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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탁소리]
중국불교 역사 속의 임제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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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택스님  /  2016 년 9 월 [통권 제41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063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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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제 스님은 그 출생연도를 알 수 없으니 세수도 잘 알 수 없고 몇 살에 돌아가셨는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돌아가신 연대는 분명합니다. 서기로 867년에 돌아가셨으니 지금으로부터 이미 1100년이 넘었습니다.

 

임제 스님이 살던 시대가 전체 불교사를 통해 볼 때 어떤 상황이었나 하는 것을 살펴보겠습니다. 후한 명제 황제 영평 10년에 불교가 중국에 처음 들어왔다고 하는데 그 때가 서기 67년입니다. 임제 스님이 돌아가신 해와 딱 800년 차이입니다. 불법이 중국으로 들어와서 500년 동안은 인도에서 부처님 경전을 가져다 번역한 번역불교시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중국 임제사 입구 

 

번역을 통해 중국에서 불교가 임제 스님 때까지 약 300년 동안 수·당 시대를 거치며 아주 크게 흥성하였습니다. 그 대표적인 종파를 보면 첫째 수나라의 천태지자(538~597) 대사의 천태종, 둘째 당나라의 현장(600~664) 법사의 법상종, 셋째는 현수(643~712) 법사의 화엄종, 넷째는 불공(705~774) 삼장의 밀종, 다섯째는 도선(596~667) 율사의 남산종 등의 교가입니다.

 

이 다섯 가지 종이 교가로서는 천하에 흥성했고, 이 교가의 다섯 종들이 참으로 불국세계라고 할 만큼 중당시절까지 흥왕興旺했습니다. 교종이 이렇게 성세를 떨치고 있는 가운데 달마에서 기원했던 선종도 홍인(601~674) 대사에게 법이 전해지고 제자인 혜능 대사에 이르러 크게 발전의 계기를 닦게 됩니다.

 

혜능 대사의 제자로는 남악회양(677~744)과 청원행사(?~740) 등이 있으며 많은 영재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남악회양의 제자로 마조도일(709~788)은 강서(江西)에 살면서 홍포하였기에 강서의 마조라는 명성으로 일세를 풍미하였습니다. 마조의 선은 130여명의 제자들에 의해서 장안을 위시하여 전국으로 전파되어 갔으며 그 가운데 백장 회해(720~814)는 특별히 기억해야 될 제자입니다. ‘백장청규’를 지어서 첫째로, 율종에 속해있던 선종(禪宗)을 독립시키고 대소승의 계율을 정리해서 선원의 제규칙을 정하였고, 둘째는 마조의 정신을 토대로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노동사상을 확립함으로써 선종사원의 경제적 자립을 확보하는 실천적 기반을 확립한 역할이 지대하였습니다.

 

마조 대사는 많은 노력이 필요한 대중 접화의 길을 선택하였고 대교단 형성의 계기를 이룬 삶을 산데 비하여 석두 대사는 대중을 영도하기를 거부하고 약간의 수재만을 배출했을 뿐 평생을 산에서 내려오지 않았고 그 제자들도 은둔의 수행생활을 하였습니다.

 


육조혜능이 법을 폈던 중국 남화선사 모습 

 

그래서 마조 스님은 “석두는 진금포(眞金鋪), 나는 잡화포(雜貨鋪)이다. 어떤 사람이 와서 잡화를 구하면 나는 집어서 그에게 주고, 어떤 사람이 와서 진금(眞金)을 구하면 나는 또 그에게 준다.”고 하였습니다. 마조 스님이 잡화포라고 한 것은 석두 스님을 외경하는 마음으로 겸손과 자부의 뜻으로 스스로 하신 말씀임을 잘 알아야 합니다.

 

마조계의 선풍이 중당시대의 불교계에 위세를 떨쳐가고 있는 그 때 당나라에는 무종(840~846재위) 황제가 집권하고 있었습니다. 그 회창년간(841~847)에 무종 황제가 삼무일종(三武一宗)의 법난 중 가장 참혹한 폐불 사건인 회창법난(845~847)이 일어났습니다. 845년 회창 5년에 마침내 전국의 절 4만여 개를 부수고 비구·비구니 26만 명을 환속 시켜버리고 경전·승복을 모두 불태워 버리고 금, 은, 동, 철 등의 불상과 불구는 녹여서 화폐와 농기구를 만들었습니다. 이에 앞서 현종 황제(712~756 재위) 때 일어난 안록산과 사사명의 난(755~763) 때에도 많은 사원과 불교전적이 산실되었는데 다시 회창의 폐불에서는 교종들이 재기할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한 피해를 입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불법이 여지없이 망하게 되어버렸는데 무종이 죽고 난 뒤에 그 삼촌 되는 대중천자(大中天子) 즉 선종(宣宗)이 즉위하여 불법을 다시 크게 일으켰습니다.

 

선종 황제는 무종 황제가 한 때 자기를 죽이려 하니까 왕자의 몸으로 도망하여 저 깊은 산중에 숨어서 중노릇을 했습니다. 중노릇을 하다가 자기 조카인 무종이 죽게 되자 황실의 추대를 받아 천자가 되었으니 대중천자(大中天子)입니다. 파괴된 불법을 다시 복구하려고 큰 원력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불교계가 워낙 큰 타격을 입었던지라 전과 같이 복구할 수는 없었습니다. 교가인 천태종, 법상종, 화엄종, 밀종, 율종 등은 그 전과 같은 성황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오직 선종만은 그 전보다 훨씬 더 융창하여 갔습니다. 이렇게 교종은 그 교세를 회복하지 못한 대신에 선종이 성황한데 대하여 학자들은 대략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폐불로 인해 학승들에게 필수적이었던 수많은 전적이 안사의 난과 회창폐불을 당하며 불태워지고 당시 황실이나 큰 단월들의 지원이 사라져 그 비용을 충당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에 비해 선종은 불립문자, 교외별전이라 하여 경전과 주석서가 크게 필요하지 않았고 산중불교로써 큰 피해 없이 교세가 퍼져갔습니다.

 

둘째는 백장청규에 의해서 선종사찰은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노동정신이 투철하여 자급자족을 원칙으로 하였는데, 안사의 난과 무종의 폐불에도 그 선종사찰은 경제기반이 무너지지 않고 자생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중국 자은사에 모셔진 현장 법사 존상 

 

셋째는 9세기 초에 강서 및 호남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마조 대사의 ‘잡화포’ 불교가 그 제자들의 노력에 의해 널리 유포되어 지방의 절도사들과 민중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음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회창폐불이 막을 내리면서 교종들은 기사회생 할 수 없었으나 선종은 훨씬 더 왕성한 발전을 하게 되었으니, 5가 가운데 마조 문하에서 최초로 위앙종이 세워졌는데 백장회해의 제자인 위산영우(771~853)와 그의 제자인 앙산혜적(807~883)의 부자이대(父子二代)에서 위앙종이 비롯되었습니다. 다음은 백장회해의 제자인 황벽희운(생몰연대 미상)의 제자인 임제의현(?~867)이 하북의 임제원에 머물면서 황벽희운 선사의 법을 계승하여 임제종을 펼쳤습니다.

 

임제 스님은 황벽 스님에게서 완전히 인가를 받아서 황벽 스님은 남쪽 복건성의 황벽산에 계셨지만 임제 스님은 저 북쪽 하북성의 호타하라는 강 근처에 자리를 잡으니 거기가 임제원이었습니다. 임제 스님이 활동한 하북 지방은 안사의 난 이후 강대해진 절도사들의 무인사회가 왕의 중앙정부와 대치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조당집』이나 『임제록』 기록에 따르면 임제 스님이 진주로 간 시기는 회창법난이 끝난 후 대중천자(846~859 재위기간)의 초중년간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또 당시 하북의 진주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세력은 절도사 왕씨들이었습니다. 상시라는 벼슬 이름이 붙은 왕(王)씨 절도사 가운데 왕소의(王紹懿)가 함통 7년(866)까지 하북지방을 통치하였다 하니 임제 스님의 말년과 시절을 같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청원행사의 문하에서도 석두희천의 문하에 단하천연(735~820), 천황도오(748~807), 약산유엄(748~828) 등의 제자들이 출세하였습니다. 약산유엄의 문하에서 문암담성(782~841) 등이 나오고 그로부터 동산양개(807~869)가 나오고, 그 문하에서 조산본적(840~865)이 나왔으며, 천황도오의 제자로 용담숭신이 사법하였고 그의 제자로 덕산선감(780~865)이 나왔으며, 그 문하에서 설봉의존(822~908)이 사법하였습니다. 그의 제자 가운데 운문문언(?~949)이 출세하여 운문종이 생겼습니다. 설봉의존 대사의 또 한 제자인 현사사비(837~908)가 출세하였고, 그 제자인 나한계침(867~928)이 법을 이어 거기서 청량문익(835~958)이 출세하여 금릉에 살면서 법안종을 세웠습니다. 운문종과 법안종은 당나라가 망한 후(907) 5대 시대에 생겨나 발전한 종파가 되겠습니다. 선종사에서 5가(五家)라는 말을 법안문익 스님의 『종문십규론』에서 “덕산, 임제, 위앙, 조동, 설봉, 운문에 이르러 각각 문정을 시설하였다.”고 법안 자신과 더불어 선종의 분파를 간결하게 처음 정리하였다 합니다.

 

임제 스님이 개당 설법할 즈음으로부터 100여년이 지난 뒤에 처음으로 언급되는 5가의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임제 스님이나 동산 스님이 처음부터 “내가 임제종의 초조다”, “내가 조동동의 개조다”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당이 망하고 100여년이 지나는 오대시대에 와서 5가의 틀이 잡혀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역사가 흐르면서 위앙종이 제일 먼저 법맥이 끊어지고 법안종도 얼마 안가서 법맥이 끊어집니다. 운문종은 『건중정국속등록』에 붙어있는 “운문, 임제의 두 종파만이 천하에 홀로 융성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북송(휘종 황제의 어제서에서) 시대에는 임제종과 함께 크게 융성했었지만 북송 말기에 이르러서는 점차 쇠퇴해 갔습니다. 그 운문종을 대신하여 당시 융성하게 된 것이 조동종이었습니다. 그래서 후대까지 법맥이 전해지기로는 조동종과 임제동 두 종파만이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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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택스님
본지 발행인
1967년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1971년 백련암에서 성철스님과 첫 만남을 갖고, 1972년 출가했다. 조계종 총무원 총무부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조계종 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 도서출판 장경각 대표, 부산 고심정사 주지로 있다. 1998년 문화관광부 장관 표창, 1999년 제10회 대한민국 환경문화상 환경조형부문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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