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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 큰스님 추모 기사]
한 덩이 붉은해가 푸른산에 걸렸도다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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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타스님  /  2013 년 12 월 [통권 제8호]  /     /  작성일20-05-29 14:14  /   조회5,683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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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 큰스님 열반 20주기 추모 특집

일타 스님(해인총림 율주) 

 

이번 호까지는 성철 큰스님 열반 20주기를 맞아 각계 인사들께서 써주셨던 추모의 글을 모아 독자여러분에게 전달하고자 합니다. 추모의 글을 통해 다시 한 번 성철 큰스님의 가르침을 되새기고, 각 필자들께서 담아 내 주셨던 추모의 마음을 같이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 편집자 

 

산승은 오직 청산에 머물 뿐

 

1955년 교단정화 후 초대 해인사 주지로 임명되었으나 취임을 마다하고 팔공산(八公山) 성전암에 은거, 주변에 철조망을 치고 세인의 범접을 막을 만큼 자신에게 철저하셨다.

 

1967년 정미년에 비로소 해인사에 복귀하여 해인 총림 방장에 추대되고 백일법문을 개시, 인간 천상에 무량중생을 화도(化度)하기 시작하셨으나 이후 한 번도 산문을 벗어나 세인의 눈에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다. 속인들은 무엇을 조금 알면 발표하고 싶어하지만 그럴수록 스님은 더욱 숨고 나타나지 않으셨다.

 


성전암 시절의 성철 스님(일타 스님 원고) 

 

1976년에는 『한국불교의 법맥』을 출간하여 법통을 세우셨다. 이는 문경 봉암사시절 이전부터 염원해 오신 일로 흐려져 가는 한국불교의 승풍을 바로 잡으려는 의지이셨다.

 

1981년 신유 1월, 대한불교조계종 제7대 종정에 추대되고 1991년 신미에는 제8대 종정에 재추대되셨지만 스님께선 늘 말씀하셨다. “내가 무슨 종정하고 싶어 하나. 한국불교의 발전을 원할 뿐이다.”라고 묵인하셨던 것이다.

 

1981년 12월에는 『선문정로』를 출간하셨다. 그리고 1982년에는 『본지풍광』어록집, 1986년에는 『돈오입도요문론 강설』과 『신심명 증도가 강설』등 어록 10여 권을 출간하고, <선림고경총서> 37권도 번역 완간케 하셨으니, 큰스님의 위신력은 전대미문의 희유성사가 아닐 수 없다. 이와 같이 종통(宗通)과 설통(說通)을 겸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종단행정에는 일미신전연(一味信前緣)이라며 국정자문위원회에도 나아가지 아니하고, “산승은 오직 청산에 머물뿐”이라고 하셨다.

 

미국 버클리대학의 랭카스터 교수가 팔만대장경 목록을 영어로 번역, 책을 만들어 해인사에 기증하러 온 일이 있었다. 그는 스님을 만나려고 세 번이나 백련암엘 올라갔으나 끝내 만나 뵙지 못했다. 스님은 그때마다 시자를 불러 나무하러 가자며 산엘 오르셨다. 랭카스터 교수는 돌아가 성철 스님에 관한 글을 썼는데 의문부호 세 개를 나란히 썼다.

??? “도대체 어떤 분일까?”

 

그렇게 세속에 몸 나투길 꺼려하셨던 스님이기에, 흔히들 스님께서 종단 발전에 무관심하셨던 어른으로 알고 있지만 이는 전혀 사실과 다르다.

 

후학들에게 당부하는 말씀으로는 “항상 승려의 본분을 잊지 말라. 부지런히 정진하라. 시간은 사람을 위해 기다리지 않는다.”는 말씀이었다. 내가 30년 전 태백산중 토굴에서 지낼 적에 한 말씀 적어 보내주셨다. “사람 노릇하려면 공부 못한다. 공부는 천대받는 생활에서 시작된다. 고독은 공부의 대협조자이다. 하루에 네 시간 이상 자지 마라. 고인의 걸식정신을 잊지 마라. 한 생각만 일으켜도 화두 간단이 되거든 하물며 이야기하랴. 용맹정진하라.” 나는 이 말씀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고 싶다.

 

스님께서 수좌들에게 말씀하신 오계는 유명했다. 함부로 나다니지 마라, 말을 너무 많이 하지 마라, 책 많이 보지마라, 음식을 조심해서 먹어라, 다시 말해 간식이나 잡식을 하지 마라는 말씀이시다. 그리고 잠을 너무 많이 자지 마라 등이 그것이다.

 

우리 종단 쪽에는 종정 훈시가 있다. 화합하고 사랑하고 공경하라, 지계청정하라, 원력광대하라, 사찰 기본 재산을 축내지 마라, 승이 존중을 받으면 불법도 존중될 것이요, 승이 사람들에게 경멸을 받으면 부처님이 경멸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말씀이었다. 또 불조심에 대한 경계를 항상 하셨다.

 

선승이면서도 교리에 밝은 것이 큰스님의 특징이었다.

뜻이 통하면 말씀도 많이 하신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아침 공양 드시고 나서 청담 스님과 두 분이 물가로 양치질하러 가서 말씀을 나누다 보면 점심 종이 울려 내려오실 정도였다.

 

큰스님의 박학다식은 여러 가지 예를 들어가면서 말씀하시기 때문에 듣는 이로 하여금 누구나 완전히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없게 하고, 그 일을 스스로 실행에 옮기게 하곤 하셨다. 스님은 성격이 워낙 단호한 분이어서, 이거면 이거고 저거면 저거였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을 못 참으셨다.

 

그러시면서도 천진난만한 아이들을 무척 좋아하셨다.

 

방에 어른들은 못 들어오게 하고 온통 아이들만 들어오게 해서 함께 놀곤 하셨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도 스님을 스스럼없이 대하곤 해서, 스님 방문 앞에 가서 “어이, 방장! 바나나 준다더니 안 주나?”하고 소리 지르는 것도 예사였다.

스님의 이러한 모습들은 보는 이들을 흐뭇하게 하였다.

 

후진에게 원전 읽히기 염원

 

후진양성에 대한 염원은 많으셨는데 현실이 따라주지 않은 것 같았다. 해인총림에 수억의 공사비를 시주받아 승가대학 교사를 지었으나 결실을 보시지는 못한 것 같다. 교과과정을 새로 편성하고 제반시설을 갖추어서 대학의 면목을 세우려 했지만 학생과 교수가 일반이 아니기에 이러한 인적자원이 부족했던 것이다.

 

고 장경호 거사는 불교에 대해서 좋은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었다. 어느 날 그분이 스님께 찾아와 한국불교를 위해서 무엇을 했으면 좋겠느냐고 여쭈었다.

 

스님께서는 학자를 키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교수들을 총망라해 범어(梵語)학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스님의 생각이셨다. 범어, 즉 산스크리트어를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산스크리트어를 공부해서 원시경전을 연구해야만 불교학문이 발전된다는 말씀이었다.

 


평생의 도반인 청담 스님과 함께 한 모습(일타 스님 원고) 

 

일본은 70년 전부터 산스크리트어를 개발, 활발한 작업을 하고 있다. 그래서 일본불교학이 현대화했고 크게 발달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장경호 거사는 이후 대원정사를 만들었다. 스님은 산속에 불교사관학교를 만들어 인재를 키우고자 하셨지만 거사의 생각은 달랐다. 서울에다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큰스님의 범어학회 설립 주장은 하나의 신념이셨다.

 

덕산거사 이한상 씨가 어느 날 큰스님을 찾아갔다. 불심이 있던 그 분 역시 불교를 위해 좋은 일 할 생각으로 큰스님을 찾았던 것이다. 스님은 그 분을 봉암사로 데리고 가셨다. 봉암사에 총림, 즉 종합적이고 보편적인 특수 수도원 설립에 뜻을 두신 까닭이었다. 그러나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눈보라가 치고 길은 질고 몹시 험했다. 차가 흙길에 빠지고 좋지 않았다. 이한상 씨는 그것으로 인해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큰스님의 말씀에도 건성으로 대답했다. 

 

안일한 수행자 일깨운 돈오돈수

 

큰스님은 선공부를 가장 으뜸으로 생각하셔서 언제나 참선 공부 많이 하라는 말씀을 모두에게 빠뜨리지 않으셨다.

큰스님은 언제나 말끝에 우습다는 말씀을 많이 하셨다.

쓸데없는 소리를 많이 하셨다는 뜻이었다. 옛스님의 말씀에 ‘제득혈루무용처(啼得血淚無用處)라, 두견이 피눈물이 나도록 울어도 용처(用處)가 없다.’는 말이 있다. 스님은 또 누가 나한테 뭐라고 해도 나는 밥 세 끼면 충분하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당신 고집대로 한평생 살 테니 쓸데없는 소리 말라는 것이었다. 그것이 스님의 주관이셨다. 자기 할 일만 꾸준히 하면 된다는 말씀이다. 스님은 산스크리스트어, 티벳탄, 중국어, 일어, 영어, 독어를 혼자 힘으로 터득하신 분이셨다. 살아계실 때 <라이프>지, <타임>지를 늘 보시고 시간이 날 때마다 제자들을 불러 필요한 대목을 번역하게 하셨다. 잘못하면 쭉쟁이, 천치라고 꾸중을 하시며 일일이 그 뜻을 해석해 주셨다.

 

첨단 과학과 그 이론, 그리고 심령과학에도 상당한 관심이 많으셨다. 그것은 윤회전생을 심령과학에서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해서 관심이 있으셨던 것이다. 자료 수집도 많이 하셨다.

 

큰스님은 참으로 많은 일을 하신 분이다. 평생을 산중에서만 지내셨으니 그것은 누구도 섣불리 흉내 낼 수 없는 것이다. 고관대작들이 스님을 만나기 위해 밖에서 한두 시간씩 기다려도 만나기가 어려웠다. 많은 수행자가 돈오점수의 안일한 타성에 젖어 있을 때, 향상일로로 진취적이지 않고는 자기발전도 못하고 부처님의 혜명도 속이는 짓임을 들어 돈오돈수를 주창하셨다.

 

절대절명의 긴박한 의지가 아니고서는 나태해질 수밖에 없음을 간파하셨던 큰스님. 꼭꼭 숨어계신 듯 하지만 이 나라 불교계의 앞날을 구석구석 염려하셨던 어른. 아마도 신라의 원효 스님 이후, 스님만큼 적나라하게 당신 전체를 드러내놓고 사신 분도 없을 것이다. 스님은 모든 명예에 초연했고 오직 정법·정맥을 위해서 사신 분이었다.

 

1993년 11월 4일 새벽, 거처인 해인사 퇴설당(堆雪堂)에서 상좌들을 부르고 후사를 부탁하시며, “때가 되었다.”하시고 일필휘지(一筆揮之)로 임종게를 수서(手書)하시되, 

 

生平을 欺誑男女群하니

彌天罪業이 過須彌로다

活陷阿鼻恨萬端이여

一輪吐紅掛碧山이로다 

 

일생 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산 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 갈래나 되는지라

둥근 한 수레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하시고, 편안히 열반에 드셨다.

세수는 82세가 되시고, 법랍은 56년이시다.

큰스님은 평생을 불조(佛祖)의 말씀대로 살다 가셨다. 금생에 큰스님으로 계셨던 성철 스님은 내생에도 큰스님이 되어 돌아오실 것이다.

‘향’은 불에 타도 향내는 천하에 진동하고 있다. 

 

-「대중불교」 1993년 12월호 중‘성철 큰스님 추모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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