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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암 거사와 배우는 유식]
암송과 『유식삼십송』… 결집과 여시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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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암  /  2019 년 1 월 [통권 제69호]  /     /  작성일20-06-15 13:54  /   조회4,551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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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암 | 불교학자 · 유식 

 

 인도의 모든 종교 성전은 기본적으로 암송용으로 저작된 것입니다. 파탄잘리가 지은 요가의 성전인 『요가 수트라yoga-sūtra』의 한 게송은 대략적으로 모음이 32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처럼 인도인이 엄격하게 운율을 지킨 이유는 암송하기 편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인도는 암송문화가 발전하였는데, 지금도 힌두교 지도자들은 힌두교 성전인 『우파니샤드』·『바가바드기타』 등을 대부분 외우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인도인은 모든 성전을 문자로 기록하지 않고 왜 암송했을까? 고대 인도인은 성인의 가르침을 문자로 기록하면 ‘성스러운 것이 천박하게 되거나 신비로운 힘이 사라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불교도 그 전통을 그대로 계승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도 수세기 동안 제자들의 입에서 입으로 암송되어 전해졌습니다. 이것을 한자로 표현하면 사자상전師資相傳 또는 사자상승師資相承이라고 합니다. 사자상전師資相傳에서 사師는 스승, 자資는 제자, 상相은 서로, 전傳은 전하다, 즉 ‘스승과 제자가 서로 이어 받아 전한다’는 뜻이며, 사자상승이란 ‘스승과 제자가 서로 이어간다(承)’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진리[법]의 가르침을 스승으로부터 제자가 이어 받아 또한 그 제자가 그의 제자에게 전해주는 방식이었습니다.

 


인도 아잔타 석굴 제24굴.

 

불교에서 암송문화의 전통을 알려주는 용어가 있습니다. 바로 ‘결집’과 ‘여시아문’입니다. 불교문헌에 의하면 4차에 걸쳐 결집이 이루어졌다고 하는데, 제1차 결집에 대해서만 간단하게 설명하겠습니다. 제1차 결집은 부처님께서 열반하시고 4개월이 지난 뒤 두타제일頭陀第一(주1) 마하가섭(摩訶[迦葉, Mahākāśpa) 존자의 주도 아래 500명의 비구들이 왕사성 근처 영취산 칠엽굴에 모여서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경전은 다문제일多聞第一 아난다(Ānanda, 阿難) 존자가 암송하고, 율장은 지율제일持律第一 우팔리(Upāli, 優波離) 존자가 암송하여 참석한 장로 비구들의 확인 작업을 거쳐, 부처님의 가르침을 확정했다고 합니다. 

 

일정한 운율에 따라 외우기

 

결집結集이란 맺을 결結, 모을 집集의 합성어로 글자적인 의미로는 ‘한 군데로 모여 뭉침’이라는 뜻이지만, 불교에서는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 그 가르침을 자신의 귀로 직접 들은 제자들이, 가르침을 정리하고 보존하기 위하여 개최한 모임’을 말합니다. 그런데 결집이라는 한자말로는 그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습니다. 결집의 산스크리트어 ‘상기티saṃgīti’를 분석해보면 그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상기티saṃgīti에서 상sam은 ‘함께with’, 기티gīti란 ‘암송하다, 노래하다’, 즉 ‘함께 암송하다, 함께 노래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합송合誦이라도 번역합니다. 그러므로 결집이란 부처님의 가르침을 문자로 기록하여 보존한 것이 아니라 함께 합창하여 그 가르침을 전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전통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문자화하기 시작한 기원 전후, 약 500년 지속됩니다.

 

암송해 전하면 문자보다는 부정확하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사실 문자로 기록하는 것보다 암송하여 전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명창 박동진 선생님께서 뉴욕의 카네기홀에서 8시간 동안 서서 「춘향전」을 공연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박동진 선생님께서는 「춘향전」의 한 구절도 틀리지 않고 완창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은 ‘창’이 일정한 운율에 따라 부르는 노래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부처님의 제자들도 일정한 운율에 따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암송하였기 때문에 가능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암송의 전통과 중요성은 대승불교[유식불교]도 그대로 전승합니다. 유식불교의 대표적 논서인 『유식삼십송』에서도 그대로 계승되는데, 제1게송 본문을 살펴보면 보다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ātmadharmopacāro hi vividho yaḥ pravartate/vijñānapariṇāme 'sau pariṇāmaḥ sa ca tridhā//(1abcd) 

由假說我法 種種相轉 彼依識所變 此能變唯三(제1게송) 

 

우선 산스크리트 본을 보시면 제1게송의 모음이 33개입니다. 이처럼 『유식삼십송』 각 게송은 각각 모음이 대략 32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유식삼십송』은 처음부터 암송용으로 저작된 논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유식삼십송』의 한역본인 현장역도 암송의 전통을 살려서 번역하고 있습니다. 『유식삼십송』의 한역본을 보면 한 게송이 4구四句로 되어 있고, 하나의 구句는 다섯 자로 구성되어 있어, 하나의 게송은 20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한시漢詩의 형식으로 말하면 오언사구五言四句의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식삼십송』 한역본은 오언사구의 게송이 30개이고, 한 게송의 글자는 20자로, 전체가 30 × 20 = 600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유식삼십송』과 『유식삼십송』의 한역본에서도 처음부터 운율에 맞추어 암송용으로 저작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세친보살의 또 다른 저작인 『유식이십론』, 『대승오온론』, 『구사론』 산문 부분 등도 암송하기 편하도록 운율에 맞추어 암송용으로 편찬된 것입니다. 

그런데 『유식삼십송』, 『대승오온론』 등을 주석한 안혜보살은 ‘『유가사지론』과 같은 방대한 분량의 논서들이 있는데, 굳이 짧은 게송으로 『유식삼십송』, 『유식이십론』, 『대승오온론』 등을 저작하는 이유’에 대해, “일상생활에서 바쁜 재가자와 수행에 시간을 뺏겨서 유식공부를 제대로 할애할 수 없는 출가자를 위해서”라고 새로운 암송 이유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들렸습니다”

 

불교에서 암송 문화의 전통을 알려주는 또 다른 용어는 ‘여시아문如是我聞’입니다. ‘여시아문’은 산스크리트 에밤 마야 수루탐[evam mayā śrutam]’의 한역입니다. ‘여시아문’은 보통 “이와 같이 나는 들었습니다 또는 이와 같이 나는 들었노라”로 번역합니다. 이 문장은 불교신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것으로 경전의 첫 구절에 반드시 등장하는 경문입니다. 이 말의 뜻은 스승이 제자에게 가르침을 설하면 그 제자가 단지 귀로 들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귀로 듣고서 암기했을 뿐이지 문자로 기록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여시아문’도 암송의 전통을 알려주는 중요한 개념입니다.

 

여기서 필자의 사족을 붙이겠습니다. 앞에서 ‘여시아문’을 “이와 같이 나는 들었습니다”고 능동문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들었습니다’(śruta, 聞)는 동사원형 스루(√śru(듣다)에 과거수동분사(ta)가 첨가된 말입니다. 그래서 ‘스루타śruta’의 정확한 번역은 ‘들려졌다’는 수동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한글은 수동문보다는 능동문을 선호하는 언어이기 때문에, 한글을 수동문으로 번역하면 어색한 문장이 되는 경우가 많아 능동문으로 해석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역이나 산스크리트 문장을 능동형으로 번역하면 중대한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만약에 ‘여시아문’을 능동형으로 번역하면, 문장의 능동적인 주체가 아난다가 되어 버립니다. 어디까지나 우리[아난다]에게 가르침[진리]을 설하신 분은 부처님입니다. 따라서 여시아문의 주체는 아난다가 아니라 부처님입니다. 다시 말해 부처님이 우리[아난다]에게 진리를 설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아난다]는 단지 수동적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진리]을 들을 수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한글 문장으로는 어색하지만, ‘여시아문’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가르침이) 나에게 이와 같이 들렸습니다.”고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현재에도 이런 암송의 전통은 불교 내부에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지금도 티베트나 스리랑카에서는 경전이나 중요한 논서를 전부 암송하는 것을 아주 중요한 수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실천하고 있습니다. 또한 동북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유식불교[법상종]의 전통이 살아있는 일본 법상종에서는 중요한 문답 내용을 통째로 암송하는 전통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한국불교도 이런 암송의 전통을 계승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합니다. 왜냐하면 불교공부는 ‘암송’에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나마스테 namaste. 

 

(주1) 두타頭陀란 산스크리트어 ‘dhūta’의 음사로 ‘물리치다, 제거하다’는 의미이다. 즉 수행자로서 아주 청빈한 생활을 실천했다는 뜻이다. 마하가섭의 13두타행이 유명하다. 

① 분소의(糞掃衣, 떨어진 옷을 꿰매어 짠 옷) 

② 세 개의 옷만을 착용할 것 

③ 항상 탁발하여 음식을 먹을 것 

④ 매일 탁발할 것 

⑤ 하루에 한 끼를 먹을 것 

⑥ 음식의 양을 절제할 것 

⑦ 오후에는 음식을 먹지 않을 것 

⑧ 삼림 ⑨ 나무 밑 ⑩ 야외 ⑪ 묘지 등에서 머물 것 

⑫ 보시 받은 그대로 옷을 입을 것 

⑬ 언제나 앉아 있으며, 눕지 않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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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암
불교학자. 유식을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유식삼십송과 유식불교』·『마음공부 첫걸음』·『왕초보 반야심경 박사되다』·『범어로 반야심경을 해설하다』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마음의 비밀』·『유식불교, 유식이십론을 읽다』·『유식으로 읽는 반야심경』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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