렇다면 그 탑의 본을 보여주십시오.”
이에 국사가 잠자코 있다가 말했다.
“아시겠습니까?”
“모르겠습니다.”
국사가 말했다.
“나의 법을 부촉한 탐원이라는 제자가 있는데, 그 일을 알 것이니 그에게 물으소서.”
국사가 열반에 든 뒤 황제가 탐원응진(眈源應眞)을 불러 물었다.
“스승의 뜻이 무엇이오?”라고 물으니
“소상(蕭湘)의 남쪽과 담수(潭水)의 북쪽 복판에 황금이 있는데 한 나라에 꽉 찼네. 그림자 없는 나무 밑에서 한 배에 탔고, 유리 대궐 위에 아는 이 없어라.”

‘3층 석탑’ ‘5층 석탑’ 하듯이 일반적인 탑에는 층급(層級)이 있게 마련이다. 무봉탑은 탑의 몸체가 달걀 모양인 탑이다. 동글동글하고 반질반질하다. 꿰맨 흔적이 없기에, 무언가가 머물다가 간 자취가 없기에 ‘무봉’이라 한다. 주로 선승(禪僧)의 묘지에 쓰인다. 무봉탑의 양식은 이때만 해도 보편적이지 않았다. 그래서 무봉탑이 어떻게 생긴 것인지 황제는 자꾸 물었다. 제자인 탐원응진이 스승의 속내를 대신 전해주었다. ‘소상’과 ‘담수’는 강물이다. 남쪽의 강물과 북쪽의 강물이 유유히 흐르듯이 불교의 진리는 어디에나 임하고 있다는 탐원의 ‘대리설법’이 무봉탑의 모델이 되었을 것이다.

 

천하 전체가 무봉탑이다. 제아무리 떠들썩하게 왔다손 결국엔 조용히 돌아간다. 제아무리 거대하고 웅장한 비석이라손 비석의 주인공을 이 세상에 되돌려놓지 못한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시체를 남긴다. 이름을 남긴다고? 장례 치르느라 남은 사람들만 고생한다. 과거의 선사들은 유언이 대동소이하다. 빈소를 차리지 말 것, 다음날 낮에 곧바로 화장할 것, 절대 울지 말 것. 쓰레기 앞에서 인사하거나 쓰레기를 치우는 데 머뭇거리거나 쓰레기를 치우면서 우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제86칙 임제의 큰 깨달음(臨濟大悟, 임제대오)

 

임제의현(臨濟義玄)이 황벽희운(黃檗希運)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불법의 대의입니까?”
황벽이 때렸다. 이렇게 세 번을 반복하고는 임제는 황벽을 떠나 고안대우(高安大愚)에게로 갔다. 대우가 물었다.
“어디서 왔는가?”
“황벽에게서 왔습니다.”
“황벽이 무슨 말을 하던가?”
“제가 불법의 대의를 세 차례나 물었는데 대답은 없고 방망이만 세 번 맞았습니다. 제가 무얼 잘못했는지 아직도 모르겠어요.”
이에 대우는 크게 꾸짖었다.
“황벽이 자네를 위하여 그토록 노파심에 세심하게 가르쳐주었는데 아직도 이해를 못 하겠느냐!”
임제가 그 말끝에 크게 깨달았다.

남에게 맞으면 몸이 아프고 이어 마음이 아프다. 분하고 억울하고 원망스럽고 창피하다. 그래도 통증이 잦아들면 마음도 가라앉는다. 물론 통증은 이미 자취를 감췄는데 여전히 마음을 붙잡고 길길이 날뛰는 사람들은 적지 않다. 수행이란 생각하지 않는 연습이다. 야무지게 꿀밤을 맞으면 머릿속에 별이 뜬다. 수치심과 적개심 없이 그 별의 아름다움만을 즐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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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웅연
집필노동자. 연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시절 조사선(祖師禪)에 관한 수업을 몇 개 들으며 불교와 인연을 맺었다. 2002년부터 불교계에서 일하고 있다. ‘불교신문 장영섭 기자’가 그다. 본명과 필명으로 『길 위의 절(2009년 문화체육관광부 우수교양도서)』,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선문답』, 『불행하라 오로지 달마처럼』, 『눈부시지만, 가짜』, 『공부하지 마라-선사들의 공부법』, 『떠나면 그만인데』, 『그냥, 살라』 등의 책을 냈다. 최근작은 『불교에 관한 사소하지만 결정적인 물음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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