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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추회요, 그 숲을 걷다]
근본번뇌(根本煩惱)와 수번뇌(隨煩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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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석  /  2017 년 1 월 [통권 제45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4,288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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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교리의 흐름을 가만히 보면 후대로 갈수록 두 가지 서로 다른 모습으로 대별되는 경향이 나타난다. 이를 사성제(四聖諦)의 체계로 설명해보면, 초기불교에서는 고제(苦諦)와 집제(集諦)의 분석에 치중하는 모습이 많이 보이는 반면, 후대로 갈수록 멸제(滅諦)와 도제(道諦)를 강조하는 모습이 많이 보인다는 것이다. 이는 20세기 초에 활동했던 러시아의 불교학자 체르바츠키의 분석인데, 필자 역시 이 분석이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사성제에서 고제와 집제는 현상 세계의 결과와 원인을 보여주는 구조이고, 멸제와 도제는 깨달음의 세계의 결과와 원인을 보여주는 구조이다. 다시 말해 전자가 중생의 고통과 그것을 야기하는 원인인 번뇌를 상세히 분석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그 고통의 구조를 벗어나게 하는 데 중점을 둔다면, 후자는 목표가 되는 깨달음의 세계를 제시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그곳에 빨리 도달하도록 격려하는 데 중점을 둔다. 불교의 교리는 모두 이고득락(離苦得樂=고통을 떠나 즐거움을 얻음)을 목표로 하지만, 중생을 사로잡고 있는 번뇌를 해명하는 데 더 중점을 두는 학파도 있고, 깨달음의 세계를 묘사하는 데 더 중점을 두는 학파도 있다는 것이다.

 

앞의 학파를 보통 법상종(法相宗)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에는 구사학(俱舍學), 유식학(唯識學) 등이 포함된다. 뒤의 학파를 법성종(法性宗)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에는 선종(禪宗)과 화엄종(華嚴宗) 등이 포함된다. 가령 선종에서 견성(見性)하면 단박에 부처의 경지에 들어설 수 있다고 설하는 방식이 바로 법성종(法性宗)의 근본적인 태도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런데, 견성(見性), 돈오(頓悟) 등은 모두 목표를 선명히 드러내는 장점이 있긴 하지만, 중생을 얽어매는 힘인 번뇌(煩惱)에 대해서는 자세히 주목하지 않게 만들거나 혹은 소홀하게 만드는 경향도 있는 것 같다.

 

<명추회요>에는 위에서 말한 불교 교리의 두 가지 경향이 모두 나타나는데, 이는 연수 선사께서 성(性)과 상(相)을 조화롭게 보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명추회요>의 중반부에는 우리의 정신 작용과 관련되어 매우 전문적이고 상세한 논의들이 많이 등장한다. 이번에는 그 가운데서도 중생을 꼼짝 못하게 만드는 힘인 번뇌에 대한 설명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번뇌는 결(結) 혹은 사(使)라고도 불린다. 결(結)이란 번뇌의 힘이 중생을 속박시킨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고, 사(使)란 번뇌의 힘이 우리의 의지와는 다르게 사람을 엉뚱한 방향으로 부린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근본번뇌(根本煩惱)

 

<명추회요>의 461쪽부터 466쪽까지는 열 가지 근본번뇌와 스무 가지 수번뇌를 주제로 설명하고 있다. 근본번뇌와 수번뇌란, 인간을 속박하는 힘에 근본적인 것과 부수적인 것이 있다는 말이다. 우선 근본번뇌는 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견(見)의 여섯 가지를 말하는데, 견(見)을 다시 다섯 가지로 분류하므로, 총 열 가지가 된다. 견의 다섯 종류는 신견(身見)·변견(邊見)·사견(邪見)·견취견(見取見)·계금취견(戒禁取見)이다. 이 근본번뇌에 대해 <명추회요>에서는 간략히 나오므로, 이를 조금 자세히 설명해보자.

 

위의 열 가지 번뇌 가운데 탐·진·치는 우리가 익히 들어오던 삼독(三毒)을 가리킨다. 삼독의 첫째인 ‘탐(貪)’이란, 다섯 가지 욕망과 명성과 재물 등과 같이 자신이 바라는 대상에 대해 만족할 줄 모르고 욕구하는 정신작용이다. 맛있는 음식은 많이 먹으면 물려서 더 이상 먹지 못하지만, 탐욕스러운 마음은 만족함을 모르기 때문에 사람의 마음을 가장 많이 제약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진(瞋)’이란 자기에게 어긋나는 사람에 대해 일으키는 성냄, 분노 등의 정신작용으로, 심신을 들끓게 하여 평안하게 만들지 못하는 번뇌이다. 이 성냄의 번뇌는 불도 수행에 있어서 가장 큰 장애로 간주될 만큼 강력한 힘을 지니지만, 색계와 무색계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에 성냄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마음은 욕계가 아닌 색계에 들어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치(癡)’란 이치와 현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뜻한다. 이 어리석음이 있으므로 중생들은 갖가지 번뇌를 일으키게 된다. 그러므로 근본번뇌 가운데 9가지가 일어날 경우, 반드시 어리석음의 번뇌가 함께 한다고 보면 된다.

 

탐·진·치 다음으로 오는 ‘만(慢)’이란, 자신과 타인을 높고 낮음, 뛰어나고 열등함 등으로 비교하는 정신작용인데, 세부적으로 보면 7가지의 만심(慢心)이 있다. 가령 자신과 비슷한 능력을 지닌 사람에 대해 자신이 그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생각하거나, 자기보다 훨씬 뛰어난 능력을 지닌 사람에 대해 자신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마음 역시 ‘만’의 일종이다. 다음으로 ‘의(疑)’란 인과(因果)의 이치에 미혹하여 주저하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정신 작용이다. 탐·진·치 삼독에 만·의의 둘을 더한 다섯 가지 번뇌는 그 성질이 매우 둔하여 잘 끊어지지 않으므로, 그것을 다스리는 데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근본번뇌 가운데 뒤의 다섯 가지인 신견(身見)·변견(邊見)·사견(邪見)·견취견(見取見)·계금취견(戒禁取見)은 모두 잘못된 견해에 입각한 번뇌이다. 신견이란 내 몸속에 ‘자아(自我)’가 있다고 집착하는 견해이고, 변견이란 내가 죽은 후에도 자아가 영원히 존재할 것이라는 상견(常見)과 죽고 나면 단멸될 것이라는 단견(斷見)의 두 가지 치우친 견해를 뜻한다. 사견이란 인과의 도리를 부정하는 견해이고, 견취견이란 잘못된 견해를 진실로 집착하는 것이고, 계금취견이란 바르지 않은 계율을 통해 열반에 이를 수 있다고 집착하는 견해이다. 이들 다섯 가지 번뇌는 잘못된 이치에 근거하고 있으므로 그 성질이 매우 예리하다. 그리고 이상의 열 가지 번뇌는 인간을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근본적인 힘을 지니고 있으므로, 근본번뇌라고 칭한다.

 

근본번뇌에 수반되는 번뇌인 수번뇌(隨煩惱)

 

사람들을 얽어매는 근본적인 힘들에 수반되는 번뇌들을 수번뇌라고 하는데, <명추회요>에는 이것의 종류를 스무 가지로 들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책에서 수번뇌들을 세 가지로 분류해 놓은 점이다. 이는 대(大)·중(中)·소(小)라는 기준에 의거한 것으로, 우선 소수번뇌(小隨煩惱)는 각자 따로 일어나는 열 가지 번뇌들로서, 가령 한(恨)과 같은 번뇌이다. ‘한’이란 과거의 거슬리는 연에 대하여 원한을 품고 버리지 않는 마음을 말한다. 다음으로 중수번뇌(中隨煩惱)는 무참(無慚)과 무괴(無愧)의 두 가지인데, 이는 나쁜 마음에는 항상 함께 하는 번뇌이다. 마지막으로 대수번뇌(大隨煩惱)는 오염된 마음에 항상 따르는 도거(掉擧) 등의 8가지 번뇌를 말한다. 여기서는 <명추회요> 464쪽에 따라 중수번뇌 두 가지를 좀 더 설명해보고자 한다.

 

열한째, 무참(無慚)은 과거의 잘못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으로 체를 삼고,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장애하는 것으로 업을 삼는다.

 

열두째, 무괴(無愧)는 세상에 많은 잘못을 저지르고도 지난 잘못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으로 체를 삼고, 남들에게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장애하는 것으로 업을 삼는다.

 

필자는 대학원의 석사과정에서 위의 두 가지 번뇌에 대한 설명을 처음 접했는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늘 저 두 가지에 대해서는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한다. 왜냐하면 ‘무참’이란 스스로에게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어져 버린 상태이고, ‘무괴’란 타인에 대해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사라져 버린 상태로서, 사람이 나쁜 짓을 저지를 때를 보면 항상 이 두 가지 마음이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어떤 행위를 할 때, 자신에 대해서든 타인에 대해서든 부끄러움이 조금이라도 든다면, 그것은 아직은 크게 나쁜 상태로 들어선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부끄러움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면, 이미 자신이 하고 있는 행위가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 자신이 바르게 행동하고 있는지 아닌지에 대해 아주 간단하면서도 명료하게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바로 저 두 가지 번뇌가 생기는가, 생기지 않는가에 달려 있으므로, 이 두 가지만 잘 이해해도 매우 유익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나머지 번뇌들에 대해서도 곰곰이 한번 씩 되새겨 본다면, 자신의 마음이 그 방향으로 가지 않도록 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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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석
연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영명연수 『종경록』의 일심사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동국대 불교학술원의 조교수로 재직 중이며, <한국불교전서>를 우리말로 번역하는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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