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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스승, 성철]
“타지 않는 바위가 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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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주  /  2014 년 4 월 [통권 제12호]  /     /  작성일20-05-29 14:22  /   조회5,412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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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 겁외사 주지 원암 스님 

 

 


 

 

겁외사(劫…外寺). 성철 스님의 생가가 있던 경남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에 세워진 절이다. 3년간의 불사를 거쳐 2001년 3월에 모습을 드러냈다.

 

‘시간 밖의 절’,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절대적 세계’. 겁외사로 향할 때면 항상 그 뜻을 음미해본다. 생각이 시공(時空)을 넘지 못하고 허공에서 한참 헤매고 있을 때쯤 겁외사에 도착했다.

 

절에 도착하니 일주문 대신 18개의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거대한 누각이 맨 먼저 눈에 들어온다. ‘지리산겁외사’라고 쓰인 현판도 있다. 누각을 통과해 다시 보니 벽해루(碧海樓)다. 벽해루는 성철 스님이 평소 즐겨 얘기하던 ‘홍하천벽해(紅霞穿碧海: 아침의 붉은 해가 푸른 바다를 뚫고 솟아오른다)’라는 말에서 인용한 것이다.

 

벽해루 앞마당에는 성철 스님 입상(立像)과 대형 염주, 목탁이 자리하고 있다. 대웅전은 그 옆에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대웅전 내부에는 성철 스님의 진영이, 외벽에는 스님의 출가와 수행, 법문, 다비 장면 등을 묘사한 그림이 인상적으로 펼쳐져 있다. 성철 스님이 어머니를 모시고 금강산을 유람하던 모습을 묘사한 그림에는 무언가 모를 애틋함이 묻어난다.

 


겁외사는 많은 불자들이 찾는 불교성지다 

 

발걸음을 경내 안쪽으로 돌렸다. 혜근문(惠根門)을 지나자 정면에는 성철 스님 선친의 호를 딴 율은고거(栗隱古居)가 보이고, 오른쪽에는 사랑채 격인 율은재(栗隱齋), 왼쪽에는 포영당(泡影堂)이 자리하고 있다. 율은고거에는 해인사 백련암에서 생활할 때의 방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고 율은재와 포영당에는 스님의 누더기 옷과 고무신, 지팡이, 친필자료, 안경 등이 전시되어 있다.

 

혜근문을 나와 이번에는 겁외사 맞은편으로 갔다. 성철 스님 추모관 불사 현장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겁외사 주지 원암 스님이 공사 관계자들과 머리를 맞대며 불사 하나하나를 챙기고 있었다.

 

“문도스님들이 계시는 절에 가보면 큰스님 진영이 대웅전 한편에 조그맣게 모셔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제자들과 신도들이 정성으로 경배하고 있지만 그리 보기 좋지는 않았습니다. 꼭 큰스님이 부처님 집에 전세살이 하고 있는 모습 같아 보였지요. 기회가 되면 온전한 곳에 큰스님을 제대로 모시고 생전 가르침을 올곧게 실천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야겠다는 바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번 추모관 불사가 시작되었나 봅니다.”

 

지상 3층 규모의 추모관에는 성철 스님의 설법상을 모신 메인 홀과 각종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는 강의실 겸 좌선실, 성철 스님의 생전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전시 공간 등이 들어선다. 추모관 외벽에는 성철 스님 출가송과 오도송을 형상화한 이미지가 생전 사진과 함께 꾸며지고 성철 스님 친필 일원상과 불(佛)자를 기본으로 한 <보현행원품>과 <금강경>이 건물 좌우 벽에 새겨질 예정이다.

 


겁외사 맞은 편에 조성되고 있는 성철 스님 추모관 

 

이를 위해 원암 스님은 최근 며칠간 출가송과 오도송에 쓰일 사진들을 직접 디자인하기도 했다. <보현행원품>과 <금강경>역시 원암 스님이 직접 사경(寫經)한 것을 기본으로 구성된다. 그러고 보니 원암 스님은 사경을 예술로 승화시켰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남다른 실력과 안목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절에서 행사를 하고 난 다음 불자들에게 선물로 주는 것들을 보면 일반 사회의 그것과 다르지 않아요. 뭔가 특별한 것을 신도님들에게 줄 수 없을까 고민하다가 해인사 청량사에 있을 때부터 제가 직접 사경을 하기 시작했죠. <보현행원품>과 <금강경>은 5번 정도, <능엄주>는 범어로 30번 정도 사경을 했습니다. 그 외 것들까지 모두 합하면 지금까지 50여 작품을 한 것 같습니다.”

 

추모관에 걸린 ‘퇴옹전(退翁殿)’글씨 역시 원암 스님이 제작한 것이다. 스님의 뛰어난 감각을 엿볼 수 있을 정도로 글씨가 눈에 쏙 들어온다. 겁외사와 추모관을 둘러본 후 자리를 옮겨 원암 스님과 마주 앉았다. 본격적으로 스님과 스승 성철 스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달콤살벌했던’ 백련암

 

“제가 군 제대할 즈음 큰스님께서 조계종 종정에 추대되셨습니다. 그때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山是山水…是水…〕’는 법어를 내리셨잖아요. 그 법어는 당시에 전국에서 모든 국민들에게 회자될 정도로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저도 그 법어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글은 알지만 깊은 본뜻은 몰랐지요. 저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친 것 같습니다. 교회에서 살다시피한 제가 그 법어를 접한 후로 당시 송광사에 계시던 구산 큰스님 법문도 몇 번 들었습니다. 그러다 당대 최고 선지식인 성철 큰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해야겠다 결심하고 모든 것을 정리한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해인사 백련암으로 떠났습니다.”

 


성철 스님의 친필 일원상에 보현행원품을 사경한 작품 

 

스님은 서울에서 첫새벽 버스에 몸을 실어 1983년 9월 1일에 해인사 백련암에 첫발을 디뎠다. 가을이 시작되고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하던 가야산에서 스님은 출가자로서의 삶을 서원했다. 다른 출가자와 마찬가지로 백련암에 도착해 스님은 일주일간 삼천배를했다.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어요. 나의 한계를 시험하는 것 이라고 생각하니 오기가 발동했습니다. 또 스님이 될 수 있느냐의 기로에 섰기 때문에 무조건 해내야 한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쌀쌀함이 깃든 가을임에도 등에는 소금꽃이 피어났다. 삼천 배를 하는 동안에는 다리가 휘청거려 화장실에도 가기 힘든 후유증도 겪었다. 다행히도 사형(師兄)인 원영 스님의 도움으로 무사히 삭발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제가 출가했던 한 해에 아마도 100여 명 정도가 출가하러 백련암에 드나들었습니다. 대부분 첫 관문인 일주일 동안의 매일 삼천배를 하지 못하거나 큰스님 호통을 이기지 못해 집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 해 원암 스님만 계(戒)를 받았다.

 


성철 스님 사리탑을 기본 구도로 범어 능엄주를 사경한 원암 스님의 작품 

 

성철스님의 엄격함은 원암 스님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큰스님의 부릅뜬 눈에 압도당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토끼가 호랑이를 만나면 그대로 얼어버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제가 느낀 당시 백련암의 분위기는 ‘살범함’그 자체였습니다.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매사에 조심조심해야 했습니다.”

 

백련암 행자 시절은 쉽지 않은 일정의 연속이었다. “강원도 화천에서 이등병 군생활을 할 때도 겨울에는 손등에서만 피가 났는데, 백련암에서는 손등은 물론 팔뚝 살이 터져 피가 날정도”로 바쁘게 살았다. 여기에 원암 스님에게는 말 못할 고충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언어’의 문제였다. 전라도 출신인 원암스님에게 성철 스님의 따발총처럼 빠른 경상도 사투리는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제3세계 언어’였다. “제가 큰스님 말씀을 잘 알아듣지 못하니 혼나는 것은 둘째치고 수없이 쫓겨날 뻔 했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저 황가 놈…’이라며 큰스님의 꾸중을 들어야 했습니다. 하하.”

 

그렇다고 해서 성철 스님이 제자들에게 항상 겨울 삭풍 같은 존재만은 아니었다. 제자들을 혼낼 때를 제외하면 자상한 ‘할배 스승’이었다.

“행자 때 하루는 공부를 하고 있는데 큰스님께서 제 옆에 앉으시더니 공책에 ‘三日修心千載寶百年貪物一朝塵(삼일수심천재보 백년탐물일조진)-3일 닦은 마음은 천년의 보배요, 100년 동안 탐한 물건은 하루아침에 티끌이라’는 글을 써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자상하게 뜻을 설명해 주셨어요. 그때의 큰스님 표정과 말씀은 아직도 제 기억에 또렷하게 남아 있습니다.”

 


원암 스님이 퇴옹전 글씨를 설명하고 있다1 

 

혹독한 행자생활을 마치고 계(戒)를 받을 때가 되었다. 이때 스님은 ‘원암(圓岩)’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큰스님께서 저에게 법명을 내려 주시며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산에 불이 나도 바위는 안타고 그대로있제. 니도 타지 않는 바위처럼 되거라.’ 그 어떤 것에도 동요하지 말고 묵묵히 정진만 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렇게 스님이 되고 벌써 30년이 흘렀지만 그때의 큰스님 말씀처럼 살고 있지 못한 것 같아 죄송할 따름입니다.”

 

백련암 시절 다른 성철 스님 제자들이 경험하지(?) 못했던 원암 스님만의 일화 하나.

“큰스님께서는 건강한 체질이 아니셨어요. 그래서 저희들이 큰스님 건강을 항상 살펴드려야 했습니다. 하루 일과가 끝나는 저녁이 되면 제자들이 안마를 해드리곤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남의 살을 만지면 스스로 간지럼을 느껴 웃음이 나오는‘버릇’이 있습니다. 어느 땐가 안마를 해드리면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끝내 키득키득 소리를 내며 웃어버렸지요. 큰스님께 ‘이놈이 실성했나?’며 혼이 났습니다. 그러고도 몇 번 더 웃음을 참지 못해 생각해 낸 것이 큰스님께서 저희들을 부르시면 제가 제일 먼저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큰스님 얼굴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발을 마사지 해드렸습니다. 그때서야 제 웃음이 조금 줄었습니다. 하하.

큰스님께서는 제자들과 같이 있을 때면 표정을 쭉 보시고 말을 걸어옵니다. 제 표정이 시무룩하면 ‘황가야! 누가 죽었나? 머 잘못 먹었나?’라고 물으십니다. 제가 ‘아닙니다’하면 제 기분 살려주시려고 이런 저런 공부얘기 등을 해주셨어요. 지금 생각하면 큰스님 말씀이며 일상생활 모든 것이 법문 아닌 것이 없었어요. 큰스님께서는 수없이 저를 일깨워주시는 말씀을 해주셨지만 저의 무지함으로 인해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던 것이 돌이켜 보면 안타깝습니다.”

 

“요즘 계(戒)는 게가 되었는지, 옆으로만 다녀”

 

원암 스님은 백련암에 있으면서 성철 스님으로부터 ‘수행자의 삶’에 대한 여러 당부를 들었다. 소임을 대하는 자세와 수행, 지계(持戒)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말씀이 이어졌다.

“‘중은 빌어먹어야 제대로 공부할 수 있다. 입에 풀칠만 하면 된다. 돈, 여자 좋아하는 놈은 공부하고는 십만 팔천리 떨어진 놈이니 그렇게 알거라. 또 공부하려거든 주지(住持)하지 마라.

아무리 주지소임을 잘 살아도 아예 안하는 것만 못하다. 그리고 중은 계(戒)가 생명이다. 요새 계(戒)는 바다로 갔는지 똑바로 행(行)하라는 계가 옆으로만 가는 게가 되어 버렸다. 니도 정신 똑바로 차리거라, 알것나?’고 당부를 하셨습니다. 제가 죄 지은 것처럼 작은 목소리로 ‘예’하면 큰스님께서 ‘머시라?’고 호통을 치십니다. 그러면 큰소리로 ‘예!’라고 대답을 해야 큰스님께서는 아무 말씀을 안 하셨어요.”

 

성철 스님은 수행자들의 ‘유형’을 근기에 따라 나누기도 했다. 스님에 따르면 ‘내 떡 사소’하며 자기 수행을 자랑하는 사람은 공부도 하지 않고 대중들을 속이니 제일 하근기(下根機)다. 숨어 사는 도인은 언젠가는 남의 눈에 띄게 되니 중근기(中根機)다. 제일 상근기(上根機)는 미친 사람처럼 행동하는 수행자다. 중생을 제도하는 스님은 명리승(名利僧)일 뿐이다.

 

원암 스님은 2년간 백련암에서 성철 스님을 시봉한 뒤 본격적으로 운수납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첫 안거는 지리산 칠불사 선원에서 정진했다.

 

“시작은 거창했습니다. 큰스님께 성불할 수 있는 방법을 배웠으니 이제 열심히 정진만 하겠다고 생각했죠. ‘내 손으로 밥 떠 먹을 수 있으니 빨리 도망가서 공부하자’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도망 가려하니 마음이 아팠어요. 큰스님 방에 불 지피고 청소하며 시봉을 하다 곁을 떠나려고 하니 출가하러 집을 떠날 때도 나오지 않던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부모님 은혜보다 스승의 은혜가 정말 더 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길을 나섰습니다. 부처님처럼 6년만 정진하면 저도 부처가 될 줄 알았는데 돌이켜보니 30년 허송세월만 보냈습니다. 중으로서 제 꼴이 말이 아닙니다. 하하.”

 

원암 스님은 제방선원에서 정진하면서도 문도 차원에서 진행하는 각종 불사에는 언제나 힘을 보탰다. 원타 스님과 함께 해인사 청량사 불사를 진행했고, 성철 스님 열반 후 시작한 사리탑 조성 불사 때도 원택 스님을 도왔다. 또 1999년부터는 함양 남산사를 맡아 오늘날의 가람으로 일신시켰다.

 

“남산사에는 고경선원(古鏡禪院)이 있습니다. 우리 문도사찰 중 유일하게 선원을 운영하는 곳이지요. 큰스님의 가르침이 오롯이 숨쉬고 있는 선원입니다. ‘참선 잘하라’는 큰스님 유훈을 받들어 2002년부터 시작해 지금은 매 안거 때마다 10여 명의 스님들이 함께 정진하고 있습니다. 개원 초기에는 선원운영에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었으나 선원 회주로 계시는 원택 스님과 정인사 원행 스님을 비롯해 원타 스님, 원담 스님, 원천 스님, 원영 스님, 원소 스님, 원여 스님, 원당 스님 등 여러 문도스님들께서도 많은 도움을 주셔서 지금은 여법한 선원으로 손색이 없습니다.”

 

「고경」인터뷰를 위해 만났던 한 스님은 원암 스님을 ‘면도칼’이라고 귀띔했다.“ 평소에는 털털해 보이고 또 대중들과 어울려 농담도 잘 하지만 중요한 일을 할 때면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면도칼입니다. 때로는 너무 꼼꼼해서 주변 사람들이 숨쉬기도 힘들어 할 때가 있어요. 그래서 제가 원암 스님에게 가끔 농담을 합니다. ‘오래 살려면 때로는 대충대충 하는 것도 배워야 한다’고 말입니다. 하하.”

 

원암 스님은 스승 성철 스님을 “우리 시대의 부처님이었다.”고 단언했다. 스승이 계시지 않은 이때 원암 스님의 마음은 어떨까? 다음 답변으로 스님은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제가 추모관에 있는 ‘퇴옹전’글씨의 낙관을 새로 만들어서 찍었습니다. 낙관 글씨는 ‘唯吾悟師(유오오사)’입니다. 오직 깨달음을 스승으로 삼겠다는 뜻이죠. 지나온 세월을 아쉬워하기보다 지금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생각으로 한 번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스님의 미소가 봄볕에 녹아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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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주
백련불교문화재단 부장. 현대불교신문 기자,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월간 <불광> 기자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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