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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법문 해설]
현수법장과 화엄사상의 집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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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  2017 년 1 월 [통권 제45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4,433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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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학 탄생의 계보

 

지난 호까지 천태종 사상에 대한 주요 내용들을 살펴보았다. 이번 호부터는 천태종과 함께 중국불교에서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는 화엄종 사상을 살펴볼 차례다. 『백일법문』에서도 선종 다음으로 비중 있게 다루는 내용이 바로 화엄종 사상이다. 아마도 동아시아 불교에서 화엄을 빼놓고는 불교를 말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불교의 전래 초창기에는 중국적 개념으로 불교를 이해하는 시대였다. 소위 격의불교(格義佛敎)가 그것이다. 진나라 말에서 동진시대로 이어지는 불교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를테면 반야의 ‘공(空)’을 노장의 ‘무(無)’로 이해했던 것이 대표적 사례로 꼽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불교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도안(道安) 등에 의해 비판을 받게 된다. 특히 5세기로 접어들면서 구마라집에 의해 용수(龍樹)의 사상이 본격적으로 소개되면서 과도기적 불교 이해는 사라지게 되었다.

 

격의불교는 방대한 경전과 논소가 번역되고, 그것을 연구하면서 등장한 학파불교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구라마집이 번역한 『중론』, 『십이문론』, 『백론』에 대한 연구는 수나라 때 와서 삼론종(三論宗)의 성립으로 이어졌다. 뒤이어 당대(唐代)에 이르면 현장이 대규모 경전을 번역하는데 이를 신역(新譯)이라고 한다. 현장의 번역에서 두드러진 특징은 『해심밀경』을 비롯해 유식계통의 경전이 많이 포함되었다는 점이다. 이후 유식사상을 연구하는 법상종(法相宗)이 성립되면서 유식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졌고, 현장의 제자 규기(窺基)에 의해 종파로 발전한다.

 

그런데 삼론종과 법상종은 인도대승불교의 사상을 중국에 이식하는 과정에서 성립된 학파불교라는 성격을 띤다. 이들 두 학파의 주된 연구 영역은 인도대승불교의 양대 학파로 불리는 중관학파와 유가행파의 문헌을 번역하고, 이에 대한 연구와 해석에 초점이 모아졌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천태와 화엄은 중국적 학파불교의 탄생을 의미한다. 방대한 경론을 연구하고 분석하면서 ‘교판(敎判)’이라는 독자적인 교학체계가 등장하게 된다. 이로써 초기불교에서 대승불교에 이르는 방대한 불교사상을 일목요연하게 이해할 수 있는 교학지도가 완성된 것이다.

 

교판은 불교의 모든 이론과 사상을 종합하는 특징을 띠고 있다. 그 중에서도 중국 교판의 양대 산맥을 꼽으라면 단연코 천태와 화엄을 들 수 있다. 천태사상이 천태지의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면 이와 쌍벽을 이루는 화엄사상은 현수법장을 중심으로 한다. 흔히 화엄학은 광대한 불법의 바다로 비유하곤 한다. 따라서 불교의 모든 사상과 가르침은 화엄으로 수렴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당대까지 모든 불교사상을 종합하여 화엄학이라는 광대한 교학체계를 완성한 인물이 바로 현수법장(賢首法藏)이다.

 

물론 화엄에 대한 연구가 현수법장에게서 처음 시도된 것은 아니다. 화엄에 대한 최초의 연구는 멀리 동진시대로까지 올라간다. 『60권 화엄경』은 진나라 때 번역되어 진경이라고 불리는데, 이 때 법업(法業)은 필수를 맡아 역경에 참여했다. 그가 역경을 마치고 남긴 『화엄지귀』 2권은 중국 화엄학의 맹아로 평가받고 있다. 나아가 북위시대에도 영변(靈辨)의 『화엄경론』을 비롯하여 여러 명의 연구자들이 배출되었고, 남북조시대로 접어들어서도 화엄사상은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되어 갔다. 하지만 화엄사상이 종합적인 사상으로 체계를 잡게 된 것은 수・당대에 와서라고 할 수 있다.

 

화엄종의 계보를 살펴보면 초조 두순(杜順, 557~640)으로부터 시작하여 제2조 지엄(智儼, 602~668)을 거쳐 제3조 법장(法藏, 643~712) 대에 와서 집대성된다. 화엄종의 2조 지엄은 불과 14세의 나이로 출가하여 오랫동안 화엄을 공부하고, 『화엄경수현기』, 『화엄공목장』, 『화엄오십요문답』 등의 저술을 남겼다. 지엄의 저술에는 연기사상을 우주적 관계성으로 확장한 법계연기사상을 비롯하여 화엄학의 기초가 되는 내용들을 담고 있었다. 법장은 지엄이 이룩한 이와 같은 사상적 내용을 발판으로 삼아 중국 화엄종의 사상을 집대성하게 된다.

 

그러나 지엄은 단지 이와 같은 저술만을 남긴 것은 아니다. 그가 남긴 또 다른 보물은 자신의 사상적 내용을 담지하고 있는 제자들이다. 그 중에 신라 출신의 의상과 강거국 출신의 법장이 단연 으뜸이다. 지엄의 화엄학은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변방에서 온 사람들이 사상적 골수를 전해 받음으로써 화엄학의 깊이와 지역적 확산에 기여하게 된다. 법장은 중국 화엄종의 3조가 되어 화엄사상을 완성하는 대성자가 되었고, 의상은 신라로 돌아와서 해동 화엄종의 개조가 되어 화엄십찰을 건립하는 등 화엄종의 번성에 기여했기 때문이다.

 

화엄사상의 집대성자 법장

 

흔히 중국하면 한족들에 의해 이룩된 역사와 문화로 생각한다. 하지만 중국 역사를 살펴보면 정치와 사회일반은 물론 불교계에서도 서역과 이민족 출신의 역할과 기여가 매우 컸다.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으로 들어온 불교는 다른 어떤 분야보다 인도와 서역사람들의 역할이 지대했다. 중국에 처음 불교를 전하고 『42장경』을 번역한 가섭마등을 비롯해 대부분의 역경승들은 서역출신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현수법장

 

현장의 번역에 대비하여 구역(舊譯)으로 불리는 방대한 대승경전들을 번역한 것도 쿠차 출신의 전법승 구마라집이었다. 구마라집이 소개한 대승경전은 중국대승불교의 사상적 토대가 되었다. 선종 성립의 근거가 되는 4권 『능가경』을 번역하여 북종선에서 선종의 초조로 불렸던 구나발타라 삼장이나, 남종선에서 초조로 추앙받는 보리달마 역시 천축국 사람들이다.

 

중국 화엄종의 집대성자인 현수법장 역시 서역출신이다. 법장의 선조는 강거국(康居國)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조부가 당시 국제적 문물의 중심이었던 장안(長安)으로 들어와 정착하면서 출신지를 따라 ‘강(康)’씨 성을 얻게 되었다. 법장의 조국인 강거국은 서역 지방에서 번성했던 국가로 지금의 사마르칸트 지역으로 알려진 곳이다. 안사의 난을 일으켜 당나라의 국운을 기울게 했던 안록산도 강거국 출신의 부친을 두고 있다. 강거국의 문화는 중국에만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다. 이들의 문화는 서쪽으로도 전파되어 멀리 인더스강이나 갠지스강 유역의 문화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진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법장은 불교가 번성했던 중심지에서 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장안에 정착한 법장이 불교에 관심을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로 보인다. 법장은 17세의 나이로 태백산(太白山)에 들어가 여러 해 동안 불교 경론들을 두루 공부했다. 그러던 차에 운화사(雲華寺)에서 화엄종의 2조 지엄 스님이 『화엄경』을 강설하는 것을 듣고 그의 문하로 들어가 제자가 되었다. 지엄의 문하에는 신라 출신의 의상을 비롯해 훌륭한 제자들이 많이 모여 있었지만 법장은 그곳에서도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 서역의 언어에 능통하고, 불교가 번성했던 지역 출신이었기에 상대적으로 경쟁력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지엄의 문하로 들어갔지만 오랫동안 출가하지 않고 유발제자로 남아 있었다. 육조혜능 역시 홍인에게 법을 받고 1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난 뒤에서야 인종법사에게 머리를 깎고 출가한다. 이런 사례는 한국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성철 스님이나 광덕 스님 등도 재가자의 신분으로 사찰에서 공부 한 바 있다. 성철 스님은 재가자의 신분으로 해인사 선방에서 수행했고, 광덕 스님도 범어사에서 10년 동안 ‘고 처사’로 살았다.

 

화엄학을 대성시킨 법장도 그랬다. 법장은 지엄 문하에서 10년 넘게 화엄학을 공부하고,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지만 출가하지는 않았다. 재가자의 신분으로 있었지만 화엄에 대한 탁월한 안목과 식견은 낭중지추(囊中之錐)와 같아서 법장의 명성은 날로 높아졌다. 그런 재능을 아까워했던 스승 지엄은 자신이 입적하면 법장을 출가시키라는 유언을 남긴다.

 

법장의 명성과 특출함을 나타내는 내용 중에는 측천무후와 관련된 대목도 등장한다. 무후는 출가금지령을 내렸지만 오직 법장의 출가만은 허락했다는 것이다. 670년에 무후는 낙양에 태원사(太原寺)라는 사찰을 창건하고, 칙명을 내려 법장을 출가시켜 그곳에서 화엄학을 연구하게 했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법장은 화엄을 공부한지 10년이 지난 28세의 나이로 국가적 지원을 업고 출가하게 된다. 출가는 지극히 개인적 결단이지만 천재에게는 국가적 소명이 더해진 셈이다.

 

법장은 비구계도 받지 않은 사미의 신분으로 법상에 올라 법문을 했다고 한다. 그가 법문을 하면 입에서 찬란한 광명이 쏟아져 나와 하늘 높이 치솟았다고 한다. 입에서 광명이 솟구쳐 올랐다는 것은 그의 장광설(長廣舌)에 대한 은유적 수사로 볼 수 있다. 태양이 대지의 어둠을 밝히는 빛이라면 진리의 말씀은 중생의 마음을 밝히는 찬란한 광명이기 때문이다. 그가 세운 방대한 화엄사상을 생각한다면 그의 법문은 태양에 비유되는 광명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법장이 장광설을 토해내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송이 드높다는 소식은 무후에게도 들어갔다. 무후는 조칙을 내려 천하의 이름난 스님들을 증사(證師)로 삼아 법장에게 구족계를 받게 했다. 그리고 704년 황궁으로 초청하여 장생전에서 화엄법계에 관해 설법하게 했다. 이 때 법장은 화엄사상을 이해시키기 위해 금사자(金師子)의 비유를 들어서 설명했는데, 그 내용은 그의 저서 『금사자장』에 남아 있다.

 

법장은 695년 실차난타가 낙양 불수기사(佛授記寺)에서 화엄경을 번역할 때 필수(筆受)로 참여한 것을 비롯해 실차난타와 함께 『입능가경』을 번역하는 등 역경 분야에도 많은 공을 남겼다. 법장의 저서로는 화엄교학의 체계를 확립한 『화엄오교장』, 화엄경의 주석서인 『화엄경탐현기』가 대표적 저술로 손꼽힌다. 이 밖에도 『대승기신론의기』, 『입능가심현의』, 『화엄지귀』, 『유심법계기』, 『화엄경전기』 등 다수의 주옥같은 논서들을 남겼다. 특히 『대승기신론의기』는 원효, 혜원의 주석과 함께 3대 기신론소로 평가 받고있다.

 

이상과 같은 법장의 업적을 높이 평가한 무후는 ‘현수(賢首)’라는 호를 내렸고, 중종도 ‘국일법사(國一法師)’라는 호를 내렸다. 그로부터 방대한 교학이 집대성 되었으니 당대에 천재들이 많고 많았지만 ‘나라에서 제일가는 법사’라고 불리기에 손색이 없었다. 이처럼 법장은 대소승의 모든 법을 집대성하였기에 ‘법장(法藏)’, 즉 ‘진리의 보배창고’라고 불리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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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성균관대 초빙교수.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선의 생태철학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연구교수, 조계종 불학연구소 선임연구원, 불교신문 논설위원, 불광연구원 책임연구원, <불교평론> 편집위원 등을 거쳐 현재 성철사상연구원 연학실장으로 있다. 저서로 『선의 생태철학』 등이 있으며 포교 사이트 www.buruna.org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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