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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기무라 vs. 우이·와츠지의 제1차 연기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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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승  /  2019 년 6 월 [통권 제74호]  /     /  작성일20-05-29 11:34  /   조회5,308회  /   댓글0건

본문

이태승 | 위덕대 불교문화학과 교수 

 

번역에 즈음하여

 

본 번역은 미야자키 데츠야宮崎哲弥의 『불교논쟁佛敎論爭―‘연기’에서 본질을 묻는다(緣起から本質を問う)』(ちくま新書[1326], 筑摩書房, 2018.5)의 내용 일부를 옮긴 것이다. 이 『불교논쟁』은 제2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한 전전戰前과 전후戰後 일본 사회 속에서 이루어진 불교논쟁 특히 연기의 개념을 둘러싸고 이루어진 논쟁에 초점을 맞추어 그 전개와 의미 등을 상세히 고찰한 책이다. 이 책은 전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장 : 연기라는 미궁 

제2장 : 피상적인 논쟁이해 ― 제1차 연기논쟁의 해부(상) 

제3장 : 진정한 대립 점으로 ― 제1차 연기논쟁의 해부(하) 

제4장 : 불교학자들의 싸움 ― 제2차 연기논쟁의 심층 

제5장 : 생명주의와 포스트모던 ― 불교의 일본근대와 그 후 

 

전 5장의 구성에서도 알 수 있듯 본서는 일본 근대 불교학의 전개와 관련해 불교의 핵심개념인 ‘연기’와 관련된 두 차례의 논쟁에 대한 상세한 검토가 주된 내용을 이루고 있다. 제1차 연기논쟁은 1920년대에, 제2차 연기논쟁은 1970년대 후반에 이루어진 것으로, 연기에 대한 이해를 둘러싸고 다양한 논전이 전개된 구체적인 실상을 밝힌 것이다. 제1차 연기논쟁에서 등장하는 학자는 기무라 다이켄木村泰賢, 우이 하쿠주宇井伯壽, 와츠지 데츠로和辻哲郞, 아카누마 치젠赤沼智善이며, 제2차 연기논쟁에서는 사이구사 미츠요시三枝充悳, 후나하시 잇사이舟橋一哉, 미야지 가쿠에宮地廓慧 등이 서로 간에 논전을 전개하였다. 제1차 연기논쟁은 일본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제2차 연기논쟁도 불교계에 큰 자극을 주었다. 이러한 중요한 논쟁의 전개의 시말始末은 물론 그 논쟁이 갖는 학적인, 사회적인 의미를 면밀히 고찰한 것이 본서이다. 

 

 

우이 하쿠주宇井伯壽

 

 

‘연기緣起’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연하여 일어난다’, ‘조건에 의해 생겨난다’는 의미를 갖는 불교의 핵심적인 개념으로, 붓다가 정각을 이룬 구체적인 내용을 드러내고 있는 말이다. 특히 초기불교에서는 이 연기의 개념이 구체적으로 12개의 지분支分으로 이루어진 12지연기가 가장 온전한 연기계열로서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12지연기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 초기불교의 연기의 개념은 부파불교에 이르러 삼세양중의 연기로서 해석되어, 이 연기는 과거·현재·미래의 3세에 걸친 우리 인간의 구체적인 삶의 형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그리고 연기의 개념은 대승 불교에 이르러서도 나가르주나의 팔불八不로 설명되는 연기 이해에서와 같이 우리 삶을 설명하는 중요한 진리로서 간주되어 불교의 핵심 가르침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이렇게 불교의 전 역사를 관통하는 연기의 개념에 대해 일본의 근대불교학의 전통에서, 특히 초기불교의 12지연기설과 관련된 논전論戰이 전개되어 일본 사회를 뒤흔들어 놓은 것이 본서 『불교논쟁』에서 고찰하는 제1차 제2차 연기논쟁이다. 

 

이러한 중요한 불교논쟁의 의미가 담긴 본서에 대해 번역을 시도하는 것은 번역자 역시 특히 제1차 연기논쟁에 대한 추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번역자가 일본에 유학을 간 1988년 당시 갓 출간된 『계간불교季刊佛敎』 창간호(1987.10)에 실린 이 제1차 연기논쟁과 관련된 야마오리 데츠오山折哲雄의 글[말라빠진 ‘붓다’―근대불교 연구의 공죄를 물음(やせほそった ‘佛陀’―近代佛敎硏究の功罪を問う)]은 정말 재미있고 흥미로운 자극을 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실 일본에 유학을 가게 된 큰 계기가 기무라 다이켄, 우이 하쿠주와 같은 걸출한 학자들의 책을 접하게 된 것에 연유한 것으로, 이들의 삶과 생애에 궁금증을 가지고 있던 차에 『계간불교』에 실린 이들의 논쟁, 물론 여기에는 이 두 사람 외에 와츠지 데츠로가 등장하여, 마치 연기를 둘러싼 불교 삼국지가 전개되는 듯한 재미를 느낀 것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야마오리 선생이 쓴 글에 즐거움과 흥분의 기억을 잊을 수 없어 야마오리 선생의 글을 번역하고 그것을 『인도철학』 제5집(인도철학회, 1995)에 실었으니 실로 지금부터 24년 전의 일이지만, 지금도 그 번역된 내용을 보면 당시의 기분을 느낄 수가 있다. 이러한 번역자 나름의 추억을 간직한 연기논쟁에 대한 내용이 고스란히 담긴 것은 물론 보다 세밀하게 재 고찰되고 있는 것이 본서로서, 작년[2018년] 일본에 가서 예기치 않게 본서를 만났을 때 그 기쁨은 가히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던 기억이 떠오른다. 

 

 


 

 

본서의 저자인 미야자키 데츠야씨는 1962년생으로, 게이오대학 문학부 사회학과를 졸업한 저널리스트로 유명한 분이다. 번역자도 이전 미야자키씨의 저서 『지적유불론知的唯佛論―만화부터 지의 최전선까지―붓다의 사상을 현대에 묻는다』(吳智英과 공저)를 재미있게 읽은 기억을 가지고 있지만, 이러한 불교논쟁에도 깊은 관심과 주의를 가지고 있는 점에 새삼스럽게 저자를 돌아보게 되었다. 혹시나 앞으로 이 번역으로 인해 저자와의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기대하며, 가능한 한 정확하게 번역하는 것이 현재 주어진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고경』에 지면을 할애해 준 편집장 조병활 박사에게 감사와 고마움을 전한다. 조 박사와는 번역자의 저서 『을유불교산책』(정우서적, 2006) 출간과 관련해 이미 큰 인연이 있다. 중국에서 귀국한 그와 만나 즐거운 담소를 나누던 중 본서 이야기가 나왔고, 조 박사가 즉각 번역을 추천하고 요청했다. 책 내용을 알고 있는 번역자에게는 큰 기쁨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조금은 촉박한 시간이었지만 당장 번역에 임하게 되었다. 앞으로 한국불교계를 함께 걱정해갈 중요한 도반으로 서로에게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본서의 번역은 본서 「제2장 피상적인 논쟁이해 ―제1차 연기논쟁의 해부(상)」의 번역이다. 제1장의 내용은 연기논쟁에 들어가기 위한 서론의 내용으로 미야자키씨의 연기관이 나타나고 있다. 제2장부터 본격 불교논쟁의 구체적인 내용이 등장하고 있어 제2장부터 번역을 하였다. 일본 불교학계의 중요한 논전論戰이었던 연기논쟁이 우리니라 불교학계는 물론 불교에 관심을 가진 분들에게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번역에 임한다. 

 

제1차 연기논쟁의 해부(상) [1]

 

와츠지 데츠로의 참전


[p.74-1. 『불교논쟁』의 페이지 및 행수, 이하 동일] 본장부터는 1920년경부터 1930년까지 대략 10년에 걸쳐서 이름이 널리 알려진 네 사람의 학자, 기무라 다이켄木村泰賢, 우이 하쿠주宇井伯壽, 아카누마 치젠赤沼智善, 와츠지 데츠로和辻哲郞가 필봉을 교환한 연기설을 둘러싼 논쟁을 개관 평설하기로 한다. 연호로 말하면 다이쇼大正 말기로부터 쇼와昭和 초기에 걸쳐 일어난 소위 ‘전전戰前의 논쟁’이다. 학자라 해도 불교학자 뿐만 아니라 와츠지 데츠로와 같은 당시 최첨단의 서양철학, 예를 들면 현상학 등을 완전히 이해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면서 윤리학적, 문화사적인 관심으로부터 불교연구에 뛰어든 인물도 가담했다. 와츠지 데츠로는 『고사순례古寺巡禮』나 『일본정신사연구日本精神史硏究』에서도 그 이름을 날려, 젊어서 두각을 나타낸 올라운더로서 일반인들에게도 인지된 인물로서, 그 영향권은 학계에 국한되지 않고, 문단이나 예술계에도 미치고 있었다. 다니자키 준이치로谷崎潤一郞, 나츠메 소세키夏目漱石, 시가 나오야志賀直哉, 아베 지로阿部次郞 등의 화려한 인맥들이 받드는 지知의 슈퍼스타였다.

 

와츠지 데츠로和辻哲郞

 

와츠지는 1889년 희메지姬路 근교의 농촌 도호리촌砥堀村 니부노仁豊野에서 태어났다. 가업은 마을의사였다. 제일고등학교 졸업 후 도쿄제국대학 문과대학 철학과에 진학하고, 이노우에 데츠지로井上哲次郞의 지도를 받았지만, 이노우에와는 전혀 그 성향이 맞지 않았다. 또 다니자키 준이치로, 아시다 히토시芦田均 과 함께 동인지, 제2차 「신사조新思潮」에 참가, 문학에도 뜻을 펼쳤다. 이노우에와는 맞지 않았지만, 메이지정부의 ‘고용외국인’으로서 도쿄제국대학에서 서양의 철학과 고전학, 미학 등을 강의하고 있었던 라파엘 폰 괴벨에게 크게 감화를 받았다. 괴벨이 직접 읽을 수 있도록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를 제목으로 한 졸업논문을 일부러 영어로 쓴 것에서도 그 영향은 엿볼 수 있다. 그 다음해 1913년 와츠지는 『니체연구』를 완성한다. 약관 24세의 처녀작이었다.

논쟁의 중심이 된 책인 『원시불교의 실천철학』이 이와나미岩波서점으로부터 간행된 것은 그로부터 14년 후인 1927년이다. 이 사이에 와츠지는 『우상재흥偶像再興』과 『고사순례』 등 지금도 계속 읽혀지고 있는 문화적인 수상록을 출간하고, 앞에서도 말했듯 저술가, 능문가能文家로서 명성을 얻었다. 

 

『원시불교의 실천철학』은 와츠지가 교토제국대학 문학부 교수회에 제출한 학위청구논문이지만, 이 심사에는 이상할 정도로 오랜 시일이 걸렸다. 일설에 의하면, 산스크리트학자인 사카기 료사부로榊亮三郞이 박사학위 수여를 강하게 반대한 것이 지연의 원인이라고 한다. 그가 마침내 박사호를 취득한 것은 사카기의 퇴관 이후인 1932년이었다. 이 논문의 저자로서 와츠지의 참가는, 일상적으로는 조용하고 전문적일 수밖에 없는 불교교리 해석상의 논쟁을 일반적인 논평가들이나 독서계층의 사람들의 관심사로 끌어올렸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본서에서는 이 전전의 논쟁을 ‘제1차 연기논쟁’이라 부른다. 19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두에 걸쳐서 여러 사람들이 참가한 연기를 둘러싼 논쟁이 일어난다. 제4장에서 상세히 살펴보는 ‘제2차 연기논쟁’이다. 이 ‘전후戰後의 논쟁’은 오로지 불교학자들에 의해 주로 불교전문지를 무대로 논전이 오고갔고, 와츠지처럼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진 논객도 참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불교학계 내부의 논의에 머물렀다. 

 

편견의 장막


[p.76-5] 이제부터 제1차 연기논쟁의 내용을 음미해 가지만, 그 전에 이 논쟁에 관한 문제의 소재, 본서의 전반적인 입장을 기술해 둔다. 현재 제1차 논쟁을 언급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몇 가지 강한 예단豫斷을 가지고 텍스트를 보는 경향이 강하다. 예를 들면 자주 논쟁의 쟁점은 윤회설, 업설에 대한 시비를 둘러싼 대립이었다고 한다. 기무라, 아카누마가 전통설에 기초하여 윤회와 업보의 사상을 인정하고, 우이, 와츠지가 이것을 부정했다라는 도식이 마치 전제적 사실인 것같이 말해진다. 특히 와츠지에는 근대불교학으로부터 윤회와 업에 대한 고찰을 추방했다고 하는 ‘혐의’까지 덧씌우고 있다. 그의 원시불교론이 학계를 석권한 것을 계기로, 업보윤회사상을 경시하는 경향이 완전히 정착했다고 하는 것이다. 

 

혹은 앞에서도 조금 다루었듯이 12지연기의 지분 배열에 대하여, 우이와 와츠지는 그것이 비시간적인 논리적 인과관계를 나타내며, 나아가 상의상대相依相待의 관계 가능성도 시야에 넣는 것에 대하여, 기무라는 어디까지나 3세에 걸친 계시적 인과를 설한 것이라고 논점을 정리하기도 한다. 본서에서는 이러한 예단에 기초한 통설적 논쟁 구도를 모두 뒤엎는다. 그러한 오독의 잘못을 근본적으로 없앤 뒤, 논쟁의 당사자들이 의식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는 진정한 쟁점을 살펴본다. 더욱이 그에 앞서 당사자들도 의식하고 있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각각의 논의에 대한 한계도 드러낼 것이다. 편견이나 오류의 장막에 의해 진상이 덮여져 온 까닭인지, 종래 제1차 논쟁 전체에 대한 평가는 한결같지 않았다.

 

사이구사 미츠요시의 평가

 

예를 들면 사이구사 미츠요시三枝充悳는 제2차 연기논쟁의 단초가 된 「중외일보中外日報」의 논설에서, 제1차 논쟁은 “지금에 이르러 잘 생각해 보면, ‘그다지 의미가 없다’고 평가할 만하다.”라고 잘라 말한다(1978년 4월27일자). 그렇지만 『초기불교의 사상』에서는 원전에 기초한 연기설의 정밀한 연구의 공적은 “다이쇼 말기부터 쇼와 초기에 걸쳐서, 즉 1920~1940년대의 우이 하쿠주 박사에 돌려질 것이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이 시기 우이의 연구는 연기논쟁에 의해 촉발되어 자극을 받은 것에서 진척된 측면이 크다. 그래서 사이구사도 “거의 동시대의 와츠지 데츠로 또 아카누마 치젠, 기무라 다이켄 이외의 여러 사람들의 공헌도 놓칠 수 없다.”라고도 부기하고 있다. 이러한 평가의 요동은 대체 무엇인가.

 

 

이런 의문점을 풀어줄 실마리를 찾아보면, 실은 이 『초기불교의 사상』의 인용문은 1995년 초판의 제삼문명사 레구루스문고(하권)에서 채용한 것이다. 1978년 동양철학연구소에서 발간된 오리지날판의 해당부분에는 이 문장이 없다. 동양철학연구소판이 제2차 연기논쟁이 일어난 것과 거의 같은 시기에 출판되었다는 사정을 감안하면, 역시 ‘그다지 의미가 없다’라는 것이 사이구사의 당시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러면 왜 사이구사는 17년 후에 제1차 연기논쟁에 대한 평가를 바꾼 것일까. 이러한 태도의 변화는 어디에서 유래하는 것인가.

 

사이구사의 제2차 논쟁 시기의 평설의 근저에는 “‘연기’설을 초기불교사상의 중심에 두는” 학계의 추세와 일반적 사조에 대한 강열한 초조가 내면에 숨겨져 있다. 그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세밀한 문헌학적 입장에 근거한 사상사적 고찰이 빠져있고, 독단과 편견에 차있는 것으로, 절대 학설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더욱이 그 초조한 내면에 시대의 사조에 대한 사이구사의 위기감을 엿볼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제4장 이후 상세히 논하기로 한다. 

 

그렇다하더라도 사이구사의 “연기는 붓다 깨달음의 내용이 아니다.”라는 견해는 앞장에서 본 ‘12지 연기는 불교의 심수心髓’라고 하는 알보므레 스마나사라나 ‘연기를 계속 생각하는 사람이야 말로 붓다(눈뜬 사람)’이라고 설하는 마츠모토 시로의 견해와는 너무나도 선명한 대조가 되어, 오늘날에도 충분히 자극적이다. 

 

그 사이구사도 후에 일정의 성과를 인정하게 되는 제1차 연기논쟁은 기무라 다이켄의 12지연기의 성립을 둘러싼 논문에서 그 시작이 되고 있다. 이 논쟁극이 당사자에게 있어 비극이었는지 희극이었는지는 상관없이 제1막의 주역은 우이도 아니고, 와츠지 데츠로도 아니고, 하물며 아카누마 치젠도 아닌 바로 기무라였다. 따라서 본서에서는 그의 논고에 대한 평설로부터 시작하기로 한다.

 

제1차 연기논쟁의 효시

  

[p.79-8] 기무라 다이켄은 1881년 이와테岩手현 남이와테군 다키사와滝澤촌 잇본키一本木의 농가에서 태어났다. 그 지역의 조동종 사찰에서 득도하고, 조동종대학림(현 고마자와 대학)을 거쳐 도쿄제국대학 문과대학 인도철학과에 들어가 다카쿠스 준지로高楠順次郞에게 배웠다. 다카쿠스는 오기하라 운라이荻原雲來, 와타나베 가이쿄쿠渡辺海旭, 아네자키 마사하루姉崎正治 등과 함께 근현대 일본 불교학의 기초를 닦은 인물로, 「대정신수대장경」의 편찬과 「남전대장경」의 감수자로도 잘 알려졌다. 기무라는 이 대가에게 친히 배우고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다. 이 때 차석이었던 인물이 후에 논적이 되는 동문의 우이 하쿠주였다. 3년간 영국에 유학하고, 박사학위를 취득. 귀국 후인 1923년 도쿄제국대학 인도철학과 교수가 되었지만, 1930년 현직에 있던 상태에서 급서하였다. 향년 48세.

 

기무라는 박사학위논문 집필에 있어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가 쓴 논문의 용지는 가로쓰기의 편지용 종이이었다. 박사논문인 『아비달마의 연구』는 유럽 체재 중에 쓴 것으로, 그 논문의 용지가 서구 언어용 편지용 종이었지만 거기에 세로쓰기를 하였다고 전해진다. 기무라는 침대에 누워 글을 쓰는 것을 좋아했다고 하는 까닭에 주위의 환경이나 물건 등에 구애받지 않고 사고하거나 작업하는 타입이었던 것 같다. 

 

그 기무라가 다이쇼 10년 1921년에 저술한 것이 『원시불교사상론』이다. 이 방대한 책은 지금도 불교의 근본을 배우려고 하는 사람에게 귀중한 힌트를 샘솟게 하는 우물과 같은 책으로, 지금 본서가 평설의 주된 대상으로 삼는 것은 제1차 연기논쟁의 효시가 되는 「제2편 사실적 세계관(고집이제론)」(이하 「사실적 세계관」으로 약기)의 제5장 「특히 12연기론에 대하여」이다. 

 

기무라는 먼저 이 논고의 제1절 머리말에서 12연기를 “불교 교리상 극히 중요하며 동시에 난해하고”, “후대의 대승에 있어 중요한 교리 중에서도 이것을 출발점으로 전개한 것도 적지 않다.”라고 높게 평가하고 있다. 단지 12가지 지분의 생멸이 붓다가 성도했을 당시 이미 수미일관首尾一貫하게 정리되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신중하게 판정을 유보하기도 한다. 

 

이 지분의 계기繼起를 연기라고 이름붙인 것에 대해서는 “‘연이 되어 생기는 것’ 즉 첫째는 다른 것에 의존하여 존재하는 관계의 법칙이라는 뜻으로 이해해도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즉 12인연관은 노사가 생기기 위한 조건(연)을 차례로 열한 가지로 나열하고, 그것으로서 그 의존관계를 분명히 하려고 한 것이 마침내 연기라 이름 붙은 이유이다.”라고 한다.(「사실적 세계관」 제5장 1절, 『원시불교사상론』, 『木村泰賢全集』 제3권, 大法輪閣)

 

 

기무라 다이켄木村泰賢

 

 

그러나 이 연기관은 붓다의 완전한 창의적 견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기무라는 불교에 선행하는 인도사상의 전적, 리그베다의 「우주개벽의 찬가」나 「브리하드 아란야카 우파니샤드」, 혹은 힌두교 정통 6파철학의, 수론파의 「24제설」과 니야야학파의 세계관, 나아가 붓다와 동시대의 자이나교의 「아차란가 수트라」 등을 참고하면서, 붓다의 연기설에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되는 자료들을 추측하고 있다. 덧붙여서 이 정통 6파철학의 ‘정통’이란, 어디까지나 베다를 성전으로 받드는 바라문이나 힌두교도의 입장에서 본 것으로, 그 입장에서 보면 불교나 자이나교 등은 이단에 지나지 않는다. 불교는 그 흥기 당시 인도의 체제종교인 바라문교 즉 힌두교에 반기를 든 비판종교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면에서 기무라는, 불교의 12연기설의 특징은 (1) 형식적으로 정비되어 있다는 점 (2) 심리적 특히 인식론적 조건을 가장 중요시 했다는 점의 두 가지 점에 있다는 판단을 내린다.(「사실적세계관」 제5장 2절) 

 

(1)의 지적은 시대가 지남에 따라 정리가 이루어지는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그러나 (2)는 아주 중대한 차이를 보인다. 유지연기有支緣起를 인식 생멸의 과정, 즉 ‘인식과정’이라고 파악하는 방식은 12지 연기를 붓다의 내관에 의해 얻어진다고 하는 입장으로서는 지당하다. 후대 부파시대에 성립한 삼세양중설 등 ‘확장된 12지 연기설’에는 반하는 것이지만, 「우다나」 등의 기술을 진실로 보는 한, 성도로 향하는 붓다의 순차적인 내관의 단계를 나타내는 것이라 해도 좋기 때문이다. 단 후에 논하지만, 그 ‘순서’ ‘방향’의 문제는 신중하게 음미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식과 명색의 상호의존

 

[p.82-8] 그러면 기무라가 12지 연기를 어떠한 ‘심리적 과정’이라 했는가를 보기로 한다. 기무라는 ‘가장 주의해야할 경’의 하나로서 「상유타 니카야」의 『성읍城邑』이라 이름 하는 경전의 유지연기가 설해진 곳의 전문을 인용하고 있다. 『도성都城』이라고도 번역되는 이 경의 모두에서 붓다는 자신이 아직 보살이었을 당시 다음과 같은 생각을 품었다라고 회상하며 각 연기지의 생기와 소멸에 생각이 이르렀던 것을 술회하고 있다. 단지 여기에서 설해지고 있는 것은 12지 연기가 아니라 10지 연기이다. 즉 무명과 행이 없이 “식→명색→육처→촉→수→애→취→유→생→노사”의 열 개의 지분으로 이루어지는 연기설이다. 더욱이 이 경문에서는 ‘식’과 ‘명색’의 관계가 상호의존하고 있다. 즉 “식↔명색→육처→촉→수→애→취→유→생→노 사”의 계열이 열거되고 있다. 

 

앞에서도 자주 언급했듯이 유지연기는 기본적으로 한 방향의 인과 밖에 상정하고 있지 않아 두 개의 지분이 쌍방향의 인과성을 나타내는 것은 드문 일이다. 『성읍』의 10지 연기설에서는 무명, 행의 지분이 없기 때문에, ‘식↔명색’이 생존고의 근원인 것이다. 그러면 이곳을 기무라의 번역과 손쉽게 입수할 수 있는 마스다니 후미오增谷文雄 역을 비교해 확인하기로 한다. 

 

“그 때 나에게 이러한 생각이 일어났다. 이 식은 이것으로서 환귀還歸할 수 있는 것으로, 명색을 넘어 나아갈 수는 없다. 단지 이것 만에 의하여 (중생은) 늙고, 태어나며, 죽고, 재생한다. 즉 명색을 연으로 하여 식이 있고, 식을 연으로 하여 명색이 있고, 명색을 연으로 하여 육입이 있고, 육입을 연으로 하여 촉이 있는 등……이다.”(「사실적 세계관」 제5장 3절) 

 

“그래서 나는 또 이와 같이 생각했다. ‘이 식은 여기에서 물러난다. 명색을 넘어 나아가는 일은 없다. 사람은 그 한도 안에서 늙고 또 태어나며 죽고, 죽고 또 재생한다. 곧 이 명색에 의해 식이 있으며, 식에 의해 명색이 있는 것이다. 나아가 명색에 의해 육처가 있는 것이다.’”(增谷, 『阿含經典 I』, ちくま學藝文庫) 

 

‘식’과 ‘명색’의 지분의 관계는 상호의존이며, 순환하기 때문에 이 이상 거슬러 올라갈 수는 없다. 따라서 ‘식↔명색’에서 시작하며, 뒤에는 “→육처→촉→수→애→취→유→생→노사”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조금 복잡한 계기의 형태로 된다. 또 「상유타 니카야」에는 『성읍』과 같이 ‘식↔명색’이 설해지는 다른 경전이 있다. 『노속蘆束』이라 이름 하는 경으로, 명색과 식이 상호 의존하여 있는 모습을 서로 기대어 서있는 갈대 단에 비유하고 있다. 이와 같이 특이하게 취급되는 2지분, 명색과 식에는 대체 무엇이 있는 것일까. 

 

삼세양중설의 태생학적 해석에서 이 상호작용은 개체의 수태와 태내에서의 성숙의 과정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고 있다. 덧붙여 태생학적 해석이란, “가령 명색은 태내에서 태아성장의 5단계를 나타내며, 육처란 6개의 지각기능이 갖추어진 것이라는 해석”을 말한다.(宮下晴輝, 「연기설연구 초기가 남긴 것」, 『佛敎學セミナー』 제100호) 

어머니의 태내에서 태어나는 혹은 태어나 변하기 때문에 ‘태생’이며, 윤회에서 입태와 그 후의 발달과정에 대한 교설을 가리킨다. 

 

「디가 니카야」 제15경 『대연방편경大緣方便經』(大緣經, 大因緣經)이나 「앙굿따라 니까야」의 제3집 『대품大品』 등 신층으로 분류되는 초기경전에는 이 해석을 뒷받침하는 기술이 보이지만, 대다수의 불교학자는 원시불교의 교설로서는 인정하지 않는다. 단 『대연방편경』에는 고찰할 만한 극히 흥미 깊은 법구法句가 보이는 까닭에 후에 언급하기로 한다. 

그러면 『대연방편경』에서의 명색, 식에 대한 기무라의 해석을 보면서 『성읍』의 일절을 ‘가장 주의해야 할’ 것으로 간주한 그의 ‘식↔명색’관을 개관해 보기로 한다. 

 

명색 가운데 명은 정신적 요소이며, 색은 물질적 요소, 양자가 결합하여 명색이 되어 “명색을 떠나지 않는 곳에 유정有情의 성립이 있다.”는 것이 강조되고 있다(「사실적 세계관」 제2장 「유정론 일반」 2절, 『원시불교사상론』, 『木村泰賢全集』 第3卷). 유정이란 스스로의 의사에 따라 행위 하는 존재로서 곧 인간과 동물 등을 가리킨다. 기무라는 나아가 명색에 연하여 육처가 성립하는 방식을 설한다. 먼저 명색이란, “막연한 의미에서는 신[身; 色]과 심[心; 名]을 총괄한 말로, 소위 심신합성의 조직을 가리키는 것이다. 고로 육입과 명색의 관계는 요컨대 6관官의 성립은 신심전체의 조직에 의존하는 것으로, 이것을 떠나서는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사실적 세계관」 제5장 제5절) 

 

6처란 무엇인가

 

글의 내용 중에 6입入, 6관이란 12지 연기에 보이는 6처의 다른 이름이다. 여기에서 6처는 감관의 내적측면을 나타내어, 구체적으로는 안[시각], 이[청각], 비[후각], 설[미각], 신[촉각, 통각, 압각, 온도각 등의 체성감각], 의[의사, 생각, 사유]의 여섯의 기능과 그 기관을 가리킨다. ‘6근’ ‘6내처’ 등으로도 불린다. 기무라에 있어 명색은 이 6처가 의존하는 심신의 통각을 담당하는 조직과 같이 이해된다. 

 

덧붙여 말하면 6처라는 말은 사용되지 않지만, 이것을 가리키는 것이라 생각되는 한 구절이, 『숫타니파타』의, 나카다니中谷의 추정 구분에서는 고층으로 분류되는 제1장 「뱀의 장」에 보인다. 설산에 사는 신령과 붓다와의 문답으로 이루어진 내용으로, 6처라는 개념의 의미가 잘 나타나는 까닭에 나카무라 하지메中村元의 번역으로 보기로 한다(「설산에 사는 자」로부터, 『ブッダのことば』, 岩波文庫). 

 

“설산에 사는 자인 신령이 말했다. ‘무엇이 있을 때 세계는 생기하는 것인가? 무엇에 대하여 친밀함을 가지고 사랑하는 것인가? 세상 사람들은 무엇에 집착하고 있고, 세상 사람들은 무엇에 괴로워하고 있는가?’”(168) 

“스승은 대답했다. ‘설산에 사는 자여, 여섯 가지의 것이 있을 때 세계는 생기하고, 여섯 가지의 것에 대하여 친밀함을 가지고 사랑하며, 세계는 여섯 가지의 것에 집착하고 있고, 세계는 여섯 가지의 것에 괴로워하고 있다.’”(169) 

 

이 ‘여섯 가지의 것’이 후에 술어로 정착되었을 것이다. 『숫타니파타』에서는 설산의 신령이 거듭 묻고 있다. 그것에 의해 세간이 괴로워하는 집착이란 무엇일까, 그리고 그 괴로움으로부터 어떻게 해방될 수 있을까라고. 이 절실한 물음에 대한 붓다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세간에는 다섯 가지 욕망의 대상이 있고, 의(의 대상)이 제6의 것이라고 설해진다. 그것들에 대한 탐욕을 떠난다면, 곧 고통으로부터 해방된다.”(171) 

 

‘다섯 가지 욕망의 대상’이란 6처의 외적측면, 즉 ‘색·성·향·미·촉’에 제6의 것을 더한 것이리라. 이 해석에 따른다면, ‘제6’은 ‘의’의 대상인 ‘법’이 된다. 여기에서 말하는 ‘법’이란 의사意思의 대상, 즉 판단과 변별, 사고와 기억 등의 내용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서에서 자주 사용되는 이법理法이나 사상존립事象存立의 법칙을 의미하는 법과는 구별된다. 이것들을 합쳐 여섯 가지 대상, ‘6경境’ 또는 ‘6외처外處’라고 부른다. 이러한 교설의 핵심은 ‘안·이·비·설·신·의’를 잘 막고 지키는데 있다. 즉 감각 기관이나 의사기관을 대상 즉 ‘색·성·향·미·촉·법’으로부터 막고 지키는 것이다. 대상에 접촉하더라도 애착을 일으키지 않듯이 ‘보면서 보지 않고’ ‘들으면서 듣지 않고’ ‘생각하면서 생각지 않는’ … 이라는 상태에 이르러, 감관을 조절하는 것이 수행의 목표 중 하나인 것이다. 종교학자인 다케우치 요시노리武內義範는 이러한 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일상적인 인간의 경우, 보는 것은 곧바로 그 대상을 파악하는 것, 즉 쾌·불쾌의 감각을 가지고 욕망적으로 이것과 관계하며, 집착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감관을 통제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감관은 ‘연잎의 이슬’과 같이 또는 ‘칼날 위의 겨자씨’와 같이, 집착없이 있는 그대로 있어야할 그대로 있게 하듯 볼 수가 있다.”(「연기사상」 『講座佛敎思想』 제5권, 「종교론·진리·가치관」 제2장, 理想社) 

 

이것은 초기불교의 ‘인식기관(6내처)/인식대상(대상)’의 2분법에 기초하는 수도론으로, 후대의 대승불교에서는 직접지각과 그 대상과의 사이에 언어적 분절(분별)의 개재를 인정한다. 초기불교에서도 “식은 요별을 특질로 한다.”고 하지만, 이것을 일보 전진시킨 것이다. 『숫타니파타』 제1장의 이 부분에서는 12지연기 가운데 6처와 촉(인식대상과의 접촉), 수(고락 등의 감수), 애(갈애), 취(집착)의 각 지분의 요소가 모두 설해지며, 더욱이 그 환멸의 도(역관)까지도 암시되고 있다. 12지연기나 10지연기가 정돈되기 전 붓다가 관조한 실제 내용을 알 수 있는 한 구절이다. 

 

5온이란 무엇인가 

 

[p.88-13] 이어서 6처(입)와 함께 이것보다 더욱 자주 나타나는 기본교리인 ‘5온’에 대해서도 살펴보기로 한다. 5온은 일반적으로 색·수·상·행·식으로 사람 등의 유정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를 말한다. 온이란 집합체, 덩어리의 의미이며, 이 다섯 가지의 온이 임시로 결합하여 사람(유정)인 것이 만들어진다. 임시적인 가설로서 결합하는 것을 가화합假和合이라고 부른다. 여기에서 각각의 온에 대해 개설하기로 한다. 

 

색온은 물질적인 신체, 육체적인 감각요소를 가리킨다. 수온은 감수작용 특히 고苦, 락樂, 불고불락不苦不樂의 감수를 가리킨다. 상온은 인식대상으로부터 받아들인 인상과 지식에 기초하여 관념과 이미지를 표상하는 것을 가리킨다. 행온은 무엇인가를 능동적으로 행하고 형성하려고 하는 의욕. 행위에 대한 의지를 가리키다. 

 

식온은 개개의 사물을 분별하고, 식별하는 작용을 가리킨다. 식온에는 인식의 통괄기능이 인정되는 것으로부터 주체로서 파악되는 경우도 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가상, 가설에 지나지 않는다. 후대에는 나아가 영아[靈我; 아트만]나 혼을 나타낸다고 하는 잘못된 견해까지도 나타나게 되지만, 제1장에서 인용한 「맛지마 니까야」의 『대애진경大愛盡經』을 비롯해 초기경전에 보이는 불설에서는 완전히 부정되고 있다. 기무라도 이런 점에 근거하여 식을 ‘구별하여 아는 주체’라고 해석하고 있다(「사실적 세계관」 제3장 「심리론」 4절). 

 

이것들 다섯 가지의 온이 모여 결합하는 것으로부터 ‘나’가 가설된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가상이며, ‘나’를 실체로 간주하는 일은 착시에 지나지 않는다. 초기경전에 보이는 불설에서는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이다. 이것은 나의 아트만이다’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라고 반복하여 경계하고 있는 것으로, 이 ‘이것’이 5온이다. 물론 5온 이외에 나의 존재근거는 없고, 5온도 당연히 ‘나’가 아니다. 이렇게 5온 무아의 모습이 설해지며, 더불어 온의 하나하나가 무상인 것도 설해진다. 

 

명색=객관, 식=주체

 

다시 6처로 돌아가기로 한다. 기무라가 이해하는 명색은 6처의 내적 측면(안·이·비·설·신·의)에 대하여, 그것들의 핵심적인 작용을 하고 있는 심신의 결합체라는 것이 된다. 그러면 명색과 식의 관계는 어떻게 묘사되고 있는가. 

 

“식도 본래 명색 속의 일부이지만, 명색을 인식의 체로서 취급하는 한, 식은 그 중심적인 것으로 따라서 명색 전체의 성립은 이것에 의존하여야 한다.” “이 점은 마치 가족은 부부나 자녀 등으로 이루어지지만, 그 중심은 주인인 것과 같다. 따라서 달리 말하면 식이 성립하는 조건은 객관으로서 명색이 있는 것에 의존하는 것으로, 이것을 떠나서 식만이 홀로 존재하는 일은 절대로 없는 것이다.” 

 

이 인식주체(식)와 객관(명색)의 밀접한 관계야 말로 ‘식↔명색’이라는 상호 의존적 관계의 이유이며, “앞에서 이미 인용했듯이 불타는 식과 명색과의 관계를 마치 갈대단이 서로 의존해 있는 것과 같이 설한 것도” “식과 명색과의 상호 관계 이상으로 나아가지 않는다고 말한 것도” 이러한 인식론적 입장에서 말한 것이라고 한다(「사실적 세계관」 제5장 5절). 

 

바로 뒤에서 살펴보지만, 기무라는 유부의 삼세양중설에 낮은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런 까닭에 태생학적 해석은 채택하지 않고, 현재에도 채용하고 있지 않다. 그렇긴 하지만, 명색이 정신적 요소와 물질적 요소의 결합이라고 간주하고 더욱이 식과 명색과의 관계가 주관과 객관의 상의 관계로서 파악되었을 때 거기에는 어떤 형태의 ‘적극적인 주체성’이 상정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제는 이 ‘주체성’인 것이다. 

 

무명은 왜 요청 되었는가

 

이 상정은 기무라의 무명론에서 한층 윤곽이 분명해 질 것이다. 『성읍』의 10 지연기설에는 무명과 행의 지분이 없다. 만약 10지 연기설을 12지 연기의 선행형태로 본 경우, 왜 ‘식↔명색’ 앞에 그것의 원인으로 무명과 행의 연기지가 요청된 것일까. 

 

“생각컨대 연기관은 불타의 근본적 세계관(오히려 인생관)이었다고는 하지만, 이것을 구분하여 각각의 지분으로 나누어, 그 사이의 관계를 엄중히 살핀다는 것은 처음부터 확정적인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즉 그 중심은 의심할 바 없이 식과 명색의 관계로, 이것을 기초로 하여 심리활동의 갖가지 모습으로부터 유에 이르기까지 나아간 것이지만, 반드시 이것을 10지 또는 12지의 숫자상으로 확정하는 것이 불타의 최초의 생각은 아니었다.”(「사실적 세계관」 제5장 3절) 

 

그것은 그와 같으리라 생각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기도 그 멸도 지분에 의해 분절되고, 그것들 연기지의 생기生起와 멸진滅盡의 연쇄계열로서 표현되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무명, 행을 포함하는 12지 연기지가 완성태로서 설해진 것이다. 

 

“(『성읍』에서) 불타가 식, 명색의 관계 이상으로 나아가지 않았던 것은, 이것이 곧 붓다의 창안이었던 것과는 별개로, 당시 불타는 온전히 신심활동의 현실에 대하여 관찰을 한 이상, 현실 활동에 의해 성립하는 형식적 근본조건을 분명히 했던 것으로, 형식상 여기에서 일단 종결하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 왜냐하면 식과 명색과의 관계는 주관 객관의 관계이기 때문에, 주관이 있는 까닭에 객관이 있고, 객관이 있는 까닭에 주관이 있어, 양자의 결합에 의해 세간이 있다고 한다면, 인식론상, 일단 완성되기 때문이다.”(「사실적 세계관」 제5장 3절) 

 

‘식↔명색’, 주관객관의 상의관계에 이르러 세계에 대한 기술은 일단의 완결을 본 것이 될 것이다. 하지만 기무라에 의하면, 붓다는 그와 같은 고정적인 세계 이해의 구도에 만족하지 않았다. 

 

“이것은 곧 칸트의 입장이다. 그렇긴 하지만 앞에서 서술해온 것과 같이, 불타의 입장은 어떤 것인가 하면, 쇼펜하우어적으로, 식의 근저에 무명, 업의 의지가 있다고 하는 것인 까닭에, 정확히 말하면, 결코 인식의 주체로서의 식만으로 일체를 해결할 수는 없다. 좀 이른 말이지만, 소위 멸관의 쪽으로부터 식이 멸함으로써 명색이 멸한다고 하는 것으로부터, 왜 우리들은 이 식을 멸할 수 없는가 라고 반문한다면, 이 식의 근저에는 시작도 없는 번뇌 업이 있기 때문이라고 필연적으로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사실적 세계관」 제5장 3절) 

 

인용문 가운데 ‘멸관’이란 역관의 것이다. 기무라는 역설한다. 불교가 드러내고자 한 것은 칸트적인 정연한 객관적 세계관이 아니라 쇼펜하우어적인 맹목적으로 생존을 갈구하는 의지의 표상으로서의 세계라는 것을. 이렇게 하여 ‘식↔명색’의 근원에 행, 나아가 무명이 상정되는 것이다. 기무라는 한발자국 더 나아가 앞에서 본 바라문교, 힌두교의 성전인 리그베다와의 관련성도 시사하고 있다. 

 

“하물며 앞에서도 서술했듯이, 무명―행―식의 계열은 리그베다의 창조찬가 이래의 연기관의 형식이었다고 한다면, 배경사상의 관계로부터 보아도, 이 계열을 도외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사실적 세계관」 제5장 3절). 

 

윤회라는 유사논점

 

[p.94-1] 제1차 연기논쟁은 앞에서 보아온 기무라 다이켄의 『원시불교사상론』의 「사실적 세계관」 제5장 「특히 12연기론에 대하여」와, 다음에 보는 우이 하쿠주, 와츠지 데츠로에 의한 이것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미 말했듯이 그 논점은, 현재로는 윤회의 여부와 연기계열의 성질을 둘러싼 것이라고 간주하는 경향이 적지 않다. 그렇긴 하지만 기무라와 우이, 와츠지와의 최대의 논점은 양자의 무명관에 대한 차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야마오리 테츠오는 무명에 초점을 맞추어 이 논쟁을 고찰하였다 (「말라빠진 붓다」, 『近代日本人の宗敎意識』, 岩波現代文庫). 무명에 착안한 것은 혜안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서술이 너무 도식적인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학설상, 사상思想상 동맹관계와 같이 그려지고 있는 우이와 와츠지의 사이에도 12지 연기관 등에 관한 적지 않은 차이가 보이지만, 야마오리를 비롯한 다수의 논자가 이 점을 놓치고, 예를 들면 야마오리는 ‘칸트의 아폴로적 이성 중시(우이, 와츠지)’ 대 ‘쇼펜하우어의 디오니소스적 의지 중시(기무라)’라는 질릴 정도로 명쾌한 논쟁의 구도로 환원시켜버린다. 우이와 와츠지의 연기관의 차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논하기로 한다.  

 

논쟁의 가장 중요한 논점은 기무라의 무명론, 그 본질로서의 의지론, 그리고 의지에 의해 움직여지는 생명관에 있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고 생각된다. 적어도 논쟁의 전前 단계에서는 다른 쟁점, 예를 들면 연기에 대한 이해나 윤회설에 대한 인정 여부 등에 대한 대립은 그렇게 큰 것이 아니고, 논점의 핵심이 되지 않는다. 

 

앞에서 말한 대로 기무라는 삼세양중의 연기설을 붓다의 제일의적 주장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곧 그는 “그 해석은 반드시 불타의 대정신大精神이 담긴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역시 그 근거하는 바는 있는 것이다. 내가 아는 한 옛 성전 중에는 연기지의 전부를 거론하여 3세 내지 2세에 배당시켜 설한 것은 없지만, 그 근거라고 볼 수 있는 것이 없는 것도 아니다.”(「사실적 세계관」 제5장 7절) 라고 「맛지마 니까야」의 내용을 인용한 후, “그렇긴 하지만 이것을 불타의 입장에서 보면 이러한 해석은 불타가 취한 극히 통속적通俗的 방면을 취한 것으로, 단정컨대 제일의적인 주장이 아닌 것은 어디까지나 잊어서는 안 된다.”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木村 전게서). 

 

더군다나 연기설과 윤회의 관계를 다루어도 “연기관의 주요한 목적은 후에 크게 주장된 것과 같이 2세1중이라든가 삼세양중인 것과 같이 소위 분단생사의 규정을 분명히 하려고 했다기 보다는 오히려 소위 찰나생멸의 법칙을 분명히 하려고 한 것에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라고 하고 있다(「사실적 세계관」 제5장 6절). 생사를 절대화하여 6도를 오고가는 것과 같은 윤회를 설하는 것에 원시불교의 주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논하고 있다. 그리고 우이도 또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삼세양중의 12인연설은 원시불교의 시기에도 또 근본불교의 시기에도 언급되지 않았던 해석이다. 곧 이 해석은 후세의 논장가論藏家가 만들어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12인연의 해석―연기설의 의의」 1절, 『印度哲學硏究』 第2, 岩波書店. 이하 「인연의 해석」으로 약기) 

 

부정의 방식이나 강도에서 상위相違가 보이는 것으로, 양자 모두 윤회를 전제로 하는 삼세양중의 연기설을 배척하고 있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미야시타 세이키宮下晴輝는 양자를 대비하여 다음과 같이 논평하고 있다(「연기설연구 초기가 남긴 것」 전게서). 먼저 우이의 삼세양중설 평가에 대하여, 

 

“윤회적인 설명으로서의 연기설은 ‘후세의 논장가가 만들어 낸 것’인 것, 그리고 그것은 아함경전의 교설 가운데 후세의 해석이 들어간 것으로, 거기에서 ‘원시적 의미’를 끄집어내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기무라의 평가에 대해서는, “기무라는 이것을 ‘불타에게 있어 지극히 통속적인 것’이라고 말하고, 양자 사이에 아함의 교설에 대한 태도의 차이가 이미 나타나고 있지만, 기무라와 우이 양자 모두가 직면하고 있던 문제는 동일하다.”라고 평가하며, 두 사람 입장의 친근성을 드러내고 있다(宮下 전게논문). 한편 스에키 후미히코末木文美士는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와츠지를 포함해 원시불교의 연기에 대한 해석에서는 윤회에 관해 극히 부정적인 입장을 취한다. 삼세양중의 연기와 같은 해석은 후세의 날조이며, 원시불교와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본다. 와츠지는 이와 같은 견해 중 급진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입장을 표명하며, 윤회를 중시하는 기무라 다이켄 등에 덤벼든다.”(「와츠지 데츠로의 원시불교론」, 『近代日本と佛敎―近代日本の思想·再考 II』) 

 

단지 초기불교의, 윤회를 포함한 전통설을 ‘중시’하고 있는 것은 아카누마 치젠으로, 기무라가 아니다. 기무라는 아카누마를 전통 묵수주의자로서 비판조차 하고 있다. 스에키는 미야시타 세이키의 논문이 발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최근 저서에서 제1차 논쟁을 다음과 같이 개관하고 있다. 

 

“기무라는 더욱이 전통적인 교학의 입장을 유지하고, 거기에서 보다 근대적인 입장을 세우려고 하는 우이 하쿠주·와츠지 데츠로 등과 연기설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지게 되었다(야마오리 2007). 기무라는 소위 삼세양중의 인연의 입장에 서서 12연기는 과거세·현재세·미래세의 3세에 걸친 인과관계를 설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또 무명을 맹목적인 의지라고 보는 듯한 심리적인 해석을 하였다. 그것에 대하여 우이와 와츠지는, 12연기는 시간적인 3세의 관계를 설하는 것이 아니라 고가 생겨나는 논리적인 인과관계를 설한 것이라 해석하고, 또 무명에 관해서는 지적知的인 무지라고 해석하여 기무라를 비판했다.”(『思想としての近代佛敎』 IV, 「불교연구 방법론과 연구사」 3절 「불교학의 전개」, 中公選書) 

 

야마오리설에 의거한 이 총괄은 잘못이다. 『원시불교사상론』을 정독하면 바로 알 수 있듯이 기무라는 12지연기에 대하여, 이것은 반드시 시간적 인과의 고찰이 아니라 몰沒시간적 의존관계로서 설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밝히고 있다(122~123페이지의 인용문 참조). 「논리적 인과관계」는 물론 동시적인 상의관계를 상정하고 있는 것이다. 또 앞에서 인용한 것과 같이 12지연기의 삼세양중설에 의한 해석을 중요시하고 있지 않다. 삼세양중설의 ‘싹’이 니까야 속에 보이기는 해도 그것은 붓다의 통속적인 설법에 지나지 않았고 말하고 있다. 한편 우이宇井는 후대의 교설을 니까야의 기술 속에서 취한 것이라 서술하고 있다. 확실히 다르지만, 그 차이는 미묘하다. 더욱이 바로 뒤에서 논하지만, 와츠지和辻는 범부의 윤회를 부정하지 않는다. [ 다 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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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승
일본 고마자와대학 박사, 전 한국불교연구원 원장, 일본 인도학불교학회 이사, 인도철학회 편집이사, <실담자기초와 망월사본 진언집 연구>(공저, 글익는들, 2004)), <을유불교산책>(정우서적, 2006), <산타라크쉬타의 중관사앙>(불교시대사, 2012) 등 다수의 저서와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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