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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탁소리]
큰스님의 저작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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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택스님  /  2014 년 6 월 [통권 제14호]  /     /  작성일20-05-29 14:28  /   조회6,000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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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과 다르게 산사의 초록빛은 더 짙푸르고, 더운 곳은 30℃를 웃도는 익숙지 않은 계절입니다. 요사이 큰스님의 법문인 『백일법문』의 증보판을 준비하느라 느림 가운데 바쁘게 사는 듯한 착각 속에서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백일법문』을 출판하려고 애썼던 날들을 기억해 보니 벌써 35년 전의 일이 되었습니다. 큰스님께서 해인총림 초대방장이 되셔서 1967년 동안거 기간 동안 사부대중에게 100여일 가깝게 법문하셨는데 이 법회를 일컬어 ‘백일법문’이라 하였다 합니다.

 

저는 1972년 1월에 백련암으로 출가하였으니 동참의 기회가 없었고, ‘백일법문’을 녹음한 ‘테이프’가 있는 줄도 모르고 몇 년을 보냈습니다. 백련암에서 행자 시절을 보내고 공양주 소임을 거쳐 큰스님 시찬 생활을 마치니 2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그때는 처음이라 잘 몰랐는데 당시 제가 화두 참선을 하면서 상기병이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늦게 출가했으니 공연한 육단심이 발동되었던 모양입니다.

 

백련암에서 한 3년 정도 정진하다 보니 “골이 깨지는 것”처럼 아파오기 시작했습니다. 참을 수 없어 큰스님께 사정을 말씀드리니, “화두를 억지로 하지 말고 쉬어가며 해야겠다. 원주소임을 맡아봐라.”고 하셨습니다. 늘 혼나기만 해온 절 살림살이인데 겁은 났지만 마땅한 스님도 없고 해서 “쉬어가는 마음”으로 1975년 말쯤에 원주소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한국불교 최고의 법문으로 꼽히는 백일법문 

 

그런데 원주소임 덕분으로 큰스님 방에도 자주 들락거리게 되고 생활에 대한 이런저런 소식을 접하게 되다가 그때 비로소 백일법문 테이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좌복에 앉으면 화두는 어디 가고 머리만 아프니, “잠시 쉬어라.”고 하신 큰스님 말씀도 있고 해서 백일법문 테이프를 뒷방인 제 방에서 듣게 되었습니다.

 

그때 저에게는 “책 보지 말라”는 큰스님의 엄명이 떨어져 있으니 녹음테이프도 마음 놓고 들을 수 없어서 헤드폰이 아닌 이어폰으로, 딴에는 큰스님 모르게 듣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책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귀로 듣는 것이니, 들을 때 뿐 듣고 나서는 잘 기억도 되질 않고 따로 정리도 되질 않았습니다. 한두 달 그렇게 듣다가 ‘이래서는 안 되겠다!’생각하고 녹취록을 만들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러면 나도 보고 또 다른 스님에게 보라’고 전해줄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1970년대만 해도 백련암은 올라오는 길이 제대로 없는 암자길이라 인적이 끊긴 외딴 섬 같은 곳이어서 평소에는 일주일에 두세 명의 참배객을 볼 수 있을까 말까한, 큰절에서 멀고먼 암자였습니다. 그래서 쉽게 일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원주소임 보면서 큰스님 법문을 녹취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일에는 집중이 필요한데 새벽 3시에 일어나고 밤 9시에 취침에 드는데 아침, 점심, 저녁 공양으로 하루가 나뉘고 공부할 시간이 많을 것 같은데도 몇 시간 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일없는 가운데서 큰스님의 일거수일투족에 무의식적으로 신경을 쓰다 보니 녹취정리가 잘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보니 공연히 마음이 바빠지고 초조해갔습니다.

 

그러다 ‘큰 맘’먹고 방에서 꿈쩍도 않고 녹취에 매달리면 하루 한 개를 정리하는데 5~6시간은 족히 걸렸습니다. 큰스님의 말씀이 너무 빨라 10~20초 녹음을 듣고 녹취하고 다시 녹음을 돌리고 하니 녹음기도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하루에 한 개씩 녹취·정리할 수 있는 날도 한 달에 며칠 되지도 않고 어떤 때는 일주일이 지나도 앉았다 섰다 하다보면 한 개도 정리되지 않은 날이 많았습니다.

 

그때 백일법문 테이프가 60개 가까이 되었습니다. 그럭저럭 세월이 가면서 녹취록이 쌓여가고 있는데 70년대 말쯤에 이르러 녹취를 거의 끝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루는 큰스님께서 제 방문을 벌컥 여시더니“이놈아! 뭐하고 있노?”하시면서 고함을 치시는데 얼마나 기절초풍했는지 모릅니다.

 

상기병으로 쉬는 셈치고 원주소임 살라고 하셔서 그래도 참선하는 시늉은 해야 하는데 좌복에는 앉지도 않고 사람은 보이질 않으니 큰스님께서도 꽤나 궁금하셨을 터였습니다. 행자들에게 “너거 원주 어디 갔노?”하고 자주 물으셨을 테니 “이놈이 방구석에 처박혀 뭘 하지?”하시면서 살펴보고 계시다가 오늘 드디어 제 방문을 ‘왈칵’여셨다는 생각이 번개같이 스쳐갔습니다. “니 방에 와봐라!”하시고는 홱 돌아가시는 모습에 찬바람이 쌩 지나가는 듯 했습니다.

 

큰스님 앞에 꿇어앉아서 지나간 세월에 대한 말씀을 드리고, “백일법문은 다 끝내고 상당법어를 녹취하고 있다.”고 말씀드리니, “뭐 상당법문을 듣고 있다고? 뜻도 알지 못하니 말인들 옳게 들리더나? 이놈아!”하시는데, 크게 나무라는 음성인 듯 했지만 노여움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벼락은 면하는가 보다’는 생각이 스칠 즈음“그라마 그 상당법문을 녹취한다는데 내일 새벽예불 마치고 정리한 원고 가져와봐라.”고 하셨습니다.

 

상당법어집 『본지풍광』의 출판 내력은 다음에 말씀 드리기로 하겠습니다. 지금은 『백일법문』출판에 대해서 몇 말씀 먼저 드릴까 합니다.

 

그때 안 일이지만 큰스님께서도 1967년 동안거에 백일법문을 하시고는 녹취를 해서 책을 꼭 내고 싶어 하셨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그때 큰스님을 모시고 있던 시자스님들의 생각은 달랐던 것 같습니다. ‘큰스님께서 방대한 불교학과 선학을 설파하셨는데 어느 상좌가 나서서 정리할 수가 있는 일이 아니다. 큰스님께서 직접 원고를 정리하셔야지 우리가 나서서는 큰스님께 누만 끼칠 뿐이다.’는 생각들이 팽배하여 누구도 나설 엄두고 내지 못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큰스님께서 ‘윤회가 있다’는 측면에서 여러 가지 영혼학이라든지 최면술 이론 등을 설파하신 것도 시자들로서는 심적 부담이 컸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런 일들은 나중에 제가 알게 되었지만 백일법문 녹취록을 만들고서는 저 자신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그리고 천태종, 화엄종, 법상종, 선종 부분은 제 힘으로는 도저히 마치지 못해서 녹취를 다른 재가자에게 부탁하였습니다.

제가 재가자에게 맡길 때 “큰스님 말씀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기를 바란다.”고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1980년대 초반에 동국대 대학원 불교학 박사과정에 있던 원영 스님에게 이 원고의 마지막 정리를 부탁하였습니다. 『백일법문』초판이 1992년 4월 30일에 출판되었으니 ‘백일법문’을 하신 후 만 25년만의 일이었습니다. 그동안 소납의 녹취록에서 『신심명증도가강설』, 『돈오입도요문론강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영원한 자유』등이 출판되었습니다.

 

『백일법문』상, 하 두 권을 큰스님께 올리니, 예전 『본지풍광』과 『선문정로』를 받아 보실 때만큼의 반가운 모습은 없으셨습니다. 저로서는 『백일법문』출판을 위해서 15년 가까운 세월을 보냈는데 속으로 얼떨떨하고 못내 서운했던 기억입니다. 그때는 큰스님께서 기력이 쇠해 계셨고, 다음해 가을 열반에 드실 때까지 『백일법문』책에 대해서는 끝내 한 말씀도 없으셨습니다.

 

세월이 흘러서 2006년 봄에 불필 스님께서 “제가 올해 70, 고희가 됩니다. 기념으로 다른 것보다 큰스님 백일법문 테이프를 CD로 만들어 법공양 하고 싶습니다. 준비해 주시지요.”하고 부탁을 하셨습니다.

 

큰스님께서 백일법문 하실 때마다 나누어 주신 유인물들을 소책자로 만들고 CD 3장을 같이 묶어서 3000여 개를 스님들께 법보시 하는 큰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 일을 진행하면서 예전의 고생이 떠오르고 해서 다시 소책자와 백일법문을 대조해 보니 ‘선종’편에서 누락된 부분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아차!”싶어 찬찬히 비교해 보니 제가 직접 녹취한 곳과 밖에 맡겼던 재가자가 녹취한 부분에 많은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전면 녹취가 아닌 요약녹취였습니다.

 

“왜 성철 큰스님께서 생전에 백일법문에 대해서 한마디 말씀도 않으셨을까? 지금 우선 보이는 탈락 부분만 해도 이놈아! 당장 백일법문 불살라 버리라고 호령호령하셨을 텐데…”하는 부끄러움이 물밀 듯 밀려 왔습니다.

 

그 후 깊이 참회하는 마음으로 큰스님 탄신 100주년에 맞춰 증보판을 내려 했으나 출간하지 못하고 올 7월이나 8월에는 꼭 출판하려하고 있습니다. 큰스님 존전(尊前)에 어떻게 참회를 올려야할지 몸 둘 곳을 몰라 하고 있습니다.

 

어느 때 큰스님께서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나와 같이 부처님의 중도사상으로서 선(禪)과 교(敎)를 하나로 통해서 불교를 설명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고 하신 뜻은 옛 『백일법문』판이나 증보판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그동안 『백일법문』을 읽고 수행하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리고, 큰스님 사상을 실천하는 데 어제와 내일이 다름이 없을 것을 다짐 드리며 앞으로도 뜨거운 정진을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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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택스님
본지 발행인
1967년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1971년 백련암에서 성철스님과 첫 만남을 갖고, 1972년 출가했다. 조계종 총무원 총무부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조계종 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 도서출판 장경각 대표, 부산 고심정사 주지로 있다. 1998년 문화관광부 장관 표창, 1999년 제10회 대한민국 환경문화상 환경조형부문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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