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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암 거사와 배우는 유식]
제로, 요가, 아뢰야식, 아힘사[불살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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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암  /  2019 년 8 월 [통권 제76호]  /     /  작성일20-05-29 10:34  /   조회5,996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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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암 | 불교학자 ‧ 유식

 

인도인이 세계에 발신한 지적유산은 무엇일까요? 이런 질문을 받으면 대부분의 사람은 ‘요가yoga’와 ‘아힘사[ahiṃsā=불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저에게 이런 질문을 하면, 저는 ‘제로(0=空=śūnya)’와 ‘아뢰야식(阿賴耶識, ālaya-vijñāna)’을 추가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이 두 개념은 인류의 정신세계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불교 특히 대승불교는 이 두 개념이 없었다면 성립 불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4가지 개념이 인류 정신세계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한정된 지면 관계로 생략하고, 불교에 미친 영향에 한정해서 설명해 보겠습니다. 요가, 아힘사, 아뢰야식은 ‘유식’과 깊은 관계가 있으므로 나중에 기술하고, 먼저 ‘제로’부터 설명하겠습니다. 

 

1. 제로

 

 인류의 위대한 발견이라고 한다면 바로 ‘제로’일 것입니다. ‘제로’는 플러스와 마이너스 사이에서 중심 역할을 하는 숫자입니다. 만약 숫자에 제로가 없었다면 인류 문명이 이 정도까지 발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제로=공空은 대승불교의 사상적 토대입니다. 만약 ‘제로[공]’라는 개념이 없었다면, 대승불교는 탄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도불교는 ‘공’을 바탕으로 성립한 ‘중관사상’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독자들께서도 잘 알고 계시는 것처럼, 우리가 법회 때마다 독송하는 『반야심경』이나 대한불교조계종의 소의경전인 『금강경』의 핵심 내용은 바로 ‘공=제로’입니다. 이처럼 ‘제로[공]’는 한국불교도에게도 깊숙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2. 요가

 

 요가yoga란 동사원형 √yuj(묶다‧매다)에서 파생한 말인데, ‘(소나 말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매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다시 ‘정신[마음]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매다’, 즉 ‘정신을 한곳에 집중한다’는 의미로 변한 것입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마음을 대상에 결합시키는 것(=의식의 집중)’입니다. 그래서 요가를 ‘정신집중’이라고 번역합니다. 그런데 요즈음 ‘요가’를 몸을 유연하게 하는 ‘스트레칭’으로 생각하는 분이 계시는데, 그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임을 독자들께서는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가의 ‘아사나(āsaṇa=동작)’는 요가 수행[정신집중]을 하던 수행자들이 동물이나 식물의 모습을 보고 흉내 낸 것임을 말씀드립니다. 그리고 이 아사나의 목적은 요가수행[정신집중]을 잘 하기 위한 예비단계의 훈련에 불과한 것입니다. 요가의 궁극적 목적은 정신집중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중심 주제인 ‘유식’을 성립시킨 학파를 유가행파 또는 유식학파라고 하는데, 유가행파의 범어가 ‘요가차라 바딘(yogacāra-vādin)’, 즉 ‘요가[유가]를 실천하는 사람들의 모임[派]’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요가’와 ‘유가[유식]’는 같은 말입니다. 이처럼 두 학파[요가학파와 유식학파]는 그 기원이 같습니다. 게다가 둘 다 ‘마음 수행’을 통한 심신心身의 안정을 목표로 합니다. 물론 유식학파의 위대한 점은 마음 수행을 통해 심층의 마음인 ‘아뢰야식’을 발견한 것입니다. 아뢰야식에 대해서는 앞으로 몇 회에 걸쳐 설명할 것이기 때문에 자세한 것은 생략하고, ‘아뢰야식’이라는 말의 의미만 설명하겠습니다. 

 

3. 아뢰야식

 

 저는 제로의 대 발견에 버금가는 것이 아뢰야식의 발견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 때문에 아뢰야식의 발견을 ‘위대한 발견’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첫째, 불교 이외에 마음의 심층에 있는 아뢰야식의 존재를 알아차린 사람이나 이것을 주장하는 사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특히 뇌 과학의 발달에 따라 뇌의 구조와 작용이 많이 해명되었습니다만, 여전히 마음의 존재는 과학적으로 증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정신분석학에서 ‘무의식’을 설명했습니다만, 무의식과 아뢰야식은 전혀 별개라는 사실입니다. 둘째, 불교는 심층의 마음인 아뢰야식을 발견함으로써 마음과 바르게 접촉하는 방법을 제시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은 괴롭습니다. 그렇지만 ‘마음’과 바르게 사귀면 분노, 미움, 절망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은 자연히 사라져 버리며 살아가는 즐거움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유식은 마음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해명하여 마음을 대변혁시키는 방법’을 제시하기 때문입니다.(『마음의 비밀』, 요코하마 코이츠 지음, 허암 옮김, 민족사) 

 

 여기서는 아뢰야식이란 글자적인 의미만을 간단하게 설명하겠습니다. 아뢰야식이란 ‘내[인간]가 행한 결과물인 종자(種子, bīja)를 저장하는 마음’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어떤 행위를 하던 그 행위는 종자가 되어 아뢰야식에 차곡차곡 저장되어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아뢰야식은 ‘아뢰야阿賴耶’라는 말과 ‘식識’이라는 말로 이루어진 합성어입니다. ‘아뢰야’란 ‘저장하다’라는 뜻의 범어 아라야ālaya를 음역[音譯]한 것입니다. ‘아라야ālaya’라는 말을 알기 쉽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독자들께서는 잘  알고 계시듯이 인도와 네팔 국경에 걸쳐 있는 ‘히말라야himālaya’라는 산을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히마hima’는 ‘눈[雪]’, ‘아라야ālaya’는 ‘저장, 창고’라는 뜻이기 때문에 ‘히말라야’는 사시사철 ‘눈이 저장된 곳’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식識이란 범어 ‘비쥬냐나vijñāna’를 번역한 것입니다. ‘비(vi:나누다)’라는 접두어에 동사원형 √jñā(알다)라는 말로 이루어진 것으로 ‘둘[견분‧상분]로 나누어 알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식識은 ‘마음[心=識]’의 다른 표현입니다. 현장스님은 아뢰야식을 저장할 장藏과 알 식識, 즉 장식藏識 또는 집 택宅과 알 식識, 즉 택식宅識으로 한역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뢰야식을 영어로 ‘store consciousness’라고 번역합니다. 

 

4. 아힘사

 

 ‘아힘사ahiṃsā’란 ‘비폭력, 불해不害, 불살생不殺生’ 등으로 번역합니다. 우리에게 이 말이 알려진 것은 아마도 인도의 위대한 지도자 마하트마 간디(1869-1946) 때문일 것입니다. 간디는 인도의 독립운동을 전개할 때, 철저하게 ‘비폭력’ 정신을 실천했습니다. 그래서 인도인뿐만 아니라 세계인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비폭력’으로 번역한 말이 바로 ‘아힘사’입니다. 

 

 이 ‘아힘사’라는 말은 유식에서도 그대로 사용합니다. 유식에서는 선善한 심소[마음작용] 중에 하나로 설명합니다. 아힘사[불해]는 ‘다른 존재를 위협하거나 해치지[危害)] 않는다’는 뜻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인도인이 인류에게 준 가장 위대한 선물은 ‘아힘사’라고 생각합니다. 아힘사는 살아 있는 모든 생물에게 무한한 자비심을 가질 때만 실천이 가능한 것입니다. 인간은 육체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육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다른 생물을 해쳐야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쩔 수 없이 아힘사를 온전하게 실천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최소한 인간에게만 이라도 연민과 자비심을 가진다면 타인을 함부로 살해하거나 상해를 가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불교를 ‘아힘사[불해]의 역사’라고 정의합니다. 불교의 역사를 보면, 다른 종교를 박해하거나 파괴하는 행위를 한 적이 없습니다. 또한 불교는 자신의 종교를 바꾸는 말인 ‘개종改宗’이라는 말 자체도 없습니다. 이런 아힘사의 정신은 불교 내부에 복류수伏流水처럼 흐르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습니다만,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사상이나 자이나교의 철저한 불살생계는 아힘사[불해]의 마음작용[심소]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자이나교도는 출가자와 재가자에게도 철저하게 ‘아힘사’의 실천을 요구합니다. 재가신자에게는 농사는 못하게 하고 상업에만 종사하도록 하는데, 곡식을 뿌리기 위해 땅을 쟁기로 파면 자연히 생물을 해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육식도 철저하게 금지할 뿐만 아니라 식물 중에서도 토마토 등의 열매만 먹게 합니다. 왜냐하면 뿌리에서 나는 식물을 먹는 것은 생명을 해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불교는 동물의 살생[육식]은 금지합니다만, 식물은 윤회하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에 금지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불교의 육식금지나 자이나교의 불살생도 바로 아힘사를 바탕으로 성립한 것입니다. 

 이제 구체적으로 유식의 논서에서는 불해[아힘사]를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 살펴봅시다. 물론 조금 어려운 내용이 등장합니다만, 끝까지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먼저 『성유식론』에서는 불해에 대해 “모든 유정[중생]에 대해서 손해되고 괴롭게(손뇌損惱) 하지 않는 무진(無瞋. 분노하지 않음)을 본질적인 성질[본성]으로 하며, 해침[害]을 능히 반대[대치]해서 불쌍히 여기는 것(비민悲愍, 연민)을 부수적인 성질[작용]로 한다.”라고 주석합니다. 

 

 또한 현장(600-664)스님의 저작인 『팔식규구』에 대해 주석한 감산(1368-1644)스님의 『백법논의』』에서는 “불해[아힘사]란 중생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겨 손해되고 괴롭히지 않는 것이다. 이것[불해]은 오로지 진[瞋, 분노]를 다스린다. 분노하지 않으면 밖으로 생물을 해치지 않으며, 안으로는 지혜로운 생명[지혜와 수행이 뛰어난 수행자]을 온전하게 <보호하기> 때문에 선에 이르게 된다.”(주1)고 주석합니다. 

 

 이에 대해 성철(1912~1993)스님은 『백일법문(중)』(p.317)에서 감산스님의 주석을 인용하여 불해[아힘사]를 “중생을 자비롭게 여겨 손해를 끼치지 않고 괴롭게 하지 않는 것”(慈愍眾生. 不為損惱)이라고 정의하면서, 불해는 “자비를 달리 표현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아주 적절한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주석서에서는 아힘사를 ‘무진[분노하지 않음]을 바탕으로 타인을 해치지지 않는 것’이며, 아힘사는 ‘자비[연민과 사랑]를 전제로 생긴다’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수행을 하는 이유는 ‘지혜’와 ‘자비’를 기르기 위한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불교도라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요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열심히 수행하여 마음속에 ‘아힘사’를 가득하게 채워 타인에게 자비를 실천하는 진정한 불교도가 되도록 노력해봅시다. 다음 호부터는 우리의 주제로 되돌아가 ‘아뢰야식’을 자세하게 설명하겠습니다. namaste(나마스테)

 

주)

(주1) 『『팔식규구』에 대한 또 다른 주석가인 지욱(智旭, 1596-1655)대사는 “모든 유정에 대해서 손해를 끼치거나 괴롭게 핍박하지 않는 무진을 본성[체성]으로 하고, 해침을 능히 반대해 상처 난 것에 대해 슬퍼하고 불쌍하게 여기는 것(비상연민悲傷憐愍)을 작용으로 한다.”고 주석하여 『성유식론』의 주석과 거의 동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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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암
불교학자. 유식을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유식삼십송과 유식불교』·『마음공부 첫걸음』·『왕초보 반야심경 박사되다』·『범어로 반야심경을 해설하다』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마음의 비밀』·『유식불교, 유식이십론을 읽다』·『유식으로 읽는 반야심경』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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