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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어록의 뒷골목]
조금만 더 한번만 더, 견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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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웅연  /  2016 년 1 월 [통권 제33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4,501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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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中道)는 정견(正見)이다. 바르게 보는 것이다. 만물은 변화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죽어간다는 것이다. 또한 중도는 균형이다. 너무 앞서가려다 엇나가지 않는 것이고, 너무 많이 먹으려다 욕먹지 않는 것이다. 삶의 질서는 웃음과 울음의 적당한 교직 속에서 이뤄지고 꾸려진다. 아팠던 만큼만 지혜로워지고 참았던 만큼만 강해진다.

 

사람들 사이에서 중도는 화합이 된다. 이것에도 저것에도 치우치지 않는 일이며 이쪽을 살리겠다고 저쪽을 죽이지는 말자는 호소다. 그래서 자비이고 화쟁이다. 선진국이란 고지에 오르기 위해 국민들을 총알받이로 이용하는 건 비겁한 화합이고, 끼리끼리 떼 지어 술 마시고 떠드는 건 유치한 화합이다. 모두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존중받고 최소한의 인간적 조건을 보호받아야만, 아무도 눈물 흘리지 않을 수 있다.

 


 

 

물론 말로만 쉽다. 민주주의의 원칙은 정의가 아니라 다수결이다. 쪽수가 많은 쪽이 머릿수만큼 더 가져가는 법이다. 그러므로 손해 보지 않으려 부지런히 편을 먹고, 제 가족을 건사하려 필사적으로 편을 든다. 어느 편에도 서지 않겠다면, 양쪽 모두에게 짓밟힐 각오를 해야 한다. 양아치가 이긴다. 중도는 고독하다.

 

그리하여 중도는 집중이다. 남의 삶을 기웃거릴 시간에 자신의 삶에 거름을 한 번 더 주는 정성이 필요하다. 돈이 정말 신(神)인지 나의 불행이 자초한 것은 아닐지, 생각해보고 되씹어볼 일이다. 무위진인(無位眞人).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스스로 등급을 매기려 들지 않을 때, 비로소 참사람이 되는 것이다. 자유는 용기에서 꽃핀다.

 

또 다시 새해다. 새해가 되면 누구나 어른이 된다. 새롭게 계획을 짜고 성숙을 다짐한다. 각계에서 쏟아내는 신년사들이 실현됐다면, 이미 지상낙원을 만들고도 열 트럭은 남았을 것이다. 올해엔 아주 조금이라도 덜 ‘헬조선’스러운 나라가 되기를, 미련한 마음으로 꿈꿔본다. 조금만 더 한번만 더, 견디자.

 

제36칙
마조의 불편함(馬師不安, 마사불안)

 

마조도일(馬祖道一)이 몸져누웠다. 누군가 물었다. “요즘 건강이 어떠십니까?” 마조가 말했다. “일면불(日面佛)! 월면불(月面佛)!”

‘일면불 월면불’은 사실상 마조의 열반송이다. 일면불은 수명이 1800세에 이른다는 부처님이다. 반면 월면불은 하루살이다. 그러므로 마조의 대답은 무슨 거창하고 심오한 의미를 품은 게 아니다.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다”는 것을 재치있게 표현한 말이다. 이러한 농담 한마디를 가지고 수십 년을 참구했다면 웃음거리나 될 일이다. 하기야 취미생활이라면 할 말이 없으나…. 여하튼 자구 해석에 매달릴 게 아니다. 죽음 앞에서도 농담을 던질 수 있었던 그 마음을 보아야 한다.

 

또한 1800년을 살아도 언젠가는 죽는다. 단 하루를 사는 자에겐 그 하루가 100년과 같다. 죽음 앞에서 삶의 길이는 무의미하다. 외려 죄 지을 일만 많아지고 추한 꼴만 보이기 십상이다. 오직 삶의 내용이 중요할 뿐인데, 이마저도 해석하기 나름이다. 돈을 중히 여기는 이는 생전의 재산에만 눈독을 들일 것이고, 인맥을 높게 치는 이는 살아서의 그가 벌여놓은 위선에만 관심을 둘 것이다. 건강의 관점에서 본다면, 가끔 잔병을 치르다가 중병으로 끝내는 게 인생이다. 실체는 없고 형상만 있을 뿐이다.

 

제37칙
위산의 업식(潙山業識, 위산업식)

 

위산영우(潙山靈祐)가 앙산혜적(仰山慧寂)에게 물었다. “모든 중생은 다만 업식(業識)이 끝없이 망망해서 가히 의거할 근본이 없거늘 그대는 어떻게 증험(證驗)하겠는가?” 그때 어떤 스님이 그들의 앞을 지나갔다. 앙산이 그에게 “스니임….” 하고 부르자 스님이 돌아봤다. 앙산이 위산에게 말했다. “이것이 바로 업식이 끝없이 망망하여 가히 의지할 근본조차 없는 것입니다.” 위산이 일렀다. “정답이다.”

정체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일단 겉으로 드러난 행색에서 온다. 삭발한 머리와 잿빛 승복의 사내를 보면 사람들은 그가 스님이라고 인식한다. 또한 그들이 스님으로 봐줌으로써 그는 스님이 된다. 아울러 스스로 ‘스님’임을 지각할 수 있는 이유는 자기가 스님으로 살아왔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양복 입은 스님은 사회적으로 용인되기 어렵고, 치매에 걸린 스님은 남들에게만 스님이다. 곧 밖으로 나타나는 형상과 안으로 떠올리는 표상은 정체성을 떠받치는 양대 보루라고 할 수 있다.

 

업식이란 오랜 세월 동안 쌓인 업이 만들어낸 의식을 가리킨다. 과거에 저지른 말과 생각과 행동을 기반으로 현재의 삶을 규정짓는 마음 작용이다. 예컨대 ‘분수에 맞게 처신해라.’ ‘내 경험상 이게 맞다’ ‘누울 자리를 보고 누워야지.’ 등등. 사람은 지금의 삶이 그냥저냥 평작 수준이라면, 살아온 대로 살아가게 마련이다. 스님은 스님답게 선생은 선생답게 계속해서 살아가면서 수익을 창출하고 자긍심을 유지한다. 결국 품위라는 것도 하나의 기득권이다.

 

차림새가 단정한 스님이 지저분한 스님보다 훨씬 큰스님처럼 보인다. 그리고 깨끗한 스님은 깨끗하지 못한 스님을 타박하면서 자신의 고결함에 뿌듯함을 느낀다. 선을 긋고 선의 바깥으로 넘어가려 하지 않는 건, 스님뿐만 아니라 모든 기성세대의 관행이다. 기성세대를 보고 배운 미래세대에게도 공통적인 습성이다. 자기를 일정하게 구속해야만 삶의 안전과 평화를 보장할 수 있는 것이다. 어느 정도는, 스스로를 속여야하는 게 인생이다.

 

제38칙
임제의 참사람(臨濟眞人, 임제진인)

 

"붉은 몸뚱이에 한 사람의 무위진인(無位眞人)이 있다. 항상 그대들의 얼굴을 통해서 출입한다. 아직 갈피를 잡지못한 이들은 잘 살펴보길.”
대중 사이에서 누군가 물었다. “어떤 것이 무위진인입니까?”
임제가 돌연 법상에서 내려와 그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말해봐라, 어떤 것이 무위진인인가!” 대답을 계속 머뭇거리자 임제는 그를 거세게 밀쳐버렸다.
“무위진인은 개뿔. 마른 똥막대기 같으니라고.”
『임제록』

서서 일하는 것보다 앉아서 일하는 것이 편하다. 모임에 갔는데 나에게만 자리가 없다면 자못 당황스럽다. 잠자리를 바꾸면 선잠으로 고생하기 일쑤다. ‘자리’란 삶의 질을 가늠하는 기초이며 사람다운 삶을 떠받치는 최후의 보루다.

 

자리가 있는 곳에 텃세가 있다. 서민들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지불하는 피와 땀은 결국 자릿세다. 정치는 자리를 얻으려는 힘과 자리를 지키려는 힘이 맞서거나 붙어먹으면서 발전한다. 의자는 일견 무서운 물건이다.

 

자리가 사람을 만들고 사람은 자리 없인 아무 것도 아니다. 거꾸로 말해 자리를 떼어놓고 보면 다들 도긴개긴인 셈이다. 제아무리 위세가 높다 한들 그 자리에 있으니까 그렇게 비춰질 따름이다. 또한 사정이 이러하니 설령 내가 그 자리에 올라간다손 거들먹거리지 말아야 한다.

 

무위진인(無位眞人)은 ‘자리 없는 참사람’, ‘등급을 매길 수 없는 참사람’ 쯤으로 해석된다. 자리가 없어도 개의치 않고, 자리로 상대를 판단하지 않으며, 근근이 살아도 느리게 간다면 누구나 무위진인이다. 드러눕기엔 ‘밑바닥’만큼 좋은 자리도 없다. 그러니까… “나야, 이 새끼야!”라고 말했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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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웅연
집필노동자. 연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시절 조사선(祖師禪)에 관한 수업을 몇 개 들으며 불교와 인연을 맺었다. 2002년부터 불교계에서 일하고 있다. ‘불교신문 장영섭 기자’가 그다. 본명과 필명으로 『길 위의 절(2009년 문화체육관광부 우수교양도서)』,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선문답』, 『불행하라 오로지 달마처럼』, 『눈부시지만, 가짜』, 『공부하지 마라-선사들의 공부법』, 『떠나면 그만인데』, 『그냥, 살라』 등의 책을 냈다. 최근작은 『불교에 관한 사소하지만 결정적인 물음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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