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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스승, 성철]
“큰스님 말씀 따라 오직 정진에만 힘쓸 터” 선방 수좌 원유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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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주  /  2013 년 10 월 [통권 제6호]  /     /  작성일20-05-29 13:58  /   조회6,518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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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스승, 성철/

선방 수좌 원유 스님

 





지독했던 여름 더위 때문이었을까? 도심을 벗어나 맞는 가을바람은 청량했다. 여름내 지쳐보였던 초목(草木)들도 다시 기운을 차린 듯 바람과 밀담을 주고받고 있었다.

 

취재를 위한 출장은 주로 서울 이남이었지만 이번에는 정말 오랜만에 서울보다 북쪽, 파주 광탄을 향해 차를 달렸다. 가끔은 가던 길이 아닌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나는 것도 쏠쏠한 재미가 있다.

1시간 30분여를 달려 도착은 곳은 상적광선원(常寂光禪院). 성철 스님의 제자 원유 스님이 산철이면 주석하는 곳이다. 법당 하나와 요사채 하나가 전부인 작은 토굴이다.

 

원유 스님은 토굴 옆 텃밭에서 객(客)에게 준다며 참외와 오이, 토마토를 따고 있었다. 덕분에 허기진 배를 채운 뒤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우주의 근원적인 진리를 상징하는 부처님인 비로자나불이 계신 곳이 바로 ‘상적광토(常寂光土)’잖아요. 지금 우리들이 발을 딛고 있는 이곳에 상적광토를 만들어 보고자 육바라밀과 팔정도를 바탕으로 참선 수행과 아비라기도, 삼천배 등을 통해 정진하는 도량으로 가꾸어 보려 하고 있습니다.”

 

스님은 상적광선원의 의미에 대해 먼저 전했다. 다음 이야기를 하려던 찰나 성철 스님의 친필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성철 스님이 생전에 자주 찾아뵙고 가르침을 청했던 울산 석남사 비구니스님들에게 내려준 것이라고 한다. 잠시 읽어 보았다.

 


객을 위해 마련해준 소박한 간식. 참외와 오이

 

“현세는 잠깐이요, 미래는 영원하다. 잠깐인 현세의 환몽에 사로잡혀 미래의 영원한 행복을 잃게 되면 이보다 더 애통한 일은 없다. 만사를 다 버리고 오직 정진에만 힘쓸지어다. 화두를 확철히 깨치면은 미래겁이 다하도록 자유자재한 대행복을 얻나니라. 깨치지 못하고 무한히 연속되는 생사고를 받을 적에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리오. 신명을 돌보지 말고 부지런히 참구하라.”

 

한눈팔지 말고 정진에만 힘쓰라는 당부의 말씀이다. 원유 스님이 부연 설명을 했다.

“간화선(看話禪)의 핵심이 이 글에 다 들어 있습니다. 고통이 없는 영원한 행복이 바로 부처님의 깨달음 속에 있다는 말씀이죠.”

성철 스님의 가르침을 다시 한 번 확인한 뒤 원유 스님과의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했다.

 

백련암에서 ‘월반’한 사연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님이 돌아가셨어요. 어린 나이였지만 적잖은 충격을 받았죠. 그 후 대학 2학년 때 저에게는 어머니나 다름없었던 큰누님이 또 돌아가셨어요.

대학에 입학하면서 전공과 다르게 철학, 종교에 심취해 있었는데, 큰누님이 돌아가시니 마음이 엄청 어지러웠습니다. 생사(生死) 문제가 화두가 되어버렸습니다. 불교관련 책들도 많이 봤던 터라 특히 불교에 더 빠져 들었었는데, 마음도 추스를 겸 고등학교 때 은사님(교장 선생님)을 찾아 뵙고 저의 고민을 말씀드렸습니다. 사실 출가할 생각을 가지고 은사님을 만났습니다.

 


상적광선원 전경

 

고등학교 은사님께서는 출가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며 성철 큰스님을 추천해 주셨습니다. 당시 은사님께서는 여러 선지식들과 인연을 맺고 있었는데, ‘공부를 하려면 성철 스님한테 가야 한다’며 큰스님을 추천해 주신 것입니다.”

은사님의 얘기를 듣고 원유 스님은 출가를 확신했다. 출가하겠다고 생각하니 속세에 있는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그래서 스님은 바로 군 입대를 했다. 군 문제를 해결하고 출가하기 위해서다. 입대해서도 스님은 하루하루 마음공부를 한다고 생각하며 군 생활을 마쳤다. 제대한 뒤 스님은 은사님의 추천대로 해인사 백련암으로 갔다. 1984년 8월이었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백련암에 도착하니 수많은 신도들이 아비라기도를 하고 있었다. 백련암 관계자(?)에게 “출가하러 왔다.”고 얘기했지만, 그 관계자는 아비라기도로 경내가 번잡하니 해인사 청량사에 가서 며칠 기다리라고 했다. 아비라기도가 끝난 뒤 스님은 다시 백련암으로 올라가 정식으로 출가를 했다.

 

“처음 백련암에 갔을 때 멀리서나마 큰스님을 잠깐 뵈었습니다. 그리고 정식으로 출가할 때 다시 인사를 드리고 삼천배를 했습니다.”

스님은 “고됐지만 재밌는”행자생활을 했다고 한다. 하루는 성철 스님이 갑작스레 전체 백련암 대중을 다 불렀다.

나이가 많았던 공양주 보살이 다래넝쿨을 따고 있는 것을 본 성철 스님은 “젊은 너거들이 가서 도와주라.”며 ‘번개울력’을 시킨 것이다.

 

대중들이 다 같이 울력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속가 어머니가 백련암에 왔다. 막내아들이 출가생활을 잘하고 있는지 궁금해 진주에서 백련암까지 찾아 온 것이었다.

 

대중들과 다래넝쿨을 땄다는 말씀을 드리니 어머니는 외할아버지 얘기를 전해줬다. 어머니가 처녀시절에 외할아버지가 여름 상당기간 소식 없이 집을 비워 온 가족들이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금강경』한 권과 다래 잎을 가지고 집에 돌아왔다. 알고 보니 용성 스님이 주석했던 함양화과원에서 하안거 정진을 했던 외할아버지가 용성 스님에게서 경전과 다래 잎을 받아 귀가한 것이었다. 어머니는 다래를 수확했다는 스님의 말에 외할아버지가 생각나 당시 일화를 전했다. 용성 스님 회상에서 정진했던 외할아버지와 출가해 스님이 된 막내아들이 많이 닮았다고 어머니는 항상 얘기했다고 한다. 외할아버지는 춘강 강대연 선생으로 그 당시 진주에서 유명한 재야 유학자였다.

 

원유 스님 역시 다른 사형사제들과 마찬가지로 ‘백련암코스’로 공부를 했다. 일본어를 쉽게 공부하기 위해 스님은 일본어 소설『설국』을 읽었다. 그리고『불교성전』을 봤다.

그런데『불교성전』이 너무 두꺼워 쉽게 진도를 나가지 못했다.

“빨리 참선을 하고 싶은데, 두꺼운 책을 앞에 두니 ‘어느 세월에 공부하나?’이 생각만 들었습니다. 사실 출가 전에 불교 책을 많이 봤기 때문에 조금 지루한 생각이 들기도 했고요. 그래서 큰스님께『육조단경』을 보고 싶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혼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제 말씀을 듣고 조금 있다가 ‘원택 스님한테 책을 받으라’고 하셨어요. 근데 잠시 후 큰스님께서 부르시더니 저를 장경각에 직접 데리고 가셔서『육조단경』을 꺼내 주셨습니다.”

 


성철 스님의 친필. "한눈 팔지 말고 정진에만 힘쓰라."라는 가르침이 담겨 있다.

 

일종의 ‘월반’이었다. 스님은 성철 스님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육조단경』을 보기 시작했다.

“‘자성자오 돈오돈수 역무점차(自性自悟頓悟頓修亦無漸次)’에는 큰스님께서 각 글자마다 동그라미를 해 두셨어요. 또 다른 부분에도 수많은 언더라인과 메모가 붙어 있었습니다. 그런 것을 볼 때마다 정말 제 눈이 커지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정말 큰스님께 직접 교육을 받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습니다. 하하.”

 

스님은『육조단경』을 보다 좋은 ‘체험’을 하기도 했다.

“‘설통급심통여일처허공 유전견성법출세파사종(說通及心通如日處虛空唯傳見性法出世破邪宗)’즉, ‘말과 마음을 통하고 보면 해가 허공에 있는 것 같나니 오직 견성하는 법을 전하여 세간의 삿된 종을 부순다’는 구절을 보는 순간 제가 밝아지는 느낌이 들었어요. 뭔가 표현하기 어려운 환희로운 경지였어요. ‘체험’을 하고 나서는 더 신이 나서 공부를 했던 것 같습니다.”

 

‘월반’을 했던 원유 스님은 ‘백련암 코스’를 다 마치지 않고 선방에 갔다. 성철 스님은 ‘코스’를 다 마치고 선방에 갈 것을 주문했지만『육조단경』과『전심법요』만 보고 선원에 방부를 들였다. 원유 스님은 “그때 큰스님 말씀대로 차분하게 공부를 한 뒤 선방에 갔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고 아쉬움을 전했다.

출가 후 사미계를 받고 2년여 동안 백련암에서 성철 스님을 시봉한 원유 스님은 본격적으로 참선 정진을 시작했다.

 

천둥번개와 같았던 큰스님의 가르침

 

원유 스님이 제일 처음으로 방부를 들인 곳은 지리산 천은사 방장선원이다. 그 후 문경 봉암사, 곡성 태안사, 구례 화엄사, 하동 쌍계사, 순천 송광사, 장성 백양사, 문경 대승사선원 등에서 서옹, 서암, 혜암, 법전, 청화, 진제 스님 등 당대의 선지식(善知識)을 모시고 공부했다.

 

“대승사 21일 용맹정진만 3번을 했습니다. 또 최근에는 공주 학림사 오등선원에서 대원 스님을 모시고 정진하고 있습니다. 이번 동안거까지 하면 3년 동안 오등선원에 있는 셈입니다.”

스님은 성철 스님에게 받은 ‘이 뭣고’화두를 하고 있다.

원유 스님 역시 처음에는 마삼근(麻三斤) 화두를 받았지만 나중에 성철 스님께 직접 ‘이 뭣고’를 다시 받았다.

 

“출가한 지 30년이 다 되어갑니다. 처음에는 몇 시간씩 대중교통을 이용해 선방에 찾아가 방부를 들이곤 했습니다. 지금은 전화나 팩스로 방부를 들이는 것이 보통입니다.

전반적인 선방 분위기를 보면 예전에 비해 열정이 좀 식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간화선의 귀중함에 대한 마음도 흐려진 것 같아요. 위빠사나를 비롯한 다른 수행법이 선방에도 많이 퍼져 있어 조금 걱정이긴 합니다. 그래도 전국의 제방선원에서 많은 선지식이 배출되기를 희망합니다.”

스님은 2002년 선방에서의 정진을 잠시 멈추고 인도 보드가야에서 6개월 정도 정진했다. 거기서 티벳불교를 알게 돼 달라이라마를 친견하기도 했다. 또 달라이라마와 밀라레빠 법통의 수행파인 까뀨파 승단의 많은 고승 린포체들을 만나기도 했다.

 


성철 스님 열반 20주기를 맞아 개최된 '추모 특별전시회'에서 작품을 둘러보는 원유 스님

 

“보드가야에서 오체투지 대참회 10만 배를 했습니다. 또 티벳사원에서 정진도 했습니다. 티벳수행을 하다 보니 큰스님께서 말씀하신 수행법과 여러 가지 비슷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백련암에서도 정진을 하기 전에 삼천배를 하는데, 티벳에서도 기본적으로 10만 배 절을 합니다. 백련암에서는 능엄주를 하고 티벳에서는 진언을 10만독 하는 코스가 있어요. 이런 기본 수행을 한 뒤 백련암에서는 참선을 하고 티벳에서는 명상을 합니다. 참회와 정화를 기본으로 참선(명상)을 한다는 것이 상당히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참선수행과 티벳수행을 함께 경험한 스님은 그래서 상적광선원에서 진행하는 아비라기도에서도 전체 24파트 중 12파트는 아비라기도를 그대로 하고 나머지 12파트는 참선으로 진행한다.

인도에서 한참 정진을 하다 스님은 그 당시 강화 연등국제선원의 주지였던 일백 스님으로부터 급히 연락을 받고 귀국을 해 연등국제선원 선원장 소임을 맡았다.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주지소임까지 맡게 되었다.

 

“2005년부터 2008년까지 약 4년 정도 주지 소임을 맡았습니다. 제 공부의 근본이 선(禪)이기 때문에 이를 바탕으로 템플스테이를 비롯한 여러 프로그램을 운영했습니다. 지금 연등국제선원이 다소 어려움에 처해 있다고 들었는데 외국인은 물론 내국인들도 참여할 수 있는 선 프로그램을 만든다면 훗날 좋은 결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잘만 하면 연등국제선원이 한국의 선을 세계의 선으로 키울 수 있는 교두보가 될 수 있다고 봐요. 특히 성철 큰스님의 제자가 이끄는 선 수행 전문도량으로서 연등국제선원이 제 역할을 한다면 간화선의 세계화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원유 스님은 성철 스님을 “천둥번개와 같은 선의 가르침을 주신 분”이라고 밝혔다.

“출가 초기에는 큰스님의 가르침을 제가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공부가 어렵기도 했고 또 그때는 큰스님이 무섭기도 했어요. 안 무서웠으면 많이 여쭈었을 텐데 그러지를 못했어요. 하하.

한창 선방에 다니다 큰스님께서 열반에 드셨던 1993년에 5개월 정도를 가까이서 시봉했습니다. 동안거를 해제하고 여름까지 큰스님을 모셨는데, 그때는 비교적 건강하실 때였습니다. 그래서 11월에 열반하시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큰스님의 말씀들이 저에게 큰 공부 지침이 된다는 게 너무 감사할 뿐입니다.”

 


텃밭을 가꾸는 원유 스님

 

원유 스님은 “큰스님께서는 한국불교 선의 정통성은 돈오돈수사상에 있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고 전했다.

“큰스님의 법신사리라고 할 수 있는『선문정로』와『본지풍광』, 그리고 <선림고경총서> 등을 경책으로 삼아서 대오(大悟)의 경지를 체득하기 위해 신명을 바쳐서 공부할 것 입니다.”

온화한 표정이었던 스님의 얼굴이 어느새 결연하면서도 비장한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원유 스님의 모습을 보며 쉼 없는 정진을 당부했던 성철 스님의 모습이 떠올랐다. 훌륭한 선지식 아래서 게으른 제자가 나올 수 없음을 다시 확인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마당으로 나오니 역시 가을바람은 청량했다. 시원한 마음으로 다시 서울로 발걸음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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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주
백련불교문화재단 부장. 현대불교신문 기자,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월간 <불광> 기자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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