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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법문 해설]
상대지관과 절대지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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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  2016 년 12 월 [통권 제44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4,392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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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지관과 절대지관

 

중생의 마음을 일러 분별심(分別心)이라고 한다. 우리들은 늘 나와 남을 구분하고, 선악을 분별하는 마음으로 산다. 이런 관점은 수행을 바라볼 때도 마찬가지다. 차별의 관점에서 보면 수행을 통해 번뇌를 정화하고, 무명을 밝혀 지혜를 얻는 것으로 이해된다. 중생의 마음은 번뇌로 물들어 있기에 그런 마음에서 벗어나야 하고, 세간의 삶은 분주함으로 고요를 추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차별적 분별심에 근거하여 제시하는 수행이 상대지관이다.

 

천태 대사는 부처님께서 설하신 말씀을 장교・통교・별교・원교로 구분했다. 이런 구분은 교학적 구분에 그치지 않고 지관수행에도 적용된다. 즉 장교・통교・별교에서 제시하는 지관을 상대지관(相對止觀)이라 하고, 원교의 지관을 절대지관(絶對止觀)이라고 했다. 상대지관이란 말 그대로 상대적이고 차별적인 차원의 수행이라는 뜻이다.

 


사진: 서재영

 

상대지관에서는 번뇌를 멈추는 수행인 ‘지(止, śamatha)’에 있어서 멈추는 ‘주체[能止]’와 ‘멈춰지는 대상[所止]’이 차별적으로 존재한다. 진리를 통찰하는 수행인 ‘관(觀, vipaśyanā)’에 있어서도 ‘보는 주체[能觀]’와 ‘보이는 대상[所觀]’이라는 차별적 관계가 설정된다. 상대지관의 관점에서 보면 주체와 객체가 분리된다. 이렇게 주체와 객체가 분리된다면 수행을 위해서는 번뇌의 대상인 객체가 주체를 물들이지 않도록 한거정처(閑居靜處)의 장소를 선택해야 하며, 탈속적 해탈을 추구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이런 지관은 중생의 근기에 따라 제시되는 상대적이고, 유한한 것이기 때문에 천태 대사는 이를 상대지관이라고 했다.

 

그러나 천태 대사가 보기에 실상의 세계는 분별적 이해와 개념을 넘어선 것이다. 실상의 세계는 번뇌와 보리, 중생과 부처, 생사와 열반이라는 이원적 차별을 넘어서 있다. 번뇌와 보리를 구분 짓고, 중생과 부처를 구별 짓는 것은 어디까지나 중생의 근기에 따른 상대적 설명이다.

 

반면 상대적 세계를 넘어서 있는 실상(實相)의 세계, 진여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관조하는 수행을 절대지관이라고 한다. 상대적이고 유한한 세계를 넘어서 있기 때문에 달리 원돈지관(圓頓止觀)이라고 부른다. 성철 스님은 “일체 만법이 공간적으로 원융무애하기 때문에 원(圓)이라 하고, 시간적으로 간격이 없기 때문에 돈(頓)이라 한다.”고 원돈을 해석했다. 세간과 출세간이라는 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과거와 현재 같은 시간을 뛰어넘어 걸림 없이 소통하는 것이 실상의 세계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원돈문에 들어가면 실상을 바로 보게 되고, 보고 듣는 모든 경계가 중도임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원돈지관은 번뇌와 보리, 세간과 출세간을 구분하는 상대적 인식을 깨는 것이며, 분별심으로 대변되는 중생의 인식을 넘어서는 것이다. 번뇌를 떠난 곳에 보리가 있고, 중생 밖에 부처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해탈과 열반이라는 실상세계가 따로 있다는 것은 차별변견에 빠진 중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방편이라는 것이다. 실상을 바로 알면 전체가 다 가상(假相)인 동시에 모든 것이 그대로 실상이라는 것이다.

 

마하지관의 원돈지관

 

절대지관에 대한 천태의 관점은 『마하지관』에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상대지관이 번뇌와 보리, 세간과 출세간이라는 차별을 전제로 한 것이라면 절대지관은 그와 같은 분별을 넘어선 지관이다. 『반야심경』에서는 공(空) 가운데는 오온(五蘊), 육근(六根), 육경(六境), 십이연기(十二緣起) 등 모든 차별적 개념을 부정했다. 천태의 절대지관 역시 모든 차별적 개념을 벗어나 걸림 없는 세계에 대한 관조와 자각을 말한다. 원돈의 경지에서는 세간과 출세간이 다르지 않으며, 선과 악을 넘어서 있으며, 모든 차별상을 초월해 있다는 것이다.

 

“원돈(圓頓)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실상을 반연하므로, 경계에 이르면 그대로 중도이어서(造境卽中) 진실하지 않은 것이 없다. 인연을 법계에 매며, 생각을 법계에 하나로 하여, 하나의 색(色)과 하나의 향(香)도 중도가 아닌 것이 없으니, 자기의 세계와 부처의 세계와 중생의 세계도 그러하다. 음(陰)과 입(入)이 모두 진여이니 버릴 만한 고(苦)가 없고, 무명의 번뇌가 곧 보리니 끊을 만한 집(集)이 없으며, 변(邊)과 사(邪)가 모두 한가운데이고 바르니 닦을 만한 도(道)가 없고, 생사가 곧 열반이니 증득할 만한 멸(滅)이 없다. 고와 집이 없으므로 세간이 없고, 도와 멸이 없으므로 출세간도 없으니 순일한 실상이어서 실상 밖에 다시 다른 법이 없다. 법성이 고요한 것을 지(止)라 하고, 고요하면서 항상 비추는 것을 관(觀)이라 하니, 비록 처음과 나중을 말하나 둘도 없고 다른 것도 없는 것을 원돈지관이라 한다.”

 

천태가 말하는 원돈의 세계는 ‘일색일향 무비중도(一色一香無非中道)’로 요약된다. 우리가 보는 하나의 색, 한 줄기의 향기가 모두 중도 아님이 없다는 것이다. 상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빛과 소리, 향기와 맛, 촉감과 분별은 모두 번뇌의 찌꺼기들이며, 내면을 더럽히는 외부의 먼지 즉 ‘객진(客塵)’들로 이해된다. 그래서 인식의 대상이 되는 객관세계는 ‘육진경계(六塵境界)’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절대의 세계, 원융무애한 원돈의 입장에서 보면 육경은 번뇌의 먼지가 아니다. 따라서 경계도 번뇌를 일으키는 대상이 아니며, 대상을 인식하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의 활동도 번뇌에 물듦이 아니다. 보고 듣고 맛보는 인식작용이 고(苦)가 아니기에 원돈지관의 입장에서 보면 끊어야할 고란 애초에 없다(無苦可捨).

 

이렇게 보면 무명의 번뇌가 그대로 보리가 됨으로 애써 끊을 집착도 없어진다(無集可斷). 절대의 눈으로 보면 삼라만상이 진리 아님이 없고, 깨달음 아님이 없고, 지혜 아님이 없기 때문이다. 느끼고 감수하는 모든 경계들이 번뇌가 아니라면 애써 끊으려고 할 필요도 없다.

 

상대지관의 눈으로 보면 중생의 삶이란 변견에 물들어 있고, 삿됨에 의해 고통 받고 있다. 그래서 번뇌에 물든 세상을 떠나야 하고, 중생의 삶은 버려야 할 것이 된다. 그러나 절대지관의 입장에서 보면 변견이 그대로 중도이고, 삿됨이 그대로 올바름이 된다(邊邪皆中正). 따라서 변견을 버리고 중도정견을 체득한다든가, 사견을 버리고 정견을 닦아야 하는 그런 수행도 있을 수 없다(無道可修). 중생의 삶은 나고 죽는 생사의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지만 절대지관의 관점에서 보면 나고 죽는 고통 그대로가 고요한 열반(生死卽涅槃)이다. 따라서 무엇을 얻거나 증득할 만한 고요나 열반조차 따로 있지 않다(無滅可證)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결국 중도실상의 경계에서 보면 고통도 없고, 고통을 유발하는 집착도 없다(無苦無集). 집착과 고통은 끝없는 악순환의 길이므로 유전연기라고 한다. 하지만 중도실상에서 보면 그런 악순환도 없음으로 번뇌와 고통으로 가득 찬 중생세간도 본래 실체가 없다(無世間). 집착과 고통이라는 유전연기가 없다면 소멸해야할 고통도 없다. 따라서 고를 소멸하는 수행의 길도 없고, 고통이 사라진 열반의 세계도 따로 없다(無道無滅).

 

절대지관에서 보면 도의 실천을 통해 번뇌를 완전히 소멸하고 열반에 이르게 된다는 환멸연기도 공하다. 이렇게 번뇌와 고가 사라지면 당연히 그 대척점에 있는 출세간이라는 개념도 사라진다(無出世間).
원돈지관에서 보면 모든 존재는 하나같이 다 순일한 실상이다. 실상 말고는 그 어떤 법도 존재하지 않는다(更無別法). 그래서 선사들은 진리를 떠나서는 바늘 하나 세울 곳이 없다고 했다. 이처럼 모든 존재의 실상이 본래 고요하고, 법의 성품이 본래 고요한 것(法性寂然)이 실상의 ‘멈춤[止]’이며, 항상 실상을 비추고 있는 것(寂而常照)이 원돈의 ‘관(名)’이라고 했다.

 

결국 천태는 번뇌와 보리를 대립적 관계로 놓고 수행을 통해서 보리를 추구하는 것은 상대적 관점이며, 차별적 인식을 가진 중생을 위한 처방이라고 보았다. 원돈지관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수행의 궁극적 종착점은 대자유의 세계, 존재의 실상에 대한 통찰로 이어져야 함을 말하고 있다.

 

절대지관에서는 “선행과 악행, 생사와 열반이 모두 원융무애”하며, “천 가지 경계와 만 가지 차별이 전부 중도 아닌 것이 없다.”고 설명된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절대의 세계, 원돈의 경지이지 중생의 경계는 아니다. 따라서 성철 스님은 중도실상을 모르면서 번뇌와 보리가 하나이며, 세간과 출세간이 같다고 주장하는 것은 외도이자 마구니라고 엄격하게 경계했다. 일체가 원융무애하게 소통한다는 것은 근본무명이 끊어지고 중도실상을 증득한 지평의 풍광이지 무명에 싸여있는 중생의 안목은 아니라는 것이다.

 

실상을 보지 못하고, 중도를 깨닫지 못한 중생은 여전히 상대의 세계에 머물고 있다. 상대 유한의 세계에 머물고 있는 사람이 번뇌와 보리가 같다고 말하고,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라고 말하며, 중생의 삶을 부처의 삶으로 알고 안주한다면 무명을 더할 뿐이다. 눈 뜬 사람은 앉아도 광명이고 서도 광명이므로 선과 악, 번뇌와 보리에 구애받지 않는다. 하지만 “눈이 캄캄한 사람이 아무리 눈 뜬 사람 흉내를 내봐야 앉아도 넘어지고 서도 넘어질 일밖에 없다.”는 것이 성철 스님의 준엄한 경책이다.

 

따라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공의 세계, 실상의 세계가 절대무한이고 선악을 넘어선 무별의 세계라고 해서 절대지관만이 최고이고, 상대지관은 소용없다고 보는 견해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상대유한의 경지에 있는 사람이 원돈의 세계에 노니는 것처럼 행동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상대유한의 경계에 있는 사람은 마땅히 악행은 삼가하고 선행을 실천해야하며, 번뇌를 제멸하고 보리를 추구해야 하는 것이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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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성균관대 초빙교수.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선의 생태철학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연구교수, 조계종 불학연구소 선임연구원, 불교신문 논설위원, 불광연구원 책임연구원, <불교평론> 편집위원 등을 거쳐 현재 성철사상연구원 연학실장으로 있다. 저서로 『선의 생태철학』 등이 있으며 포교 사이트 www.buruna.org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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