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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불교논쟁 / 기무라 vs. 우이 · 와츠지의 제1차 연기논쟁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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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승  /  2019 년 8 월 [통권 제76호]  /     /  작성일20-05-29 10:37  /   조회5,078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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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주 : 본 번역은 미야자키(2018,5)의 내용 일부를 번역한 것이다. 본서 및 본 번역의 의도 등에 대해서는 고경 제74호 ‘미야자키 데츠야宮崎哲弥의 『불교논쟁佛敎論爭―‘연기緣起’에서 본질을 묻는다』(ちくま新書[1326], 筑摩書房,서두’ 참조. 

 

이태승 | 위덕대 불교문화학과 교수 

 

제1차 연기논쟁의 해부(하) [1] ― 진정한 대립점 ―

 

우이의 기무라설 비판

 

[p.132-2. 『불교논쟁』 페이지-행수, 이하 동일] 그러면 대체 기무라와 우이 그리고 와츠지의 진정한 대립점은 무엇이었던가. 이것을 논하기 전에 우이 하쿠주의 족적을 개관하기로 한다. 우이는 1882년 출생. 출생지는 아이치愛知현의 호이寶飯군 미또御津. 기무라와 동일하게 12세에 같은 군의 조동종 절[東漸寺]에서 득도하고, 도쿄제국대학에서 다카쿠스 준지로에게 사사했다. 입학당시 우이는 본과생本科生, 기무라는 선과생選科生이었다. 당시 구제舊制 고교를 졸업하여 통상의 코스로 들어온 본과생과 보결로 특별히 입학을 허가받은 선과생 사이에는 대우 상 특별한 차별이 있었고, 이 라이벌은 서로 간 신상의 차이도 의식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우이는) 독일, 영국 유학 후 조동종대학, 동북제국대학, 동경제국대학에서 교수직을 역임하였다. 제자로는 나카무라 하지메中村元가 있고, 1963년 가마쿠라鎌倉시 니카이도二階堂의 자택에서 서거, 향년81세.

 

 

우이 하쿠츠

 

 

  두 사람의 모습을 비교해보면 기무라 타이켄이 도회적이며 신사연한 풍채를 띄고 있는 반면 우이는 촌티나는 고찰古刹의 주지와 같은 느낌을 갖는다. 당시 얼굴로 봐서는 아무리 보아도 기무라가 우위였다. 하지만 그 모습에서 주는 어눌한 인상과는 반대로 우이는 “결국 내가 말하는 불타의 설 또는 근본불교의 설은 우리들의 논리적 추론 위에 구성된 것으로, 그 밖에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곳에 귀착한다”(「원시불교자료론」 『印度哲學硏究 第2』)라고 하는 절제감을 나타내는 이지적인 자세를 평생 드러냈다.

우이는 12지연기의 근본인 즉 무명에 대해서도 매우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4제의 하나하나에 대한 무지(無知, aññāṇa)라고 하는 것과 같이, 무명은 무지라는 의미에 다름 아니다.”(「인연의 해석」)

  “가장 중요한 하나를 말한다고 한다면, 불타의 근본사상에 대한 무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前揭書)

 

무명은 무지이다. 우이에게 있어 붓다의 근본사상을 모르는 것이 무명이다. 하지만 이 무지를 유럽의 전통에서 이어지는 주지주의의 문맥에서 이해하려고 한다면 오해가 생길 것이다. 후대 그와 같은 오해와 부당한 독단에 근거해 ‘논점정리’가 쏟아졌다.

 

  여기에서 말하는 ‘붓다의 지혜’란, 통상의 지성이나 이성만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과는 다르다. 좀 더 말하면 언어에 의해 충분히 표현할 수조차 없다. 그것은 통상의 ‘사고영역’도 초월하고 있는 것이다. 무명과 동일하게 연결되는 무지란, 그것들 전체를 지각할 수 없는 사태를 말하는 것이다. 뒤에서 말하지만, 이것은 와츠지의 논고에서 한층 명확해진다.  뒤집어서 우이는 말한다.

 

“개념상 무명에는 활동성이 사상捨象되어 있다. 고로 무명 그 자체로서는 활동성이 없는 것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미 무명 그 자체로서는 본래 활동성을 생각할 수 없다고 한다면, 학자가 때때로 무명을 세계 또는 인생의 창조발전의 근본원리와 같이 해석하고, 따라서 12인연은 그 창조발전의 과정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고, 이것을 수론학파數論學派의 전변설轉變說을 설하는 25제諦와 비교하거나 또는 25제의 영향에 의해 생각하게 된 것이라고 하는 설은 결코 승인할 수 없게 된다.”(방선 인용자, 「인연의 해석」)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여기에서 전혀 승인할 수 없다고 부정되고 있는 것은 기무라 타이켄의 설이다. 와츠지 테츠로는 “우이씨는 전혀 기무라씨를 언급하고 있지 않다.”라고 단정하고 있지만(「부록 기무라 타이켄씨의 비평에 답함」 『和辻哲郞全集 第5卷』 所收), 이러한 한 구절을 덧붙이고 있는데서, 적어도 기무라의 연기론이 우이의 뇌리에 있었던 것은 의심할 수 없다. 글 속의 ‘수론학파’란 힌두교 정통 6파철학중의 하나인 상캬 학파, ‘25제’란 상캬 학파에서 세계창출에 관한 24개의 실체(24제)에 순수정신인 푸루샤를 더한 것이다. 기무라가 「사실적 세계관」에서 12지 연기를 논할 때, 불교에 영향을 준 선행사상으로서 이것을 거론한 것은 앞에서 이미 언급했다. 

 

  논박하는 기무라 타이켄     

 

[p.135-2] 이것에 대하여 기무라는 『원시불교사상론』 부록의 반론문 「연기관의 전개」의 「상」에서, 약간은 기묘한 논법으로 반박하고 있다.

  12연기의 무명을 ‘불타의 근본사상을 모르는 것’으로 이해하여, “12연기의 목적은 소위 이 불타의 근본사상을 모르는 사람凡夫의 심행心行이 어떻게 되어 있는가를 분명히 하는 논리적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고 논했다”라고 우이의 설을 정리한 뒤에, “그러나 이것으로는 예의 ‘불타가 출세하든 출세하지 않든 다르지 않다’라고 하는 연기 법칙, 항상성의 의미가 확연히 나타날 수 없는 것은 아닌가. 불타가 출세한 뒤의 무명은 그것으로 괜찮다하더라도 출세하기 전의 무명은 적어도 그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결점이 따른다.”라고 논란하고 있다.(「연기관의 전개」상 2절)

 

 

기무라 타이켄

 

 

  ‘불타가 출세하든 출세하지 않든 다르지 않다’라는 것은, 제1장에서 인용한 『상유타 니카야』의 『연緣』의 일절로 생각된다. 다시 해당부분을 살펴보면 “비구들이여, 연기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생에 의해 노·사가 있다. 여래가 출현하더라도 여래가 출현하지 않더라도 이것은 확립되어 있는 것이다.”(並川孝儀, 『構築された佛敎思想/ゴータマ·ブッダ』, 佼成出版社)라고 되어 있다.

 

 이 경은 연기가 보편적, 항상적인 이법으로, “불타가 출세하든 출세하지 안 든”=“여래가 출현하든 출현하지 안 든”간에 세계를 관철하는 법칙인 것을 설하고 있다.

 

  하지만 어찌하여 무명을 무지라고 하면, 붓다, 여래가 ‘출현하기 이전의 무명’을 설명할 수 없는 폐단이 생긴다고 하는 것일까. 마치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이 발견되기 이전에는 만유인력은 만물에 작용하지 않았다는 것인가라고 묻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닌가. 여래가 출현하기 이전에도 무명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태고적부터 무명에서 생기는 갖가지 고가 사람들 사이에 실제 있었던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불타 출현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은 당연히 붓다의 교설을 알 수도 없었고, 단적으로 말해 무지하였던 것이다. 붓다가 세상에 출현하여 비로소 무명으로부터 노사까지의 연기에 대한 속박으로부터 해방되는 방법으로 연기지의 하나하나를 소멸시키는 방법이 발견된 것이다. 

  흠 잡을 데 없는 이치라고 생각되지만, 기무라는 이것으로 무엇을 반증하고 싶었던 것일까.

 

  신앙론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되지만, 만약 붓다가 이 세상에 출현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연기의 이법은 인류에게 알려지지 않고, 우리들은 영원히 무명의 삶에 속박될 수밖에 없었다고 믿는 사람들이 불교도이다. 이 위기적 의식이 불교인의 신앙에 기층을 형성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연기설은 항상적이며 영원한 진리일 수 없다. 그것 자체 무상하고 변화와 소멸의 위기를 잉태한 ‘진리’인 것이다.

 

  기무라의 이러한 빗나간 비판에 비하면, 종교적 텍스트에 있을 수 있는 일종의 순환논법에 빠져있다고 논란하는 쪽이 오히려 이치에 부합한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계속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만약 불타의 근본사상이 불타의 근본사상에 의해 대표되는 법의 진상眞相이란 의미로, 따라서 무명이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의미라고 한다면, 물론 이것은 이전보다도 깊고 올바른 견해이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왜 우리들 범부는 법의 진상을 이해하지 못하는가. 본래 이해할 수 없게 하는 근본동력이 무엇인가를 논구하지 않으면 정리될 수 없는 일이다”(「연기관의 전개」상 2절)

 

  ‘본능本能’과 ‘실각實覺’     

 

[p.137-11] 어찌하여 무명에 빠진 범부는 세계의 진상을 이해할 수 없는가. 언제까지나 ‘자연적 입장’에 빠진 채로 만족하며, 무지의 상태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것인가. 돌변하여 이 질문은 예리하다. 우이 견해의 사각을 찌르고 있다.

 

  여기에서 감히 사적인 견해를 덧붙이면, 붓다가 도달한 ‘법의 진상’을 알지 못하게 하고 거기에서 범부를 멀리하는 ‘근본동력’은, 인간의 생물로서의 본능인 것이다. 덧붙여서 본능이라는 용어는 너무 개략적으로 설득력이 약한 용어로서, 현재 생물학과 심리학, 인지과학 등의 전문분야에서는 그다지 사용되지 않는다. 그와 같은 자연과학 용어의 엄밀성에 배려할 필요가 없어진 지금이야말로 무명의 이해를 돕는 개념으로서 불교에 이 말을 도입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유전적으로 이어받은 행동의 양식과 능력 정도의 의미이다. 이 생물적인 본능과, 성장의 과정에서 획득한 문화적, 사회적인 유사본능으로서의 언어. 이 두 가지가 우리들에게 자기와 세계에 대한 원초적인 인지를 형성하고, 우리들의 직각(直覺, intuition)과 실감實感을 통괄적으로 정리하고 있다.

 

  직각과 실감. 이 두 가지 말의 의미를 하나의 용어로 나타내기 위해,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실각’이라는 옛 용어를 사용하기로 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실각이란, 예를 들면 어떤 사물을 기분 좋게 느끼는 심신의 움직임을 말한다. 그것을 좋아한다거나 아까와 한다. 한편으로 어떤 사물은 기분 나쁘게 느낀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싫어하고, 미워하며, 배척하고자 한다. 이것이 실각이다.

 

  또 기분 좋은 것, 유쾌한 것, 사랑스런 것을 좋아하고 그것들에 집착한다. 한편 불쾌한 것, 추한 것, 위험한 것을 피한다. 만약 싫은 것이 가까이 오면 극력 배제하려고 한다. 이러한 몸과 마음의 작용을 실각이라 부르기로 한다. 실각은 극히 ‘자연적’인 것이지만, 불교에서는 우리들을 괴롭히는 몸과 마음의 작용에 다름 아니다. 이것은 불교의 본질에 관한 사안이다. 소부에 포함된 『담마파다』에는 다음과 같은 붓다의 말이 나타난다.

 

  “꽃을 꺾는 데 정신이 팔려있는 사람에게 죽음이 다가 오듯이, 잠자고 있는 마을에 홍수가 밀려오듯이 …… ”(中村元譯, 『ブッダの眞理のことば · 感興のことば』, 岩波文庫)

 

  눈앞의 들판에 아름다운 꽃이 피어있으면, 사람은 그것의 존재를 알고, 찬미하고, 또 그것을 따고 싶은 의욕이 일어난다. 그것들 모두가 ‘실각’이다. 또 한밤중 사람들이 자려고 하는 것도 피로의 자각과 수면욕 등의 ‘실각’에 의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 심신을 맡겨서는 ‘죽음’이나 ‘홍수’를 면할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기무라의 ‘심리적과정’론    

 

 [p.139-11] 따라서 기무라의 무명관은 이 점에서는 정확한 이해이다. 12지 연기를 ‘심리적 경과’라고 보는 해석도 정곡을 찌른다. 생득적 본능이든 ‘제2의 본능’이라고 하든, 한 마디로 정리하면 근본번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혹은 기무라가 말하는 ‘생명활동에 담긴 선천적 무의식적 성격’[행行]을 생물로서의 본능이라고 하고, 동일하게 ‘선천적 성격을 배경으로 한 의식의 각성’[식識], ‘의식의 반성에 의한 자기분열의 결과로서 자기의 객관화’[명색名色]를 언어의 작용으로 보는 것도 가능하다(「연기관의 전개」하, 3절). 예를 들면 식이라는 말의 연원을 찾아가면, ‘나누어 아는(팔리 vijānāti)’ 것 즉 언어적으로 분별하는 것, 분절화하는 것으로부터 식viññāṇa이라고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명색은 언어인 명칭nāma과 그것의 지시대상인 색rūpa의 결합을 의미한다. 그렇게 해석하면 앞에서 본 식과 명색의 상호의존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언어적 분별에 의한 인식주체 형성의 과정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기무라는 식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경에는 이것을 ‘아는 까닭에 식이라 칭한다’라고 설하고 있지만, 아마도 이 ‘안다’는 것은 구별하여 아는 것, 즉 이것은 적색이지 백색이 아니다. 이것은 쓴 맛이지 단 맛이 아니다. 이것은 고苦이지 락樂이 아니라고 판단하여 아는 뜻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인용부의 원어 및 원어의 어의해설은 할애했다. 「사실적 세계관」 제3장 「심리론」 4절)

 

  현재 『대연방편경』에는 언어표상과 윤회의 연속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12지 연기 중 식(식별작용)과 명색(명칭과 형태)의 인과성에 대해 붓다와 제자 아난다와의 문답을 보기로 한다. 

 

“그런데 명칭과 형태를 성립조건으로서 식별작용이 있다고 이와 같이 [나는] 말했다. 아난다여! 이 명칭과 형태를 성립조건으로서 식별작용이 있다고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 의해서도 이해해야만 한다. 아난다여, 식별작용이 명칭과 형태에 있어서 그 기반을 갖지 못한다면, 대체 미래에 태어나는 것, 늙는 것, 죽는 것 즉 고의 집기 · 생성을 [사람이] 인지할 수 있겠는가.”  

“아닙니다. 스승이여! 그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아난다여! 이 경우 식별작용에 있어 명칭과 형태 이것이야 말로 원인原因이고, 이것이 기원起源이며, 이것이 기인起因이고, 이것이 성립조건成立條件이다. 아난다여! 태어나고, 늙고, 죽고, [다른 생으로] 옮겨가고, 다시 태어나려고 하는 한, 이름을 붙일 수 있는 한, 말을 해명하는 길이 있는 한, 표시를 할 수 있는 한, 지혜의 영역이 있는 한, [반드시 그것은 있는 것이다] 즉 명칭과 형태가 식별작용과 함께 있다.”(「생성의 유래에 대한 큰 경 ― 대연방편경」 『原始佛典第2卷 長部經典 II』, 春秋社)

 

  팔리어의 원문으로도 해석이 어려운 경이지만, 적어도 ‘이름을 붙일 수 있는’이라든가 ‘말을 해명하는 길’, ‘표시를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언어표현에 관한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즉 언어에 의해 인식주체는 형성되고, 인식주체의 형성에 의해 3세 즉 윤회세계가 전개한다. 『대연방편경』의 붓다는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무명을 ‘생의 맹목적 긍정[맹목의지盲目意志]’이라고 하는 기무라의 해석은 이런 의미에서는 올바르다(「연기관의 전개」하, 3절). 문제는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기무라가 이 무명에 어떤 류의 ‘포지티브한 주체성’, 우이의 말을 빌린다면, ‘세계 또는 인생의 창조발전의 근본원리’(「인연의 해석」)와 같은 것을 찾으려고 하는 점이다.

 

  와츠지에 의한 우이 비판     

 

[p.142-5] 그러면 와츠지 테츠로는 12지연기의 근원인 무명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일반적으로 우이와 동일하게 주지주의적인 해석으로부터 무명=무지설에 의거하고, 동시에 12지연기를 상호의존적, 상호규정적인 관계로 보는 해석을 채택했다고 하고 있지만, 그것들은 과연 정당한가. 와츠지는 후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와츠지

 

 

“(우이의 학설은) 식, 명색 등의 관계를 중시하고, 12연기를 논리적으로 해석한다고 하는 문제보다도 오히려 모든 형태의 연기계열에 통용하는 근본취의의 탐색을 문제의 중심으로 삼은 점에 있어서, 연기설의 연구를 한층 넓은 범위에서 보다 깊게 다루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 해도 우리들은 가령 이 근본취의를 인정한다 해도, 갖가지 형태의 연기계열이 세워질 때 그것이 일체의 것의 상의相依를 나타낸다고 하는 사유동기에 의해서만 생각되는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씨의 소위 ‘관념 방식의 순서’는 이 순서에 있어서 인정되는 상의성相依性 그 자체와는 구별되지 않으면 안 된다. 상의성 그 자체는 이 순서가 반대라고 해도, 또 순서가 다르다고 해도 동일하게 인정될 수 있다. 그러나 관념의 순서 자체는 내적 필연성을 가지고, 불가결한 조건의 추궁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인연의 계열이 다른 것은 조건추궁의 방식이 다른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그 추궁 방식의 차이는 각각 다른 사상적 입장을 나타낸다고 보지 않으면 안 된다.”(「실천철학」 「제2장 연기설 제1절」) 

 

  나아가 같은 「실천철학」의 제2장 6절의 주에서 이렇게도 말하고 있다.

 

“우이씨. 『인도철학연구 제2』 p.330. ‘반야경, 용수불교의 일체개공설一切皆空說은 연기설을 다른 말로 나타낸 것에 다름 아니다’ 우이씨는 연기설의 근본취의를 상의관계로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이렇게 결론을 짓지만, 12연기의 계열 그 자체에 의의를 인정한다고 한다면, 연기설은 아직 거기까지 철저하지 않다고 인정해야 할 것이라 생각된다.”(和辻 前揭書)

 

  와츠지에 의하면 갖가지 연기계열은 각각 독자의 사유동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것들의 ‘관념방식의 순서’는 각각 ‘내적 필연성을 가지고 불가결한 조건의 추궁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12지연기에 대하여, 그 의미를 상의관계로 인정하는 것은 너무 앞서 가는 것이라고 우이설을 분명히 비판하고 있다. 

  한편 우이는 와츠지의 비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당황하면서도 대체로 얼버무리는 듯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씨가 지적한 나의 결점에 대하여 언제라도 감사하며 읽고 있지만, 단지 유감스럽게도 나의 소양과 능력의 부족으로 인해 씨의 뛰어난 사색과 이해를 따라 갈 수 없어 그렇기에 완전히 그 진의를 파악할 수 없는 걱정의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다”(「아함연구의 다음에」 『印度哲學硏究 第4』, 岩波書店)

 

  제1차 연기논쟁에 관해서는 야마오리 테츠오山折哲雄를 비롯해, 기무라를 공동의 상대로 하면서 와츠지와 우이를 같은 진영에 놓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다. 예를 들면 스에키 후미히코末木文美士는 이렇게 해설하고 있다. 

 

“기무라는 비교적 전통적인 해석을 중시하고, 연기의 시간적 인과성을 강조한 것에 대하여, 우이는 그것을 비판하여 연기를 일관하여 논리적 상의관계로서 해석하려고 하였다. 와츠지는 우이설에 편을 들어 엄격한 기무라 비판을 전개했다. 기무라의 급서라는 우연한 사정도 있어, 그 후 일본의 원시불교 해석은 우이설을 전개시키는 방향으로 전개했다. 와츠지의 설은 우이설을 보다 더 가다듬는 형태로 영향력을 가졌다.”(「와츠지 테츠로의 원시불교론」 『近代日本と佛敎-近代日本の思想·再考 II』, トランスビュー) 

 

  와츠지가 우이설을 어느 것을 ‘가다듬었’다고 하는 것일까. 만약 우이의 ‘논리적 상의관계’의 연기설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앞서 본 와츠지의 우이 비판을 보면 분명하듯이, 그것은 있을 수 없다. 또 전장에서도 확인했듯이, 적어도 「사실적 세계관」의 기무라는 ‘연기의 시간적 인과성’에 오히려 부정적이다.

  이러한 구도설정의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기무라의 「연기관의 전개」에 있어서의 정리에 다다른다. 야마오리 테츠오는 “와츠지의 연구는 우이의 ‘논리주의적 해석’을 이어받아, 그 논리주의적 해석을 한층 논리화하고 인식론화하여 소위 칸트의 범주론에 가까운 곳까지 나아간 것”이라고 기무라의 정리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말라빠진 불타」, 『近代日本人の宗敎意識』所收, 岩波現代文庫). 하지만 그것은 오독이었던 것이 아닌가.

 

무명, 무지, 자연적 입장     

 

[p.145-7] 그러면 와츠지의 무명관을 보기로 하자. 먼저 위와 동일하게 무명을 ‘알지 못하는 것=무지’라고 파악한다. 

 

“그러면 무명은 무엇을 모르는 것인가. 경전은 5온 혹은 6입처의 무상을 모르는 것 혹은 5온 및 그 집멸미환리(集滅味患離혹은 集滅道)를 모르는 것, 4제를 모르는 것, 혹은 더 나아가 상세하게 전제후제, 내외, 업보, 불법승, 4제, 인연, 선불선, 죄습罪習, 승렬勝劣, 염정染淨을 알지 못하는 것 등이라 설하지만, 한 마디로 말하면, ‘부지성법不知聖法’이다.”(「실천철학」「제2장연기설 제6절」) 

 

 부지성법, 즉 성법, 붓다의 지혜를 모르는 것이 무명인 것이다. “성법을 모른다는 것은 일체법에 대하여 불여실지不如實知인 것, 즉 범부의 입장, 자연적 입장에 서는 것에 다름 아니다.”(和辻 前揭書) ‘일체법’이란 일체 존재, ‘불여실지’란 그 진실된 모습을 모른다는 것이다. 요컨대 붓다가 파악하고 설한 사물존립의 실상, 즉 사물이 가상假象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진상을 완전히 알지 못하는 것, 이것을 와츠지는 ‘자연적 입장’이라 부른다. 이것은 현상학의 술어를 사용한 그의 독자적인 표현으로 주의할 필요가 있다.

 

  앞에서도 논했듯이 우리들은 본능에 의해 움직이고, 언어에 의해 이끌리며, 의지와 사념을 형성하며, 행위한다. ‘좋은 것을 좋아하고’, ‘바라는 것을 손에 넣는’ 것은 자연적인 행위이고, 물론 ‘자기를 사랑하는’ 것도 자연적인 의향이다. 불교는 그 자연성을 즉 실감적實感的 자명성自明性을 비판하는 것이다. 그것들이 고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불교를 반직각적反直覺的 ‘counterintuitive’ 또는 반실각적인 것이라 하는 것은 이상의 이유에 의한다. 반복하지만, 유쾌한 것을 기분 좋게 느끼고, 귀여운 것을 사랑하며, 추악한 것을 혐오하며, 불안과 고통을 멀리 하려고 하는, 없애기 어려운 직각과 실감이야말로 근본적인 번뇌이고, 우리들을 미혹의 생에 묶어 놓는 집착의 근원인 것이다. 이러한 자연적 입장은 허망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이 허망인 것을 모르는 것이 곧 무명인 것이다. 이러한 불교의 기본에 대하여, 와츠지는 아비달마불교의 개념을 사용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본래 부지不知가 부지로서 알려지는 것은 행에 의해 성립하는 유위의 세계에 대하여 무위를 인식하는 보다 높은 입장, 달리 말하면 ‘법에 근거하여 존재하는 세계’를 벗어나 그 법 자신을 관하는 ‘명’ 혹은 ‘반야’의 입장에 서는 까닭이다.”(前揭書)

 

  이것은 자기를 포함하는 전존재를 존재하게 하는 법을 관하는 메타레벨에 선다는 의미이다. 전현상은 법이라는 형식에 의해 한정됨과 동시에, 존재기제로서의 법 그 자체에 의해 존재한다. “존재자는 요별(了別)되어짐에 의해 비로서 존재자로서 존재한다. 즉 요별이라는 형식에 의해 존재자가 성립한다.”(「제1편 제1장 무아의 입장」 『佛敎倫理思想史』 『和辻哲郞全集 第19卷』 所收, 岩波書店)

 

  더욱이 그 존재기제로서 법의 영역과 속성을 한정하는 법이 있다. 앞에서 서술한 사이구사 미츠요시三枝充悳의 말을 빌린다면 ‘법’(존재의 법, 색수상행식의 5법)과 ‘법의 법’(존재의 법을 확정하는 법, 무상고무아의 법)과의 관계이다. 그런 까닭에 와츠지는 앞의 인용문에 이어서 “따라서 무명을 연으로 한다는 것은 명에 대하여 무명의 영역을 한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한정이 행의 연인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와츠지의 ‘2층의 법’     

 

[p.147-15] 제1장의 전반에서 ‘연기법송緣起法頌’에 대하여 설명했다. 최초기 붓다의 제자 앗사지가 붓다 가르침의 핵심을 게송(시)으로 읊은 것으로, 이교도이었던 사리풋타(舍利弗)와 목갈라나(目連)가 그것을 듣고 귀의를 결심한 계기가 된 내용이다. 그 시구는 다음과 같다. 

 

“제법은 원인으로부터 생긴다. 여래는 그것들의 원인을 설한다. 또 그것들의 소멸도. 위대한 사문沙門은 이와 같이 설한다.”

 

  나카무라 하지메는 앗사지에 대하여 “초기의 대다수 불교자와 같이 무상을 직관적으로 인상지워 설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더욱 깊이 고찰하여, 사물간의 인과관계를 강조하려고 한 것이다”라고 평하고 있다.(「제6편 사상체계화의 길 제3장 연기설의 성립」 『中村元選集[決定版] 第16卷/原始佛敎の思想II 原始佛敎VI』, 춘추사)

 

  ‘연기법송’에서 말하는 ‘제법’이란, 말할 것도 없이 갖가지 존재하는 사상事象의 법을 말한다. 그러면 “제법은 원인으로부터 생긴다”라고 하는 연기의 법은, 그 언급대상인 ‘제법’과 동질적인 것인가 아니면 이질적인 것인가.

 

  와츠지 테츠로는 동일한 법이라도 ‘존재의 법’과 ‘그 존재의 속성, 성질을 규정하는 것으로 법의 영역을 확정하는 법’과는 카테고리가 다르다고 생각했다. 전자의 법, 와츠지가 말하는 ‘색수상행식의 5법’은 시간적으로 변이하는 무상한 존재(자)에 대한 초월항超越項으로, 이것은 무상하지 않다. 한정되고 존재하는 대상으로서의 색, 수, 상, 행, 식은 <니카야>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바와 같이 무상이며, 가상이지만, 그것들을 한정하고, 존재하게 하는 ‘법’, 현상의 형식은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더욱이 후자의 ‘법의 법’, 와츠지가 말하는 ‘무상고무아의 법’은 그 존재(자)와 ‘법’을 구별하는 것으로, ‘법’의 영역을 확정하는 나아가 상위등급의 초월항이다. 물론 이것도 변이하지 않고, 무상한 것이 아니다. 존재(자)로서의 5온 각각만이 무상인 것이다.

 

“그러면 존재하는 것의 법으로서 색수상행식의 5법과 무상고무아의 법과는 어떠한 관계인가. 후자는 존재가 어떠한 경우에도 시간적 변이인 것을 나타내며 따라서 존재자와 법의 구별을 확립했다. 전자는 이러한 존재자의 존재의 법을 세운 것이다. 여기에 우리들은 이미 2층의 법을, 즉 존재자와 법을 구별하는 법과, 이러한 존재자 자신의 존재의 법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들은 “색은 무상하다”라는 명제 속에 이미 이 양자가 포함되어 있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실천철학」 제1장 근본적 입장 제3절」)

 

  와츠지는 2종의 법을 인정하고, 거기에 ‘2층’을 발견했다고 하지만, 양자가 어떠한 계층성을 이루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실천철학」의 기술에서는 반드시 확연하지 않다. 

 

  논리적으로 구별해 보면, ‘존재의 법’과 ‘존재와, 존재의 법을 구별하는 법’과는 논리의 계층형태가 다를 것이다. 계층형태를 달리하지 않는다면 두개의 법은 모순된다. 전자는 존재(자)를 대상 레벨로 하는 것이지만, 후자는 그 존재(자)와 ‘존재의 법’을 구별하는 것으로, ‘존재의 법’의 영역을 확정하는 법이다. 즉 ‘존재의 법’을 대상레벨로 하는 법이다. 그런 까닭에 후자는 ‘존재의 법’에 대하여 한 단계 위의 레벨에 있는 ‘법의 법’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와츠지는 ‘2층’을 오히려 관점[관취觀取]의 단계로 보고 있고, ‘존재와 존재의 법을 구별하는 법’을 ‘존재의 법’의 기초 내지는 전제로 삼고 있다.

 

“무상, 고, 무아의 법에 의해 ‘존재하는 것’의 영역이 ‘법’의 영역과 구별되고, 나아가 그 존재하는 것의 ‘법’으로서 5온이 세워진다고 할 때, 우리들은 그것에 의해 경장이 단지 5온만을 존재하는 것의 법으로서 설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실천철학」 제1장 근본적 입장 제4절)

  

  5온(색수상행식) 뿐만 아니라 6근(안이비설신의), 6경(색성향미촉법)으로부터 연기설까지, 현상학적 용어를 사용하면서 ‘2층의 법’의 틀 속으로 회수해 버린다.

  

“색수상행식 혹은 안이비설신의가 무상, 고, 무아인 것을 여실히yathābhūtam 관찰한다는 것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일체 존재자의 존재가 무상, 고, 무아인 것과 그 일체 존재하는 것의 법이 색수상행식 혹은 안이비설신의인 것의 2층의 법을, 있는 그대로, 현실에 즉하여, 어떠한 독단적인 예상을 미리 설정하는 일 없이, 인식한다고 하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소박실재론 및 형이상학의 편견을 버리고 무아의 입장을 취하며, 실천적 현실을 그대로 현실로서 받아들이며, 그 실천적인 현실 자체 내에 현실 성립의 근거인 법을 보는 것 ― 좀 더 달리 말하면, 자연적 입장을 차단하고 본질직관의 입장에 서서 실천적 현실의 여실상을 보는 것, 이것이 진실의 인식이다.”(「실천철학」 제1장 근본적 입장 제8절)

 

  어떻든 존재(자)에 대하여 보다 높은 차원에 있는 법은, 와츠지에 있어서는 존재하는 것이 아닌 따라서 무상하지 않은 것이다. 「실천철학」 출간에 앞선 강의노트인 『불교윤리사상사』에는 이 법의 영역의 확립이야말로 초기불교의 ‘최대의 공적’이라고 명기되어 있다. “이 무상, 고, 무아는 존재자에 대하여 타당한 법으로, 그 자체는 시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가령 존재자가 무상이라는 것 자체는 무상이 아니다. 초시간적으로 타당하다”(「제1편 제1장 무아의 입장」 『和辻哲郞全集 第19卷』所收, 岩波書店)

  필자로서 나는 여기에서 그가 메타레벨의 법을 실체로서 간주하는 과오에 빠졌다고 생각한다. 이것에 대해서는 최종 장에서 다시 논하기로 한다. 

 

  ‘한정한다’의 의미    

 

 [p.151-15] 어쨌든 와츠지가 말하는 “‘명明’ 혹은 ‘반야’의 입장에 선다”는 것은 세속의 대상 레벨의 실재성을 초출하여, 나아가 제법도 대상으로서 현관現觀할 수 있는 메타레벨을 획득한다는 것이다. 인용문 중의 ‘보다 높은 차원의 입장’이라는 것은 통상의 가치관에 있어서 ‘높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기인식과 존립규칙도 포함하는 전 영역을 대상화 할 수 있는 레벨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무명을 연으로 한다는 것은, 명에 대하여 무명의 영역을 한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한정이 행의 연인 것이다. 행은 존재의 법에 있어서 구극의 통일원리이지만, 그 통일하는 영역은 필경 한정된 영역에 지나지 않는다.”(「실천철학」 제2장 연기설 제6절) 

 

  이 인용문 가운데 ‘한정한다’ ‘한정’이라는 어구에는 주의를 요한다. 와츠지는 이렇게 쓰고 있다. “가령 빨강을 보는 것은 빨강이 그 자신를 푸름이나 노랑과 구별하는 것으로, 구별하는 것은 행이 자기를 한정하는 것이다.”(和辻 前揭書) 여기에서 ‘한정’은 분절과 같은 말로, 시차성(示差性)에 있어 즉 타자와 차이에 있어 대상을 인식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면 사상을 ‘한정한다’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불교윤리사상사』에서는 식이라고 하고 있다. 식이 요별하고, 구별하고, 한정하는 것이다.

 

“눈앞의 장미꽃이 장미꽃으로서 다른 꽃이나 잎사귀와 구별되는 것 ― 이 구별이 없으면 장미꽃은 존립할 수 없다 ― 에 착안해 말하면, 이 장미꽃은 구별되어 있는 것이다. 요별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일반적인 현상의 사물은 요별되어 있는 한에 있어서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요별 일반 즉 식을 근거로 하지 않는 사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경우에도 개개로 구별되어 있는 것은 식의 자기한정으로 간주된다.”(「제1편 제1장」 『和辻哲郞全集 第19卷』所收, 岩波書店)

 

  사상일반의 요별(구별), 한정이 오로지 식의 작용으로 보는 것은 옳다. 예를 들면 색이란 자연과학의 용어로 말하면, 전자파 속에서 인간의 안근이 파악할 수 있는 가시광선을 분별한 명칭이다. 가시광선은 ‘자주색’으로 감수되는 파장이 짧은 것으로부터 ‘빨강’으로 감수되는 파장이 긴 것까지 연속적인 색의 스펙트럼으로 이루어진다. 이 연속체를 말[명名]로서 임의로 구별한 것이 ‘녹색’이라든가 ‘짙은 푸른색’, ‘우유빛색’이라고 하는 우리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색이다. 색은 말에 지나지 않는다. ‘코발트 블루’, ‘프러시안 블루’나 ‘남색’ 등에 자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른 것과의 차이에 있어 가설된 명칭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이러한 자연과학적, 색채광학적인 인식도 또 분별의 하나인 것은 틀림없다. 실제로는 예를 들면 ‘피부색’이나 ‘신호기의 청색’과 같은 명칭과 지시대상의 관계가 안정되지 않은 애매한 색이 순간적인 객관성의 허구를 폭로해 버린다. 그와 같이 무수한 방식에 의한 분별이 있어 결정할 수 없다는 사태 그 자체가 색의 비실체성을 말하고 있다.

 

  행 즉 갖가지 형성작용은 무명=무지를 연으로 분절된다. 세속은, 범부가 아닌 부처가 메타레벨에 오르게 됨으로서 비로서 하위의 레벨로서 대상화된다. 자연적 입장을 세속의 영역에 한정된 진실(세속제)의 입장이라고 달관할 수 있는 것은 지혜가 ‘명’, ‘반야’라고 하는 메타레벨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한정된 영역은 그것이 한정된 것으로 인식되어졌을 때 소멸한다. ‘무엇에 의해 무명이 있는가’라고 묻기 위해서는 무명이 인식되지 않으면 안되고, 그 인식은 명의 입장에서 가능한 까닭에 인식되어졌을 때는 이미 더 이상 무명이 아니다.”(和辻 前揭書)

 

  아무래도 궤변과 같이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화츠지의 행론은 가끔씩 단락적으로 이해되는 결함이 나타나며, 이 설명도 그 전형이다. 그는 “명이란 무명을 찾아내는 것인 동시에 무명을 소멸하는 것이다.”라고 명쾌하게 쓰고 있다.(「제2편 제1장 제1절 세속제와 제일의제」  『佛敎倫理思想史』 『和辻哲郞全集 第19卷』所收, 岩波書店)

 

  ‘무명을 찾아내는’ 것과 ‘무명을 소멸하는’ 것은 확실히 ‘명’의 속성이지만, 반드시 ‘동시에’ 일어나는 사상은 아니다. ‘찾아내는’ 것은 시작에 지나지 않고, 불교의 용어로 말하면, ‘발심發心’에 해당하는 경우도 있다. 거기에서 수행이 시작되어 ‘그것이 실로 무명에 다름 아닌 것’을 심신 상 철저하게 정착시킴으로서 비로서 ‘무명을 소멸할’ 수 있는 것이다. 앞서의 예시에 빗대어 보면, 빨강이라는 색이 적극적인 실체가 아니라 즉 ‘자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 다른 색 즉 파랑색, 노랑색 등과의 차이에 있어서 존재한다고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어도 빨강의 자성, ‘빨강색은 있다’라는 느낌이 곧바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와츠지는 그 중요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가르주나를 인용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반야는 세속제에 있어서 ‘법’을 찾아내지만, 그러나 그것만으로 법을 소멸하는 것은 아니다. 열반(멸)의 영역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법의 인식(반야)이 극한을 초월하는 것(바라밀)이 요구된다.”(和辻 前揭書)

 

  하지만 와츠지는 ‘찾아내는’ 것과 ‘소멸하는’ 것 사이의 간격에 대해 충분히 설명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불교관은 주지주의적이고, 논리편중이며, 수행을 등한히 하고, 체감을 무시한다고 하는 등의 오해가 지금도 따라다니고 있다. 마츠오 노부아키松尾宣昭는, 와츠지가 “아가 있다고 헤아리는 범부에게만 고가 있다.”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 “와츠지가 충분히 말하고 있지 않는 것은 앞의 ‘헤아리는’ 것의 성격, 그것의 뿌리 깊음이다.”라고 비판하고 있으며(「‘윤회전생’고(1)」 『龍谷大學論集』 第469号), 이것은 정곡을 찌르고 있다. 

 

범부의 아, 범부의 고    

 

 [156-3] 하지만 그것이 ‘충분한지’ 어떤지는 차치하고, 와츠지가 그 ‘뿌리깊음’을 문제로서 의식하고 있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어떤 범부가 교리연찬을 거듭하고, 수행을 쌓고, 무지를 완전히 불식시켰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더 이상 범부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와 무지란 근대적인 지성과 지식과는 전혀 다르다. 따라서 와츠지는 『불교윤리사상사』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범부의 입장에서는 행의 자기 한정이 현상의 세계를 전개하며, 부처의 입장에서는 행이 그 자신에게 돌아가는 즉 부정Negation으로서 멸의 세계, 무위의 세계를 전개한다.”, “이 부정의 이해는 그것을 체득體得함으로써 비로소 얻어지는 것으로, 여기에 불교철학이 특히 실천철학으로서 특징 지워지는 이유가 존재한다. 우리가 여기에서 시도하고 있는 philosophieren은, 불교의 용어를 빌린다면, 지혜의 입장에 서는 것에 다름 아니지만, 그러나 그 지혜의 입장이 곧바로 멸이 되어 실현되기 위해서는 단순히 인식이 아니라 체현體現되지 않으면 안 된다.”(「제1편 제2장 연기설」 『和辻哲郞全集 第19卷』所收, 岩波書店) 

 

  글 속의 philosophieren필로조피렌이라는 독일어는 ‘철학적으로 사유하다’ 정도의 의미이다. 와츠지는 여기에서 철학적 사색에 근거한 인식으로는 멸의 세계를 통달할 수 없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지혜의 입장이 멸이 되어 실현되는 것은 단순한 인식만으로는 불충분하고, ‘체득’‘체현’을 필수로 한다. 그는 그렇게 단정하고 있다. 그런 까닭에 “원시불교에 있어서 연기관을 먼저 인간에 있어 인식의 고정적 지평으로 돌려서 해석하려고 한다.”(山折哲雄 「말라빠진 불타」 『近代日本人의 宗敎意識』所收, 岩波現代文庫)는 등으로, 와츠지의 연기론을 근대의 논리주의나 주지주의로 과도하게 치우쳐 이해하려는 논평은 와츠지의 의도를 완전히 벗어난 것이다.

 

  또 종교학자 게타 마사코氣多雅子에 의한 “와츠지 사고방식의 근본적 문제점은 붓다의 지(지혜)에 있어 선정의 의의를 인정하지 않는데 있다.”든가 “수행의 중요성을 등한시했다”라는 논평도 올바르다고는 할 수 없다.(氣多 「불교를 사상으로서 추구하는 것 ― 와츠지 테츠로의 원시불교연구를 중심으로」 實存思想協會編, 『思想としての佛敎 實存思想論集 XXVI』, 理想社)

  와츠지는 앞서 인용한 『불교윤리사상사』에서 이렇게도 말하고 있다.

 

“‘무명이 멸하면 행이 멸한다’라고 알려졌을 때, 무명은 곧바로 지양될 것인가. 관념적으로는 그렇지만, 그러나 우리들이 무아, 연기를 안다고 생각할 때, 그것이 진정 알려져 파착(把捉 begreifen 구체적인 실현)되는 즉 체현된다고는 말할 수 없다. 가령 ‘아’가 본질이 없는 것이라고 진정 알려졌다고 한다면, 이기주의의 입장은 지양되겠지만, 무아의 고찰은 반드시 아집의 탈각을 동반하지는 않는다. 단지 추상적으로 무아를 생각하며, 진실로는 아를 실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경우도 극히 많다.”(방선 인용자, 「제1편 제3장 도덕의 근거」 『和辻哲郞全集 第19卷』所收, 岩波書店)

  

  와츠지 논고의 동일한 부분을 인용하면서 이 점에 주목한 것이, 티베트불교의 입장에서 와츠지의 불교연구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있는 요시무라 히토시吉村均이다. “근대적이라고 평가되는 점이 많은 와츠지의 불교 이해에 있어 아함경전이나 아비달마에 대한 이해방식에는 상상 이상으로 나가르주나와 공통점이 많다.”고 지적하고 있다. 

 

“와츠지는, 불교가 고라고 파악해 거기에서 해방을 목표로 한 것은, 락수樂受에 대한 고수苦受가 아니라, 이와 같은 ‘자연적 입장’이라고 하고 있다(全集19, 140項). 대상을 가치를 띤 것으로서 실체적으로 파악하는 것을 고통의 진정한 원인이라고 하는 것은, 인도로부터 티베트에 전해진 전통적 불교이해와 기본적으로 일치하며, 나가르주나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와츠지 테츠로와 나가르주나 ― 인도·티베트 전통적 이해와의 대비 ―」, 『比較思想硏究』 第41号)

 

  그래서 요시무라는 『60송여리론』의 제24게송을 인용한다.

 

“어리석은 자[이생異生]는 존재에 불변의 실체[아我]를 생각하여 있다든가 없다든가에 빠지는 잘못으로 인해 번뇌에 지배되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에 의해 스스로 속는다”(瓜生津隆眞譯, 『大乘佛典14 龍樹論集』, 中公文庫)

 

  와츠지의 자연적 입장이란, ‘이 나’가 실체로서 존재하고, 실체로서의 ‘이 세계’에 직접적으로 대면하고 있다고 하는 믿음에 서있는 것이다. 그 입장에는 미추美醜, 쾌고快苦, 선악善惡과 같은 가치판단도 동반한다. 

 

“그 속에서 나는 인식하고 느끼며 의욕하고 현실적인 세계를 살아간다. 이 나에 대하여 밖에 다른 많은 아가 있어 같은 세계 속에서 대체로 동일한 생활을 하고 있다. 이것이 범부의 입장에 있어서의 현실이다.”(「제1편 제1장」 『佛敎倫理思想史』 『和辻哲郞全集 第19卷』所收, 岩波書店)

 

  하지만 이 ‘현실’에 빠져 그것을 의심하지 않는 ‘자신의 마음’에 의해 속는 것이 범부의 고통인 것이다. “전통적 이해에 있어 수행이 불가결하다는 것은, 이 ‘자연적 입장’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실제로 자신의 이해방식을 바꾸어 갈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吉村 前揭論文) 와츠지와 나가르주나와의 무명해석, 불교이해의 공통성을 보았지만, 그러면 초기불교의 법통을 잇는 테라바다 불교와의 관계성은 어떠한지 다음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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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승
일본 고마자와대학 박사, 전 한국불교연구원 원장, 일본 인도학불교학회 이사, 인도철학회 편집이사, <실담자기초와 망월사본 진언집 연구>(공저, 글익는들, 2004)), <을유불교산책>(정우서적, 2006), <산타라크쉬타의 중관사앙>(불교시대사, 2012) 등 다수의 저서와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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