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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법문 해설]
존재와 시간 그리고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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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  2018 년 4 월 [통권 제60호]  /     /  작성일20-05-29 12:26  /   조회4,573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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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에서 보는 시간

 

모든 존재는 성주괴공(成住壞空)이라는 과정으로 전개된다. 생성하고, 머물고, 흩어지는 변화의 단계를 거쳐 마침내 공(空)으로 흩어진다. 시간은 존재의 변화과정이므로 존재를 구성하는 또 다른 축이기도 하다. 그런데 존재의 실상을 설명하는 화엄 십현문의 내용은 모두 존재의 관계성에만 초점이 모여 있다. 그렇다면 십현문에는 시간에 대한 설명은 없는 것일까? 이에 대한 해답이 아홉 번째 문에 해당하는 십세격법이성문(十世隔法異成門)이다.

 


 

 

법장(法藏)은 “이상의 여덟 가지 문이 모두 소의(所依)이니, 소의인 법(法)이 이미 원융(圓融)하므로 다음에 능의(能依)를 분별하건대 능의인 시간도 또한 그러하다.”고 했다. 짧지만 여기에는 세 가지 내용이 담겨 있다. 첫째 존재를 의미하는 법(法)은 ‘소의(所依)’라는 것이며, 둘째 시간은 ‘능의(能依)’라는 것이며, 셋째 소의인 법이 원융하므로 능의인 시간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소의와 능의는 존재와 시간을 나타내는 개념이다. 소의란 ‘의지처(依止處)’ 또는 ‘근거(根據)’라는 뜻이다. 무엇의 근거가 되고, 의지처가 되는 것이 소의이다. 이와 반대의 개념은 ‘능의’인데 ‘무엇에 의지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예를 들어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한 그루의 나무가 있다고 했을 때 나무는 대지에 의존해 있으므로 능의가 되고, 대지는 나무의 의지처가 되므로 소의가 된다.

 

법장은 존재들의 상호관계성을 밝히는 여덟 개의 십현문을 소의라고 분류했다. 이 말은 존재들은 시간의 근거가 되는 의지처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모든 존재는 시간이 기대는 의지처가 되므로 소의가 되고, 반대로 시간은 존재에 의탁해 있으므로 능의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소의인 존재[法]가 원융무애하게 상호 소통하므로 능의인 시간도 역시 그와 같이 상호 소통한다는 것이다. 존재가 상즉상입(相卽相入)하듯이 시간 역시 그와 같은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보통 시간의 강물 위에 존재가 흘러간다고 생각한다. 시간이라는 절대불변의 질서가 있고, 존재는 그런 시간의 강물위에 탄생하여 그 강을 따라 흘러간다는 생각이다. ‘시간의 모래밭’이나 ‘세월의 강’이라는 말에는 그런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는 시간이 존재를 초월해 있는 실체라고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정말 시간이라는 강이 있고, 존재들은 시간의 강물을 따라 떠내려가는 수동적인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존재를 초월해 있는 절대불변의 시간이란 없다. 독립적 실체로서 시간이라는 질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들의 변화가 곧 시간이기 때문이다. 화엄사상을 집대성한 법장도 시간은 존재에 의지해 있는 능의라고 했다.

 

시간은 만질 수도 없고, 어떤 실체적 대상도 없다. 시간을 측정하는 것은 존재의 물리적 변화를 통해서 알 수 있을 뿐이다.그래서 시간은 철학자의 영역이라기보다 물리학자의 영역이 되어 왔다. 고전물리학에서 시간은 3차원 공간에서 일어나는 물리적 변화를 설명하는 매개변수였다. 굳이 물리학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인간은 고대로부터 낮과 밤이나 계절의 변화와 같이 천체의 물리적 변화를 통해서 시간을 인지해 왔다. 이런 전통은 근대까지 이어져 1960년 국제도량형총회는 지구의 공전을 기초로 시간의 단위인 역표초(曆表秒)를 산출해 냈다.이렇게 보면 ‘Time’이라는 말을 나타내는 ‘시간(時間)’이라는 표현은 매우 절묘하다. 시간은 특정한 한 점이 아니라 ‘시각의 사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한 시’에서 ‘두 시’로 바늘이 움직이는 것과 같은 물리적 변화가 ‘시각의 사이’로서 시간인 셈이다.

 

시간을 나타내는 또 다른 표현인 ‘세월(歲月)’이나 ‘광음(光陰)’ 역시 ‘시각의 사이’를 나타내는 말들이다. 세월은 해와 달이라는 뜻이므로 해와 달이 뜨고 지는 사이를 말하며, 광음 역시 빛과 그림자 즉 낮과 밤이라는 사이를 의미한다.결국 시간은 낮과 밤의 사이, 봄과 여름의 사이와 같이 행성의 물리적 변화가 만들어 낸 것이다. 시간이 흘러서 낮과 밤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낮과 밤이 교차하여 시간이 흐르는 것이다. 따라서 존재는 시간의 토대인 소의가 되고, 시간은 존재에 기대어 있는 능의가 된다는 화엄의 시간관은 물리학적 관점과 일치한다.만약 시간이 존재를 초월해 있다면 시간은 누구에게나 절대적 길이로 다가올 것이다. 뉴턴 같은 물리학자도 “절대시간은 외부의 그 어떤 것과 상관없이 그것 자체로 흐른다.”고 보았다.

 

시간은 언제 어디서나 항상 균일하게 흘러가는 어떤 실체로 이해한 것이다. 하지만 시간은 물리적 변화를 측정한 것이기에 상대적 개념일 뿐이다. 이렇게 시간은 존재에 의존해 있는 상대적 개념이라는 것을 설명하는 대표적 이론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다.

 

특수상대성이론에 따르면 시간은 운동에 따라 속도가 달라진다고 한다. 움직이는 사람의 시계가 가만히 있는 사람의 시계보다 느리게 간다는 것이다. 운동 기간을 몇 천 년으로 하고, 운동 속도를 빛의 속도로 하면 확연히 차이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또 일반상대성이론에 따르면 중력이 클수록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고 한다. 저지대에 있는 사람과 고지대에 있는 사람을 비교했을 때 중력이 큰 저지대에 있는 사람의 시간이 더 느리게 간다는 것이다.영화 <인터스텔라>에서 우주비행사 쿠퍼가 중력이 큰 별에 갔다가 지구로 귀환했을 때 자신의 딸이 할머니가 되어 있었던 것도 이런 이치다. 아무튼 이 두 가지 상대성이론에 따르면 시간은 절대적 실체가 아니라 운동과 중력과 같은 존재의 특성에 따라 변화되는 상대적인 것이다. 이는 시간이 존재에 의존해 있다는 화엄의 시간관과 상통하는 대목이다.

 

시간의 통합성과 개별성


시간에 대한 일반적 관점은, 시간은 과거–현재-미래로 흘러가는 단일한 흐름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십현문의 아홉 번째문인 ‘십세격법이성문(十世隔法異成門)’에 따르면 시간은 과거・현재・미래의 확장인 십세라는 열 가지 독립적 층위를 이루고 있다. 여기서 ‘십세(十世)’란 열 단계의 시간적 층위를 말하는데, 시간에는 기본적으로 과거・현재・미래라는 ‘삼세(三世)’라는 층위가 있다. 그런데 어제라는 과거의 시점에도 과거・현재・미래라는 삼세가 있고, 현재의 시점에도 과거・현재・미래라는 삼세가 있다. 이와 같은 삼세의 범주는 내일이 되어도 여전히 과거・현재・미래라는 삼세가 존재한다. 이렇게 아홉 개의 층위로 확장되는 시간을 ‘구세(九世)’라고 한다.

 

그런데 과거・현재・미래를 토대로 하는 아홉 개의 시간적 층위는 관찰자라는 기준이 설정되어야 성립한다. 관찰자는 과거・현재・미래를 구분 짓는 기준이며, 모든 시간을 수렴하고 확산하는 중심이 된다. 관찰자의 마음에 따라 시간은 과거・현재・미래가 순차적으로 흐르기도 하고, 거꾸로 현재에서 과거로 흐르기도 하고, 억겁의 시간이 찰나의 순간으로 수렴되기도 한다. 그와 같은 관찰자의 기준을 법장은 ‘한 생각’ 즉 ‘일념(一念)’이라고 했다.

 

시간의 이와 같은 특성을 더욱 잘 정리한 것은 신라의 의상대사라고 할 수 있다. 대사는 ‘무량원겁즉일념(無量遠劫卽一念)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이라고 했다. 아득히 긴 시간이 곧 찰나의 한 생각이고, 찰나의 한 생각이 곧 아득히 긴 시간이라는 것이다. 법장과 의상 모두 시간은 일념에 의해 억겁의 길이로 확장되기도 하고, 찰나의 순간으로 수렴되기도 한다고 보았다. 이처럼 법장의 설명에 따르면 시간은 존재에 의존해 있다는 것, 시간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지만 아홉 단계의 층위로 구별된다는 것, 시간의 기준은 일심이라는 관찰자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존재에 의존해 있다면 존재의 특성은 시간에도 투영될 것이다. 모든 존재는 상호 연결되어 있는 상입상즉의 특성을 띠고 있다는 것이 십현문의 핵심이다. 만약 시간이 존재에 의존해 있다면 시간도 그와 같은 존재의 특성을 반영해야 한다. 이런 특성에 대한 설명은 법장의 십현문보다 의상대사의 『법성게(法性偈)』에 보다 더 정교하게 나타나 있다.

 

첫째, 시간의 통합성이다. 의상은 시간의 통합성에 대해 ‘구세십세호상즉(九世十世互相卽)’이라고 했다. 과거・현재・미래라는 각각의 시간이 상호 전환되는 ‘상즉(相卽)’의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시간이 존재와 분리된 독립적인 실체가 아니라 존재에 의존해 있다면 과거와 현재가 서로 전환되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따사로운 햇살을 받고 피어난 봄꽃은 분명 현재지만 그 꽃은 지난 가을에 떨어진 씨앗에 의존해 있다. 현재 핀 꽃 속에 과거가 내포되어 있으므로 과거와 현재는 융합해 있다. 나아가 현재 핀 꽃은 돌아올 가을이면 열매가 되므로 미래의 열매는 현재의 꽃에 의지해 있다. 이렇게 시간도 존재의 공간적 관계성에 따라 과거가 곧 현재가 되고, 현재가 곧 미래가 되는 상입(相入)의 관계가 성립된다. 과거・현재・미래라는 삼세가 서로의 경계를 허물고 상호 융합하는 것이다.

 

둘째는 시간의 개별성이다. 법장은 시간이 열 가지 층위로 구성되어 있다고 했다. 의상은 그런 열 가지 층위의 시간이 ‘호상즉(互相卽)’, 상호 전환이 일어난다고 했다. 그렇다면 시간은 경계도 없이 뒤섞여 과거도 없고, 현재도 없고, 미래도 없는 것일까? 근원적 맥락에서 따지면 과거・현재・미래는 상즉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현재는 현재대로 있고, 과거는 과거대로 있고, 미래는 또 미래대로 있다. 이런 시간의 원리에 대해 의상은 ‘잉불잡난격별성(仍不雜亂隔別成)’이라고 했다. 시간은 과거・현재・미래가 중층적으로 혼재되고, 압축되기도 한다. 하지만 과거는 과거대로, 현재는 현재대로, 미래는 미래대로 각각의 경계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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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성균관대 초빙교수.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선의 생태철학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연구교수, 조계종 불학연구소 선임연구원, 불교신문 논설위원, 불광연구원 책임연구원, <불교평론> 편집위원 등을 거쳐 현재 성철사상연구원 연학실장으로 있다. 저서로 『선의 생태철학』 등이 있으며 포교 사이트 www.buruna.org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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