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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법문 해설]
중생과 부처는 같은가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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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  2016 년 8 월 [통권 제40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4,304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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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의 마음속에 있는 부처

 

우리는 ‘나’를 인식하는 순간 이미 이분법적 사유의 틀에 갇히고 만다. 내가 인식하는 ‘나’라는 인식은 타자들과 구별됨으로써 만들어지는 배타적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자아에 대한 인식이 이렇게 형성되는 이상 세상은 온통 나와 너, 남성과 여성, 진보와 보수 같은 이분법적 차별로 인식되고, 그런 인식을 바탕으로 대립하고 갈등하는 관계가 만들어진다. 그것이 ‘나’라는 아상(我相)을 지닌 인간이 세상을 이해하고 반응하는 방식이다. 

 

반면 종교는 이와 같은 자기중심적 차별과 대립을 넘어 보편적 자비와 사랑의 실천을 제시한다. 그렇다면 정말 종교에서는 이분법적 사유와 대립적 구별이 존재하지 않을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종교에도 선과 악이 있고, 지옥과 천국이 있고, 피조물과 창조주가 존재한다. 중도를 말하는 불교 역시 예외는 아니다. 윤회와 해탈이 있고, 번뇌와 보리가 있고, 중생과 부처가 있고, 차안(此岸)과 피안(彼岸)이 엄연히 존재한다. 

 


 

 

종교 또한 이런 구별 속에서 악을 넘어 선을 지향하며, 지옥이 아닌 천국을 갈망하고, 차안의 고통이 아닌 피안의 적멸을 꿈꾸며, 중생이 아닌 부처가 되고자 한다. 수행자들이 치열하게 수행하는 것도 번뇌를 제멸하고 지혜를 체득하기 위함이며, 불자들이 보살행을 실천하는 것도 중생의 삶에서 부처의 삶으로 가기 위함이다. 어떤 점에서 종교에서 제시하는 이원적 구조는 현실을 넘어 이상을 향해 실천하게 하는 장치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불교의 진짜 매력은 바로 그와 같은 이원적 차별을 넘어서는 데 있다. 불교의 핵심사상은 중도(中道)이고, 불이법문(不二法門)이기 때문이다. 현상적이고 표피적 관점에서 보면 나와 너는 분리되어 있고, 다른 존재같이 보인다. 하지만 근원적 관점에서 보면 둘이 아니라는 것이 불이이고 중도이다. 불이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차별과 대립은 사라진다. 중생과 부처도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고, 욕망이 꿈틀대는 차안이 곧 피안이고, 번뇌가 곧 보리가 된다. 불이의 눈으로 바라보면 중생과 부처라는 이분법적 경계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엄학을 집대성한 현수법장도 “중생 마음 안의 부처님(衆生心內佛)이 부처님 마음 안에 있는 중생(佛心中衆生)을 위해 법을 설한다.”고 했다. 중생이 깨달으면 그 마음속에 부처님이 있고, 반대로 깨닫지 못하면 설사 외형이 부처일지라도 중생일 뿐이다. 여기서 부처와 중생의 가치론적 동일성이 확립되며, 중생의 존재론적 존엄성이 부여된다. 성철 스님 역시 인간 존재의 절대성과 무한성에 대해 누누이 강조했다.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에서 스스로 깨쳐서 우주 만법의 근본을 바로 알고 보니, 모든 중생이 부처님과 똑같이 무한하고 절대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절대적이고 무한한 능력만 발휘되면 모두가 스스로 절대자이고 부처이지, 부처가 따로 있고 절대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스님의 이런 논지는 “일체 중생이 여래와 같은 지혜와 덕상을 가졌지만 분별망상으로 깨닫지 못한다.”는 『화엄경』의 내용을 근거로 한 것이다.

 

지금 이대로 부처로 살기

 

이와 같이 모든 중생이 여래의 지혜와 덕상을 가졌다는 전제에서 ‘중생은 본래 깨달아 있다’는 ‘본각(本覺)’ 사상이 전개되고, ‘중생이 곧 부처’라는 본래부처설로 귀결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중생이 곧 부처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중생이라는 관념에 덧칠된 부정적 자기인식을 벗어버리고 무한한 긍지를 갖게 된다. 그런 자각 속에서 부처님과 같이 주체적이고 지혜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린다. 교계 일각에서도 이런 맥락에서 ‘붓다로 살자’라는 기치를 내걸고 복을 비는 수동적 신앙을 넘어 스스로 붓다로 살아가는 새로운 신행운동을 펼치고 있다. 이는 가장 불교적인 신행운동이자, 가장 높은 수준의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중생이 곧 부처’라는 것에는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할 점도 있다.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라는 것은 불이사상에서 나온 것이고, 불이는 중도의 다른 표현이다. 용수보살이 중도를 설명하기 위해 제시한 여덟 가지 중도 가운데 첫 번째가 바로 불일불이(不一不二)이다. 따라서 불이가 담고 있는 온전한 의미는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는 것이다. 우리는 불일불이 중에 불이의 측면만을 따와서 A와 B가 똑같다고 생각한다. 

 

유념할 것은 불이와 함께 한 조를 이루고 있는 것이 불일(不一)이라는 것이다. 불일불이의 관점에서 보면 부처와 중생은 둘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똑같은 것도 아니다. 부처와 중생은 동일한 측면도 있지만 그 둘 사이에는 하늘과 땅만큼 엄청난 차이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불이는 불일불이의 한 측면으로써 본질적 같음과 현상적 차이를 모두 포괄한 개념이지 부처와 중생이 같고, 중생이 부처와 같다는 일방적 등식은 결코 아니다. 불이를 그렇게 이해한다면 그것은 반쪽짜리 중도가 되고, 반쪽짜리는 차별과 대립을 낳는 새로운 변견이 되고 만다. 부처님은 맹목적 단견(斷見)도 부정하셨지만 무조건적인 상견(常見)도 부정하셨다. 중생을 무조건 긍정적으로만 보는 것은 상견이며, 그것은 단견 못지않은 변견일 뿐이다. 

 

그렇다면 부처와 중생이 같다는 불이는 무엇인가? 그것은 어디까지나 근원적 입장, 이(理)의 관점에서 바라본 것이다. 일례로 『반야심경』은 철저히 불이의 관점에 입각해 있다. 그래서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모든 현상적 차별이 사라진 이와 같은 불이는 어디까지나 ‘시고공중(是故空中)’, 즉 ‘모든 차별상이 사라진 공의 세계’에서 그런 것이지 중생의 현실이 곧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부처와 중생의 차별이 사라지고 진정한 불이가 되려면 관자재보살처럼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하여 공(空)의 세계, 진제의 세계에 들어가야 한다. 

 

차별이 사라진 공의 세계가 아니라 현실의 세계, 이(理)의 세계가 아니라 사(事)의 세계에서 보면 부처와 중생은 불이가 아니라 오히려 ‘서로 같지 않은’ ‘불일’의 관계가 된다. 부처님은 모든 번뇌를 제멸한 반면 중생들은 치성한 욕망의 불길에 휩싸여 살아간다. 부처님은 자비로 모든 중생을 섭수하지만 중생은 지금 이 순간에도 남을 짓밟으며 심지어 잔인한 살인과 약탈까지 서슴지 않는다. 불 세계는 욕망이 사라진 열반의 세계이지만 중생의 세간은 집착과 욕망에 점철된 고해의 바다이다. 이와 같은 엄연한 차이를 덮어놓고 중생이 곧 부처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께서 경계하셨던 변견을 옹호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부처님도 이와 같은 중생의 현실을 부정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출가하셨고, 승가를 통해 답을 모색하신 것이다.

 

깨달아야만 부처다

 

공(空)의 세계, 이(理)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중생이 부처와 같은 지혜와 덕상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색(色)의 관점, 사(事)의 관점, 현실적 측면에서 보면 깨닫지 못하면 중생은 그저 중생일 뿐이다. 성철 스님은 중생의 무한성을 누누이 강조했지만 깨달음의 증득이라는 과정을 거쳐야만 지혜와 덕상을 구현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런 이유로 스님은 언제나 확철대오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깨달음 없이는 부처로 살아가려 해도 그렇게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공의 세계, 근원적 관점에서 말한 ‘번뇌가 곧 보리’이고, ‘중생이 곧 부처’라는 무분별(無分別)의 진리를 통해 모든 중생이 부처라고 일반화하는 오류를 범한다. 

 

중생은 완성을 향해 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을 향해 이미 도달했다고 말하면 그들이 지향할 피안이라는 목표는 사라지고 만다. 굳이 애써 수행할 필요도 없고, 깨달음을 위해 노력할 필요도 없고, 그냥 부처로 살면 된다는 결론에 이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처가 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부처로 살 수 있겠는가? 물론 중생도 부처님의 삶을 따라가는 보살의 실천은 가능하고, 부처님이 가신 길로 따라가는 바라밀의 삶은 가능하다. 그렇게 보살행을 행하고, 바라밀행을 실천하는 것이 행위의 종교로써 불교가 제시하는 신행이다. 수행과 깨달음 없이 부처로 사는 것에 대한 성철 스님의 다음과 같은 말씀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무명 그대로가 실상이고 불성이고 열반이라고 하니, 그냥 그대로 살면 안 되겠나 하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불법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 ‘무명 그대로 불성이고, 견혹과 사혹 그대로 법성이고, 중생 그대로 부처라면 성불할 것도 없고 공부할 것도 없는데 공연히 힘들게 왜 앉아 있을까?’라고 생각하면 외도(外道)입니다. …… 무명 그대로 법계이고 그대로 불법인 것을 바로 알려면 무명의 구름을 걷어야 합니다. 무명을 멸하지 않고서는 무명 그대로가 법계이고 불법이란 것을 절대 모릅니다.”

- 『백일법문』 중권

 

성철 스님은 무명을 소멸하지 않은 중생은 중생일 뿐 부처가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 무명을 걷어 낼 때 중생은 비로소 부처가 된다. 무명을 제멸하지 못한 중생을 보고 부처라고 하면 오히려 부단한 바라밀행을 무력화 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말은 부처로 산다고 하지만 결국은 적당히 착하게 살고, 적당히 훌륭하게 사는 범부의 삶에 안주하게 만드는 주문이 될 수도 있다. 그렇게 사는 것이 불교였다면 싯달타 태자는 굳이 왕국과 가족을 버리고 출가하지 않았을 것이다. 범부의 삶을 뛰어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위대한 포기의 길로 갔던 것이다. 

 

그래서 성철 스님은 “무명을 소멸하는 것으로 인하여 치성하게 타오르는 깨달음의 등(燈)을 얻는다(因滅無明 卽得熾燃三菩提燈).”는 『대열반경』의 대목에 주목했다. 중생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무명을 완전히 소멸해야만 지혜의 등불이 빛난다는 것이다. 스님은 “무명 그대로를 유지하는 것을 대열반이라 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단언했다. 깨닫지 못하고 번뇌에 싸여 있는 상태에서는 법계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법계를 모른다는 것은 중생이 곧 부처라는 무분별의 이치조차도 모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근원적 측면에서 중생이 곧 부처라는 것을 바르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중요하다. 자기 스스로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존재임을 자각할 때 중생은 중생으로서의 한계를 초극해 갈 수 있는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그렇게 인식할 때 비록 내면에 번뇌가 있고, 더러 욕망에 굴복하는 일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고 고원한 이상을 향해 부단히 정진해 갈 수 있다. 

 

하지만 무명을 벗지 못한 중생에게 당장 부처로 살라고 하는 것은 오히려 부처님의 삶을 부정하는 결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싯달타 태자는 부처로 살기 위해 중생의 한계를 초극하는 피나는 과정을 거쳤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치열한 수행의 삶을 살았다. 부처로 사는 것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지혜를 체득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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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성균관대 초빙교수.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선의 생태철학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연구교수, 조계종 불학연구소 선임연구원, 불교신문 논설위원, 불광연구원 책임연구원, <불교평론> 편집위원 등을 거쳐 현재 성철사상연구원 연학실장으로 있다. 저서로 『선의 생태철학』 등이 있으며 포교 사이트 www.buruna.org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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