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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추회요, 그 숲을 걷다]
성불(成佛)의 속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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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석  /  2016 년 3 월 [통권 제35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4,412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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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추회요』에는 불교의 매우 다양한 주제들이 언급된다. 그 중 한 가지가 113쪽에 나오는 ‘어찌 마음 밖에서 망령되게 구하랴’라는 제목 아래에서 다루어지는 성불의 속도에 대한 내용이다. 불자들이라면 대개 절에 갔을 때, ‘성불하십시오’라는 인사를 한 번씩 나눠보았을 것이다. 아마 이 인사는 불교의 목표가 부처님이 되자는 데 있기 때문에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되는 데는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릴까? 불교사를 보면 많은 불교도들이 오랫동안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해왔고, 그에 대한 대답 역시 매우 다양함을 알 수 있다. 여기서는 매우 상반된 관점을 하나씩 들어보고자 한다.

 

점오설(漸悟說)

 

먼저 인도불교에서는 대부분 셀 수 없을 만큼 오랜 시간이 걸린 후에 성불한다고 설명한다. 이런 관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인도 불교도들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현생에서 성불하기 이전에 무수한 전생을 통해 다양한 보살행(菩薩行)을 실천했음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이런 내용을 담은 경전을 본생경(本生經)이라고 부른다. 본생경에는 석가모니가 전생에 국왕·바라문·상인·여인 등의 사람의 모습, 혹은 코끼리·원숭이·사슴·곰 등의 동물의 모습으로 중생의 고통을 구해주었거나 불도를 수행했던 공덕을 묘사하고 있다. 이는 부처님이 성불한 뒤 최초로 법을 설했던 녹야원(鹿野苑)이라는 장소의 이름에서도 잘 나타난다. 오늘날 인도 불교의 4대 성지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이곳은 석가모니가 과거 전생에 사슴왕의 모습으로 살면서 사슴 무리를 구했던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전설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과거 전생에 한 나라의 국왕이 녹야원이 있던 장소에서 사슴을 사냥하였다. 그곳에는 모두 천 마리의 사슴이 살고 있었는데, 국왕은 그곳의 사슴을 모두 잡게 하였다. 이때 사슴왕은 국왕에게 매일 한 마리의 사슴을 보낼 테니 모든 사슴들이 한꺼번에 다 죽는 것은 면하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렇게 하여 하루 한 마리의 사슴만 희생되었다. 그러다가 무리 가운데 새끼를 가진 암사슴 한 마리가 죽을 차례가 되어 국왕 앞으로 가게 되었는데, 암사슴은 뱃속의 새끼는 아직 죽을 차례가 되지 않았으므로, 사슴왕에게 목숨을 구해달라고 청하였다.

 

이에 석가모니의 전생의 모습이었던 사슴왕은 암사슴을 대신하여 자신이 국왕에게 바쳐지도록 하였다. 큰 사슴왕이 성문으로 들어오자 모든 사람들이 의아하게 생각하였고, 국왕 역시 사슴왕에게 그 연유를 물었다. 이에 사슴왕은 뱃속에 새끼를 가진 암사슴을 대신하여 왔음을 알렸고, 이에 감탄한 국왕은 모든 사슴을 풀어주고 그곳을 사슴이 사는 동산으로 정하였다. 이후 이곳은 ‘사슴에게 보시한 동산’이라는 이름의 시록림(施鹿林)으로도 불리게 되었다.

 

이 고사는 석가모니가 전생에 불교의 여러 덕목 가운데 하나인 자비(慈悲)를 적극적으로 실천했음을 강조하는 내용이다. ‘자비’에서 ‘자(慈)’는 상대방에게 기쁨을 주려는 마음이고, ‘비(悲)’는 상대방의 고통을 없애주려는 마음이다. 사슴왕이 보여준 이러한 자비의 마음은 국왕을 감동시켰고, 결국 사슴 무리 전체를 다 살리게 하였던 것이다. 자비는 오늘날의 ‘공감’이라는 용어와 유사하게 사용되는데, 여기에는 타인의 즐거움과 고통을 감지하는 공감의 능력이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온갖 덕을 다 갖춘 부처님의 장엄한 모습은 어느 한 순간에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과거 전생의 무수한 세월 동안 구체적인 행위를 통해 축적되었음을 강조하는 것이 바로 성불과 관련된 인도 불교의 기본적인 관점이다. 인도불교의 영향이 강한 유식 불교 혹은 티벳 불교 역시 성불에 있어 삼아승기겁(三阿僧祇劫)이 걸린다고 보는데, ‘아승기’란 셀 수 없음을 뜻한다. 이런 관점에 따르면, 단박에 성불하려고 하기보다는 육바라밀과 같은 훌륭한 행위를 꾸준히 쌓아가는 것이야말로 성불의 단초가 된다.

 

돈오설(頓悟說)

 

그런데 같은 불교 내에서도 성불에 대해 위와 완전히 상반되는 견해가 존재한다. 이는 특히 중국의 선종에서 강조되었던 돈오설(頓悟說)이다. 돈오설은 현생을 떠나지 않고 단박에 성불하는 것을 역설하는 것으로, 『명추회요』 역시 이런 입장에 서 있다. 이 책의 113쪽을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종경(宗鏡)에 깨달아 들어가면 성불(成佛)이 일념(一念)을 벗어나지 않는다.

여기서 일념(一念)이란 한 생각 스쳐지나가는 짧은 시간인 ‘한 찰나’로서, 성불이 한 찰나에 이루어짐을 뜻한다. 이런 관점은 앞서 설명했던 인도 불교의 것과는 매우 상반됨을 알 수 있는데, 실제로 인도와 중국의 불교를 모두 수용했던 고대 티벳에서는 돈오(頓悟)와 점오(漸悟)에 관련된 두 나라 스님의 논쟁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깨달음이 한 찰나에 이루어진다는 점에 대해 『명추회요』에서는 『법화경』에 나오는 용녀(龍女)의 성불 이야기를 하나의 예로 들고 있다. 용녀는 삼천대천세계와 바꿀 만한 가치가 있는 보배 구슬을 하나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을 부처님에게 바쳤다. 시간으로 따지면 구슬 하나를 부처님께 바치는 데는 아주 짧은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 그런데 용녀는 자신이 성불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이보다도 더 빠를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는 성불이 단박에 이루어짐을 비유를 통해 보여주는 내용이다.

 

또 『명추회요』에는 나오지 않지만, 『법화경』 「신해품(信解品)」에 나오는 ‘거지 아들의 고사’ 역시 성불의 속도와 관련이 있다. 여기에는 먼저 막대한 부를 지닌 장자(長者)와 그가 오래 전 잃어버린 아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인도에는 수천 년간 계급제도가 존재했지만, 막대한 부를 축적한 재벌인 장자(長者)에 대해서는 바라문이나 국왕 계급 모두 존중을 표시할 만큼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처럼 모든 것을 다 갖춘 장자에게도 딱 한 가지 고민거리가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자신의 재산을 물려줄 아들을 오래 전에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어느 날 장자는 길을 가다가 거지 한 사람을 보았는데, 그 거지가 어릴 때 잃어버렸던 아들임을 단박에 알아보았다. 장자는 너무나 기쁜 마음에 사람을 시켜 거지 아들을 데려 오려 하였지만, 정작 거지 아들은 좋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자신을 데려가려고 하자 너무 놀라서 도망가 버리고 말았다. 장자는 어떻게 하면 아들을 데리고 올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자신이 신뢰하는 사람을 거지로 분장시켜 거지 아들 옆에서 같이 생활하게 만든 뒤, 차차 장자의 집에서 일을 하게 만들었다. 처음에는 화장실 청소와 같은 허드렛일부터 시작해서 점점 중요한 일을 시켜 세월이 한참 지난 뒤에는 재산 관리를 맡겼다. 세상을 떠나게 되었을 무렵 장자는 거지 아들을 불러다놓고 그가 어릴 적 잃어버렸던 자신의 친아들임을 말해준 뒤 모든 재산을 물려주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난다.

 

이 이야기에서 거지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완전히 물려받는 데 수 십년의 세월을 거치게 된다. 그런데 만약 거지 아들이 길에서 아버지와 처음 만났을 때 곧장 장자가 자신의 아버지라는 것을 알고 ‘아버지’라는 딱 한마디의 말을 했더라면, 아버지의 재산을 단박에 물려받을 수 있지 않았을까? 사실 이 이야기에서 장자는 부처님을, 거지 아들은 중생을 비유한다. 부처님은 ‘자신이 본래 부처다’라는 사실을 단박에 자각하지 못하는 중생들을 위해 갖가지 방편을 사용하여 그 점을 깨우쳐 주려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거지 아들이 본래 자신의 아들인 것처럼, 중생 역시 모두 불성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단박에 부처님과 같이 성불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명추회요』와 같은 선종의 문헌에서는 단박에 깨닫는 길을 강조하는데, 이는 우리나라 불교에 널리 수용된 관점이다. 이처럼 단박에 깨달을 수 있는 원리에 대해서는 많은 불교도들이 궁금함을 갖고 곰곰이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다. 이와 관련하여 『명추회요』 114쪽의 내용이 참고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일체중생의 심주(心珠)가 환하게 빛나니, 이치로는 전후(前後)가 없으나 근기에 따라 밝고 어둠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어떤 경우에는 싸우면서 살갗 속에 숨겨두었다가 밝은 거울을 대하자 나타나기도 하고, 어떤 경우는 놀면서 물밑에 빠뜨렸다가 물이 잔잔해졌을 때
찾기도 하며, 어떤 경우에는 전륜왕의 육계(肉髻, 상투)에 있다가 큰 공을 세워 하사받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가난한 사람의 옷 안에 감춰져 있는데 지혜와 원력을 깨닫고 보면 그대로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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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석
연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영명연수 『종경록』의 일심사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동국대 불교학술원의 조교수로 재직 중이며, <한국불교전서>를 우리말로 번역하는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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