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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 주인공의 삶]
화를 내는 특별한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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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혜  /  2016 년 5 월 [통권 제37호]  /     /  작성일20-05-29 12:48  /   조회4,386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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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을 봐도 어디에나 있고 일상 가운데도 늘 맞닥뜨리는 것이 화이다. 화는 터뜨려도 문제요 참아도 독이 된다. 부처님은 탐진치를 삼종 세트로 묶어서 화가 독이 된다고 경계하셨다. 삼독 중에 화는 자기 몸과 마음을 상하게 하고 친한 사람과의 관계를 끊어놓기도 하여 인생에 미치는 영향이 심대하다. 항상 제 마음을 지켜보고 경계하지 않으면 방심하는 사이에 쌓여있던 화가 튀어나오거나 미처 표출되지 못한 화는 억눌린 채로 사람을 우울하게 만든다. 수행을 많이 한 사람도 화 한 번을 참지 못해 뱀의 몸을 받았다는 전설이 강원도 어디쯤에 내려온다.

 

부처님 제자 중에 가장 똑똑했던 사리불도 가끔 화를 내는 습관이 있었다. 그와 관련해서는 이런 이야기가 전한다. 멀고 먼 과거 생에 열심히 수행하고 있는데, 지켜보고 있던 마왕이 샘이 났는지 그를 시험에 들게 하고자 눈을 하나 빼달라고 했다. 사리불은 중생을 위해 신명을 바치겠다고 크게 발심한 터라 이까짓 눈쯤이야 하고 빼주었다. 옳거니, 걸렸구나 하면서 마왕이 그걸 땅에 버렸다. 내동댕이쳐진 자신의 눈알을 보고 그만 화를 내는 바람에 사리불은 오래 쌓은 수행에서 퇴보했다. 마왕에게 패한 그가 반성을 하고 억겁 동안 각고의 정진을 쌓아 부처님을 만났다.

 


 

 

그는 부처님 앞에서 자신의 수행을 이렇게 소개한다. “저는 아주 먼 겁 전부터 심안이 청정하여 모래알 같이 수많은 생을 받았던 일을 다 기억하며, 세간 출세간의 갖가지 변화를 한 번 보면 통달하여 무장애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대단한 사리불도 그때 화를 냈던 종자가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가끔 돌발하였기에 ‘사리불의 진습(嗔習)’이라는 표현으로 『영락경』과 『능엄경』에 회자되는 불명예를 얻었다. 수행자에게도 화는 그만큼 다루기 힘들다는 얘기다.

 

수행을 모르는 보통 사람으로서 나는, 화나는 일을 대할때마다 어쩌질 못하는 편이다. 상대가 나보다 세면 더 맞을까 겁이 나서 우물쭈물하다가 화낼 타이밍을 놓친다. 욕이라도 하면서 덤벼볼 걸, 하고 뒤늦은 후회를 하지만 그땐 벌써 속이 시끄럽다. 상대가 나보다 약한 경우는 착한 척 하느라 끓어오르는 화를 누르고 뒤에 가서 괘씸해한다. 이러다 보니 오랫동안 키워왔던 분노가 어쩌다 불쑥 튀어나오면 정도를 넘는다. 그 결과 오랜 친구를 몇 잃고 나서야 화에 대해 얼마나 미숙한지를 돌아보게 되었다.

 

울화병 쌓아가면서 얻은 교훈은, 화를 담을 나의 용량을 검토하는 것이다. 애초에 소화할 능력도 없으면서 근기를 헤아리지 않고 참기만 했기 때문에 세포 하나하나에 숨어있던 분노가 재앙을 자초한 면이 있다. 이런 반성 끝에 이젠 생각을 좀 하고 화를 내보기로 했다. 어디까지 참을 건가, 어디까지 낼 건가, 누구에게 낼 건가, 무엇에 대해서 낼 건가, 언제 낼 건가…. 이런 것들을 생각하고 선을 정한다. 나를 화나게 한 그 사람에게, 그 사건에 대해서만, 그 일이 일어난 즉시, 선을 넘지 않고 화를 내기로 방침을 정했다. 이 방침이 부처님의 가르침에는 어긋나겠으나 우선 내 속이라도 편할 것 같다. 그러나 이 선을 지키면서 화를 내기란 역시 쉽지 않다.

 

화낼 일에 화를 내자고 결정한 데는 화가 무조건 나쁜가 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관찰하고 사회를 관찰해보면, 화를 냈을 때 그에 따르는 부작용에는 나쁜 쪽도 있지만 좋은 쪽도 있다. 여야가 뒤바뀐 이번 총선도 그렇게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놈이 그놈인 중에 덜 싫은 놈 뽑다보니 어쩌다 예상외의 결과가 나온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권자들이 화가 났다는 사실만은 틀림없이 보여준 선거였다.

 

유권자들이 화가 난 이유를 들어보자. 우선 20~30대는 눈에 띄게 높아진 투표율이 분노 게이지를 보여준다. 부모 세대의 무지와 욕망이 자식 세대에게 헬조선이라는 과보를 안겨주었고, 그 결과 흙수저를 든 젊은이들을 투표장으로 이끌었다. 여권의 표밭인 강남 사람들도 화가 나서 더러 야당을 찍었다고 한다.

 

강남의 아줌마들이 화난 이유는 믿거나말거나 ‘태양의 후예’와 대통령이 함께 찍은 사진 때문이라고 한다. 강남 아저씨들이 화난 이유는 테러방지법에 있다고 한다. 핸드폰까지는 참았는데 통장 뒤지는 건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다나. 흙수저와 금수저를 동시에 화나게 할 수 있다니, 우리 정부여당은 참 신통하다.

 

호남 사람들 역시 단단히 화가 났던 모양이다. 세간에 떠도는 말로 홧김에 서방질을 했건, 따끔한 회초리를 들었건 제1야당에 대한 오랜 지지를 거두고 제3당을 탄생시켰다. 홀대받는 건 호남 사람들만이 아니어서, 없이 살고 무시당하는 전국의 성난 유권자들이 여당에 표를 주지 않았다. 덕분에 호남당이라는 딱지가 붙었던 제1야당은 전국정당이 되었고, 야권의 분열로 압승을 예상했던 여당이 정신줄 놓고 있다가 호된 회초리를 맞았다. 성난 민심이 무능한 놈과 오만한 놈을 동시에 때려주는, 일타쌍피의 심판을 내린 선거였다.

 

화난 사람들의 공업(共業)이 이런 결과를 가져온 것을 보면, 화낼 일에 대해서는 화를 참지 말 일이다. 화를 언제 어디서 어떻게 낼 것인가. 선거가 딱 좋은 기회다. 지금은 화염병과 짱돌을 들지 않아도 이 제도를 통해 점잖게 분노를 표출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런 장을 만들기까지 프랑스에는 왕을 단두대에 보낸 성난 군중이 있었고, 영국에는 차에 깔려가면서 투표권을 얻어낸 여자들의 함성이 있었고, 우리나라에도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 바친 이들이 많다. 분노가 두려움을 넘어선 중생의 공업 위에 이번 선거가 서 있는 것이다.

 

다음 선거까지도 화는 쌓일 것이다. 집권당은 예의 그 오만을 벗지 못할 테고, 잘한 거 없이 표를 가져간 야당도 환골탈태할 것 같진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음 번 선거에는 노구를 무릅쓰고 선거감시단에 들어가 사전투표함 지키는 걸로 ‘몸빵’이라도 하면서 분노를 다스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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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혜
불교학을 전공하였고, 봉선사 월운 스님에게 경전을 배웠다. <선림고경총서>편집위원을 역임했고 『승만경』, 『금강경오가해설의』, 『송고백칙』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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