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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스승, 성철]
“스님은 공부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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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주  /  2013 년 9 월 [통권 제5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6,170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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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남 정심사 주지 원영 스님

 


 

 

빗소리에 놀라 눈을 떴다. 서둘러 경기도 하남으로 향했다. 다행히 이른 시간이라 길은 막히지 않았다. 고속도로를 달리나 싶더니 금세 좁은 시골길이다. 울퉁불퉁한 길을 따라 올라가는데 ‘공사중’임을 알리는 이정표가 눈에 들어온다. 흙길과 시멘트길이 서로 어울려 몸을 풀고 있는 것을 보니 조만간 넓은 아스팔트길이 펼쳐질 것이라는 직감(?)이 든다.

 

정심사는 마을이 끝나는 뒷산 자락에 있었다. 검단산에 앉아 있는 정심사의 대웅전은 아담하면서도 아름다웠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요사채와 선방 등이 고요하게 앉아 있다. 

 


정심사 대적광전

 

정심사의 덩치는 작았지만 운영 중인 프로그램은 대찰(大刹)의 그것 못지않았다. 매월 초하루와 보름법회, 관음재일의 인등법회, 일요일 가족법회, 그리고 매주 목요일 『금강경』 강의를 합치면 모두 10여개 이상 법회가 있는 셈이다. 그리고 매 주말마다 특색 있는 기도가 진행된다. 능엄주 기도, 아비라 기도, 삼천배 기도 등이 그것이다. 또 매주 토요일에는 철야 참선 정진이 있다. 이와 같은 정심사의 모든 프로그램을 직접 주관하고 있는 주지 원영 스님의 방문을 두드렸다.

 

‘길’에서 ‘길’을 찾다!

 

“출가하기 전에 불교와 특별한 인연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유일하게 본 불교 책이 이기영 박사가 정리한 『대승기신론』이었어요. 그 책을 보면서 ‘불교에는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만 한 정도였습니다. 학교를 졸업한 이후 직장생활을 하고 여러 활동을 하면서도 그런 모든 것들이 저에게는 딱히 와 닿지 않았어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그런 ‘길’이 저에게는 항상 ‘저들의 길’로 느껴졌죠. 그렇다고 막상 다른 길을 생각해보면 그것도 ‘모르겠다’였어요. 이런 저의 모습을 보고 백련암에 다니던 누님이 ‘스님이 되면 좋을 것 같다’고 추천해 백련암에 가게 됐습니다.” 

 


원영 원택 원융 스님과 성철 스님 

 

1978년, 스님 나이 30일 때였다.
사실 스님은 한국의 최고 대학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생물학을 전공했고 또 공부를 잘했다고 한다. 그런 스님에게도 ‘삶’은 풀리지 않는 화두였다. 누님의 추천으로 백련암에 간 스님은 “‘생사 해결’과 같은 큰 꿈을 꾸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냥 불교 공부하러 간다.”고만 생각했다. 이후 스님 집안에서 출가한 사람이 3명이나 된다.

 

행자생활을 시작했지만 스님의 마음은 평안하지 못했다. 출가를 한 것이 정말 잘한 일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며칠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성철 스님이 원영 스님 앞을 지나가면서 한마디 툭 던졌다.
“스님은 공부하는 사람이다. 공부 부지런히 해야 한다.”
제자의 복잡한 마음을 봤던 건지 성철 스님은 그렇게 신참 행자를 위로했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원영 스님은 그간의 고민을 한 번에 정리했다.
그렇게 해서 본격적인 출가생활이 시작됐다. 스님은 성철 스님이 꼭 ‘가야산 호랑이’ 같은 모습은 아니었다고 회고했다. 

 

“출가 전부터 큰스님이 엄청 무섭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상하게도 그런 느낌을 전혀 받지 못했어요. 그냥 ‘평온하시다’는 생각만 들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큰스님께서는 항상 상식적인 선에서 이해가 될 수 있게 말씀하셨어요. 저희들에게 무슨 어려운 말씀을 했겠습니까. 그런데 출재가 제자들이 큰스님의 말씀을 너무 어렵게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호랑이같이 무서운 스님으로 기억을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원영 스님 역시 다른 문도스님들과 마찬가지로 지근거리에서 성철 스님을 시봉했다. 스승을 시봉하는 것은 아무리 정성을 들여도 쉽지 않은 일이다. 말 그대로 ‘잘해야 본전, 못하면 꾸지람’뿐이다. 

 

“사형(師兄)스님들은 큰스님 공양의 양을 ‘일정하게’ 하는 것을 어려워했다고 합니다. 정말 ‘일정하게’라는 말이 어렵잖아요?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공양의 양을 저울에 달면 되겠다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원택 스님께 저울과 초침까지 나오는 시계를 사달라고 했습니다. 저울에 달아서 시간을 맞추면 일이 쉽게 될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렇게 도구(?)를 이용해 공양은 어렵지 않게 해냈습니다.”

 


능엄주기도에 참석한 신도들이 입정에 든 모습

 

원영 스님은 다른 스님들과 달리 백련암에서 영어 잡지를 봤다고 한다. 백련암 문도인 한 스님은 “오랜만에 백련암에 갔는데 나보다 늦게 출가한 원영 스님이 영어 잡지를 보고 있어 조금 놀란 적이 있다.”고 귀뜸한 적이 있다. 그때부터 원영 스님을 만나면 꼭 묻고 싶었다.

 

“잘 알려져 있듯이 큰스님께서는 많은 책을 두루 보셨습니다. 그 책들 중에는 한국어와 한자, 일본어는 물론 영어로 된 책도 많았어요. 당시 큰스님께서는

 

“큰스님께서 종정에 추대되시고 몇 개월이 흐른 여름 어느 날이었습니다. 백련암에서 다소 여유롭게 있었는데 우연하게 원택 스님과 제가 함께 큰스님께 여쭈었습니다. ‘우리 불교가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하고 말입니다. 그때 큰스님께서는 참선의 필요성과 중요성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큰스님께서는 열반하실 때도 마지막으로 참선 열심히 하라고 당부하실 정도로 항상 끊임없는 정진을 강조하셨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포교를 해보니 한국불교의 가장 큰 장점 역시 참선(간화선)이라는 것을 새삼 느꼈습니다. 미국인들에게 티벳, 일본, 남방불교와는 다른 한국불교를 말할 때 내세울 수 있는 것이 바로 참선입니다. 동국대에 계셨던 목정배 교수님이 큰스님 가르침의 핵심인 오매일여(寤寐一如)를 ‘자나 깨나 불조심(佛照心)’이라고 하셨던 것이 기억납니다. 하하.”

 

열반 20주기를 맞이한 오늘날에도 성철 스님의 가르침이 더욱 회자되고 있는 것에 대해 원영 스님은 “큰스님의 가르침이 그만큼 지금도 필요하고 중요하다는 의미가 아닐까 한다.”고 밝혔다.

 

 


아비라 기도에 참석한 신도들

 

 

“20년이라는 세월은 참 긴 시간입니다. 그럼에도 큰스님의 가르침을 더 갈망하는 불자들은 오히려 늘고 있습니다. 이것은 큰스님께서 보여주신 수행자로서의 본연의 모습과 오매일여를 중심으로 한 선(禪) 수행의 가르침이 그 만큼 우리 사회와 한국불교에 던지는 바가 크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불교를 걱정하는 세간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는 이때 ‘성철 스님’이라는 말 자체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고 봅니다.”

 

성철 스님과의 인연 이야기는 한참동안이나 계속됐다. 여느 스님들처럼 은사스님과 관련한 에피소드는 무궁무진했다. 출가 초기의 생활에 이어 이야기 주제를 정심사와 해외포교 등으로 돌렸다.

 

“어디서든 큰스님의 가르침 선양하고파” 

 

원영 스님은 출가 후 6년 정도 백련암에서 정진하다 동국대 대학원에 진학했다. 당시 스님을 지도했던 교수들은 “성철 스님께서 학교에 오는 것을 정말 허락하셨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성철 스님이 항상 참선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때마침 서울경기 지역에 있던 백련암 신도들이 수도권에 성철 스님 가르침을 펼 수 있는 도량을 만들 것에 대한 논의를 진행했고 마침내 1987년 정심사가 창건됐다. 서울에서 공부하던 원영 스님이 절을 맡았다. 처음 작은 요사채만 있을 때 성철 스님은 두 차례 정심사에 머물렀다고 한다. 성철 스님 열반 이후 2000년도에 대웅전을 낙성하면서 절의 모습을 갖춰가기 시작했다. 당시 원택 스님은 “정심사 대웅전 건립은 성철 큰스님 사리탑 건립과 같은 소중한 불사”라며 격려했다고 한다. 스님은 그러는 사이 ‘원효 스님의 금강삼매경론 연구’로 동국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정심사 불사는 진행형입니다. 현재 큰스님 사리탑전을 비롯한 몇몇 불사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오면서 봤듯이 정심사 진입로 확장공사가 올해 연말에 끝나면 내년 초에는 바로 사리탑전 건립을 시작할 것입니다. 탑전은 2층으로 구성되는데, 1층에는 큰스님 사리탑을 모시려고 합니다. 전체를 선방으로 사용할 계획입니다. 탑전이 완성되면 정심사가 수도권에서 큰스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도량으로 다시 자리매김 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스님들의 생활공간인 요사채와 극락전을 비롯해서 템플스테이관 등의 불사도 차질 없이 꾸려갈 것입니다.” 녹록지 않은 환경이지만 원영 스님은 정심사 불사를 원만하게 회향하겠다고 다짐했다. 또 불자와 시민들이 요구하는 다양한 강좌를 개설하고 각종 기도를 활성화 해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도량으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원영 스님은 정심사 운영과 함께 그동안 미국에서 진행해온 해외포교에도 심혈을 기울일 것이라고 했다. 마침 인터뷰를 위해 정심사를 찾은 이날 원영 스님은 뉴욕 보리사를 확장 이전할 예정인 새 집 마련이 확정됐다며 ‘희소식’을 전했다.

 

“1992년에 미국 서부 버클리대학교에서 1년여 동안 미국의 불교와 종교 현황 전반을 살펴봤습니다. 한국에 돌아와서 저의 대학원 공부와 정심사 대웅전 불사를 마쳤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2001년에 포교를 위해 미국 동부인 뉴욕에서 보리사를 창건했습니다. 미국에서 다양한 종교를 보면서 한국불교가 너무 침체돼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해외에서 한국불교를 알리는 일을 하겠다는 원력(願力)을 세웠습니다. 사형(師兄)인 원명 스님께서는 주로 동남아와 유럽에서 포교를 하셨기 때문에 저는 미국에서 해보자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스님은 큰 어려움 없이 뉴욕에 정착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해외포교 1세대 스님들이 맨땅에 헤딩했던 것에 비하면 저는 쉽게 시작했어요. 특히 큰스님 상좌라고 하니 현지 교민들이 호의적으로 대해 주셨어요. 그리고 당시 뉴욕불교TV에서도 많이 홍보해 주었습니다.”

 

스님은 2004년부터 4년간 뉴욕불교사원연합회 회장으로서 한국불교 세계화에 일익을 담당했다. 뉴욕에서 열린 한국불교 관련 행사에도 적극 참여해 ‘현지화’를 도왔다. 당시 조계종 총무원장이던 법장 스님의 뉴욕방문 준비는 물론 뉴욕불교신도회 결성, 선서화전 개최와 뉴욕붓다라디오 개국, 사찰음식 시연회 등의 행사 지원과 참여는 현지에서도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

 

스님은 최근 뉴저지에 보리문화원을 개원해 불교를 비롯한 한국문화를 전하는데도 열심이다. 보리문화원에서는 불교교리와 참선, 요가는 물론 한글교실 등의 프로그램을 마련해 한국문화를 전하고 있다.

 


법문 중인 원영 스님

 

 

스님은 한국불교의 세계화를 위해서는 해외포교가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점심공양을 알리는 목탁 소리가 들려왔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스님에게 현재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는지 물었다.

 

성철 스님은 항상 ‘일체 중생의 행복을 위해 기도하라’고 강조했다. 그런데 중생들이 그렇게 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원영 스님이 중심이 돼 하남 정심사와 미국 뉴욕 보리사에서 진행되는 이웃을 위한 기도는 조만간 큰 법향(法香)이 되어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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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주
백련불교문화재단 부장. 현대불교신문 기자,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월간 <불광> 기자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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