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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추회요, 그 숲을 걷다]
이름과 실제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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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석  /  2016 년 2 월 [통권 제34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4,329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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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추회요』 98쪽의 글은 ‘유심(唯心)의 오묘한 종지’라는 제목으로 되어 있지만,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실제로는 ‘이름’과 관련된 불교 전통의 논의가 진행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여기서 이름이란 호칭, 명호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다 넓게 보자면 ‘말’을 뜻한다. 그러므로 이 단락의 논의는 ‘이름과 실제’ 혹은 ‘말과 실제’의 관계를 논하는 것으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아주 오래 전부터 있어왔던 철학의 고전적인 주제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것에 대해서는 그 존재를 망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가령 우리가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은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가끔 황사가 심하게 부는 날에나 맑은 공기 속에서 숨 쉬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자각하곤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말’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 역시 그것이 지니는 위력에 비해 과소평가되는 경향이 크다. 그런데 우리가 사용하는 말이 생사윤회(生死輪廻)를 일으키는 근본적인 힘이라고 말해본다면, 이런 경우 말의 위상이 크게 달라지지 않을까.

 

필자는 한 대학의 철학과에서 1년에 한 학기씩 불교철학을 강의하고 있다. 불교는 엄연히 현실의 종교이긴 하지만, 그것이 지니고 있는 철학적 사유의 탁월함으로 인해 철학과에서는 빠지지 않는 강의 과목으로 자리 잡고 있다. 매번 학기가 시작되면 필자는 처음의 1~2주 동안에는 부처님의 생애를 소개하는데, 여기에는 부처님이 성도하기 전까지 겪었던 여러 가지 과정들이 잘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다들 아는 것처럼, 부처님이 목표로 삼았던 것은 생로병사를 포함한 일체의 고(苦)로부터의 해탈이었다. 여기서 해탈은 불교뿐만이 아니라 인도철학 전반의 공통된 목표였다. 고에서 벗어난 경지가 바로 해탈인 것이다. 다만 그것에 이르는 견해와 방법 등이 달랐기 때문에 부처님이 계셨던 인도에서는 다양한 종교와 철학이 생겨났다. 성도한 이후 부처님은 두 가지 극단을 벗어나 ‘중도(中道)’를 증득했음을 천명하시는데, 두 가지 극단 가운데 하나로 일인론(一因論)과 무인론(無因論)을 들 수 있다.

 

일인론(一因論)과 무인론(無因論)

 

일인론은 단일한 하나의 원인에 의해 이 세계가 이루어졌다는 견해로서 인도의 브라흐마니즘을 가리키고, 무인론은 이 세계에 벌어지는 여러 일들은 원인 없이 생긴다는 극단적 유물론의 견해를 가리킨다. 부처님은 이 두 가지를 벗어나 인연(因緣)의 인과론(因果論)을 말씀하셨다. 부처님이 앞의 두 가지 이론을 지양했던 것은 앞의 두 이론 모두 사람들의 현실적인 노력을 부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하나의 원인으로부터 발생했고 그것에 의해 주재된다면 현실에서 우리가 노력해서 이룰 수 있는 바는 없을 것이고, 모든 것이 원인 없이 이루어진다면 우리의 노력은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는 것처럼, 다양한 원인과 결과에 의해 이 세계가 움직인다고 설하셨다. 다만 불교에서 말하는 원인과 결과의 범위는 단시간에 걸쳐 있는 것이 아니라 몇 생을 통해 관철되는 성격의 것이라는 점에서 그 특징이 있다.

 

다시 일인론으로 돌아가 보자. 이들은 이 세계가 브라흐만에 의해 창조되었고, 개개의 인간 속에 브라흐만의 속성이 그대로 구현되어 있다고 보았다. 그들은 개별자 속에 들어와 있는 브라흐만을 아트만(Atman, 自我)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 아트만은 인간의 육체 속에 깃들어 있으므로 육체의 유한성 때문에 그 능력이 제대로 구현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들은 요가(Yoga)를 통해 아트만이 육체의 속박에서 벗어나 궁극적인 브라흐만과 하나가 되는 것을 해탈이라고 보았다.

 

그렇다면 이들이 제시하는 형이상학적 논의의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브라흐마니즘에서는 하나의 단일한 원인으로부터 이 세계의 다양한 것들이 출현했다고 가정(假定) 혹은 단정(斷定)하지만, 불교도들은 오히려 이들이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말’을 잘못 신비화시키고 추상화시켜서 이런 이론을 도출하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가령 우리가 일생동안 가장 많이 사용해서 의식의 저 깊은 곳까지 뿌리 깊게 박혀 있는 말은 바로 ‘나’일 것이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서 밥을 먹고 ‘나’의 차를 타고 ‘나’의 직장에 출근하여 ‘나’의 일을 마치고 다시 ‘나’의 집으로 돌아와 ‘나’의 가족들과 같이 저녁을 먹고 ‘나’의 휴식을 취한다.

 

불교도들이 추적한 바에 따르면, 저 인도의 일인론자(一因論者)들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나’라는 말에 대해 사유하다가, 우리 몸속에 깃들어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이 ‘나’야말로 영원하고[常], 즐겁고[樂], 참된 자아이고[我], 깨끗한 것[淨]으로 존재한다고 단정한 뒤 신비화시켜버렸다. 일상적으로 우리는 ‘나의 책’, ‘나의 돈’이라는 말 등을 반복해서 사용하는데, 책이나 돈을 소유한 ‘나’에 대해서는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런데 ‘나의 눈’, ‘나의 몸’이라고 말할 경우, 눈과 몸을 소유한 ‘나’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이런 물음에 대한 하나의 해답으로 인도의 일인론자들은 바로 위에서 말한 ‘아트만’을 제시한 것이다. 눈과 코 같은 몸뚱이를 소유한 ‘아트만’이야말로 진정한 자아이다. 이런 견해로 인해 일인론에서는 브라흐만과 아트만이 하나[범아일여梵我一如]임을 체험하는 것을 수행의 목표로 삼았던 것이다. 그런데 석가모니 부처님이 보기에는 이 이론은 결국에는 ‘나’에 대한 무지(無知)에서 비롯된 매우 강력한 독단(獨斷)에 지나지 않았다. 성도하기 이전의 싯다르타 태자는 저들의 견해에 따라 선정(禪定)에 들어가는 체험을 무수히 경험했지만, 선정에서 나오는 순간 다시 ‘나’와 관련된 번뇌가 생기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태자는 이들의 가르침을 ‘선정과 일상의 상태가 일여(一如)하지 않은 것’으로 비판하고, 다른 길을 모색하였던 것이다.

 

이후 부처님은 보리수 아래 고요히 앉아 연기(緣起)의 법칙을 관(觀)하시고 무상(無上)의 깨달음을 증득하셨다고 한다. 즉 모든 중생들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꽉 붙잡고 있는 ‘나’라는 의식의 밑바닥에 무시이래(無始以來)의 무지(無知)와 독단(獨斷)이 자리 잡고 있음을 자각하고, 그로부터 훌쩍 벗어나버리셨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일인론의 경우, 일상적 용어에 대한 잘못된 견해가 잘못된 수행으로 이어졌고, 더 나아가 윤회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말’과 ‘실제’ 사이

 

성도 후 부처님은 우리가 ‘나’라고 여기는 몸[身]·느낌[受]·마음[心]·법(法)의 네 가지와 몸[色]·느낌[受]·표상[想]·의지[行]·의식[識]의 다섯 가지에 대해 그 이름에 대응하는 진정한 ‘나’가 있는 것이 아님을 반복적으로 관찰하게 하셨다. 앞의 것이 사념처(四念處) 수행이고, 뒤의 것이 반야심경에 나오는 오온개공(五蘊皆空)의 자각이다. 이후 불교도들은 특히 ‘나’라는 말에 대응하는 ‘아트만’과 같은 것이 실재하지 않음을 꾸준히 관찰했고, 이런 전통은 후대 유식학에 이르러 ‘말과 실제’에 대한 보다 정교한 이론으로 정립되게 된다.

 

그런데 불교도의 입장에서 볼 때,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말과 불교 이외의 종교나 철학에서 쓰는 말은 그것에 대응하는 실제가 없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이런 통찰을 보여준 부처님을 지칭하는 명호에 대해서도 그렇게 봐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해 부처님의 명호는 진실한 것이 아닌가? 이를 염두에 두고 『명추회요』 98쪽의 문답을 잠시 살펴보자.

 

【물음】 유심(唯心)의 오묘한 종지에는 일체가 이름이 없다면, 중생의 호칭 같은 것이야 거짓으로 시설할 수도 있겠지만 모든 부처님의 명호를 어찌 헛되이 세웠겠는가?

 

【답함】 범부를 상대해서 성인을 세우므로 성인도 본래 명칭이 없고, 속제(俗諦)를 따라 진제(眞諦)를 나타내므로 진제도 원래 성립되지 않는다. 모두 세속의 문자에 의지하여 상대적으로 생긴 것이니, 문자도 공(空)하고 공 또한 기댈 곳이 없다.

 

『명추회요』에서는 ‘부처님’ 같은 성인의 명호 역시 본래 공(空)한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리들은 보통 중생은 낮고 어리석지만 부처님은 높고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한데, 위의 문답은 우선 우리가 지니는 이런 관념으로부터 벗어날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이는 이 문답의 다음 페이지인 99쪽에 나오는 “일체법에 자성이 없다는 이치를 깨치기만 하면 어느 곳에서나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하고, 종지가 아닌 어떤 법도 없을 것이다.”라는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즉 우리의 마음을 벗어나 따로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거룩한 부처님의 명호나 상호를 떠올리기에 앞서, 부처님이 부처님이 된 까닭인 ‘일체법에 자성이 없다는 이치’에 눈을 돌려보라는 것이 바로 이 단락이 전해주려는 소식이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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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석
연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영명연수 『종경록』의 일심사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동국대 불교학술원의 조교수로 재직 중이며, <한국불교전서>를 우리말로 번역하는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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