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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공과 도자기]
과감한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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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미  /  2019 년 11 월 [통권 제79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380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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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미 / 도예작가

 

긴 어둠의 터널같이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여름이 가고 도저히 올 것 같지 않았던 가을이 왔다. 올 여름은 그간의 액운이 나와 지인에게 덤벼들었던 해였다.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로 정신적으로 너무나 지쳐 있었다. ‘이대로 끝나는 건가’하는 절망적인 생각도 여러 번이었다. 제일 힘든 것은 그로인한 불면증이었다. 마음이 안정이 되지 않으니 잠을 도저히 이룰 수가 없었다. 더욱 더 예민해지고 불안해지고 그리고 피폐해지는 기분이었다.

 

도자기 작업은 손도 못 대고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내 마음은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었다. 내가 삼재이지 지인들도 삼재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들리는 소리는 무엇 하나 희망적인 것이 없었다. 무탈하게 잘 다니던 여행꾼이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에 다녀와서 풍토병에 걸려 생사를 오가지 않나 학교 교사로서 수업시간에 농담 한마디 한 것이 문제가 되어 몇 개월간 징계로 이어져 학교가 아닌 오늘은 어디서 하루를 보내나 하는 신세가 되기도 했다.

 

 


 

 

나이 오십이 되면서부터는 마음 한 켠에서 지금껏 살아왔던 삶에서 벗어나 이제 다른 방식의 삶을 생각하고 있던 터였다. 시기적으로 마음의 출가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마도 그 변화하는 과정에서의 혼란이 벼락처럼 후려쳤는지도 모른다.
일본 선사 마스노 순묘 스님의 ‘인생을 바꾸는 가장 쉬운 방법은 청소’라는 말이 와 닿았다. 그래서 심플한 상태로 ‘본래의 나’를 만나보고 싶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나에게 필요한 것 보다는 필요 없는 것이 더 많이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작업장에 들어서니 더 한심하다. 욕심껏 모은 온갖 재〔灰〕에 흙이며 양동이마다 유약 실험한 것이 무슨 유약인지도 모르는 것이 어지럽다. 또 나무는 어떠한가. 나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또 재이고 재이고 ….

 

본질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계속 헛발질만 해댄 셈이다. 남이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이 하나도 벗어남 없이 모두 나의 문제였음을 깨달았을 때, 내가 이 힘들었던 여름의 일들이 아니었다면 나는 아마도 평생 알아채지 못했겠지. 그러고 보면 참 고마운 여름이었구나.
거침없이 일을 벌이고 충동적으로 행동하고 어리석은 내 잣대로 남을 분별하고….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였다.

 

거의 매일을 버리고 정리하는 걸로 보내고 있다. 이제 조금 가닥이 잡히는 것 같다. 책도 거의 대부분을 정리했는데 불교서적과 도자기 관련 서적은 아직 정리가 안 된다. 마당의 나무도 휑할 정도로 자르고 흙과 나무를 보관하던 비닐하우스도 태풍에 비닐이 찟겨진 김에 아예 철거를 했다. 이것도 며칠이 걸렸다. 태풍 곤파스에 쓰러진 소나무를 많이 사들였는데 자르기 아까운 통소나무를 혹시나 작은 한옥을 한 채 지을까 해서 보관을 하고 있었는데 아마 내가 저 나무로 집을 지을 일은 없을 듯 했다. 솜씨 좋은 후배에게 사정하다시피 가져가게 하고 필요 없는 것은 다 치우니 속이 후련했다. 이것만 가지고도 이렇게 마음이 가벼워지다니 ….

 

섭갹담등躡屩擔簦은 나의 젊은 날부터의 바램이었다. 나는 언제 바랑 하나에 내 삶의 짐을 넣고 가볍게 떠날 수 있을까 늘 초심으로 다짐하고 경계할 일이었다. 내가 열정이나 추진력이라고 착각하고 즉각적으로 일을 벌이고 여기저기 기웃거렸던 일들. 지금도 바로 알아채진 못하지만 달라졌다면 지금은 조금 지켜본다. 그리고 되도록 일상을 단조롭게 만들려고 노력한다.

 

정작 도자기 작업을 할 때는 오히려 소심한 면이 컸다. 실험을 한다고 하긴 했지만 은연중에는 안정된 데이터로 가려고 했던 적도 많았다. 흙은 산더미같이 쌓아놓고 막상 치우려니 그 흙이나 유약을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없었다.

 

이제는 처음인 듯 아기의 발걸음같이 그러나 과감히 실패와 친구삼아 사브작 사브작 걸어가 볼 생각이다. 생활을 줄이다보면 돈 들어갈 일도 줄어들 것이며 애써 잘 팔리는 그릇을 만들지 않아도 된다.

 

도자기 작업을 하는 도반陶伴이 있다. 지리산에서도 깊숙한 곳에 산다. 스님들이 놀러오면 요즘엔 스님들도 이런데 안산다고 농담할 정도로 외딴곳이다. 그가 개띠라서 그런 생각이 드는지 여유롭기가 미얀마의 개팔자 같다. 기회가 되면 스승님의 작업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겠지만 난 스승님이 허리를 펴고 천천히 걷는 것을 한 번도 본적이 없다. 늘 허리 펼 새도 없이 뛰어다니시고 엄청난 작업량으로 단련된 분이시다. 그런데 제자는 완전 이단아인 셈이다. 아니 그동안 난 그런 줄 알았다. 그 흔한 티브이나 와이파이도 되지 않는다. 불도 일 년에 제법 자주 때는 데도 이 집이 도자기하는 집일까 싶을 정도로 나무도 늘 달랑달랑하다. 뭐든 쌓아놓는 법이 없다. 도자기를 보관하는 창고는 말할 것도 없고 엊그제 불을 땠다는데도 가보면 굴러다니는 도자기를 구경하기 힘들다.

 

그러나 어느 날 작업하는 것을 보고 ‘아! 이 사람은 진짜 그릇을 만드는 사람이구나’ 하고 느낀 적이 있다. 저 큰손으로 어떻게 불빛에 대면 비칠 정도로 얇고 섬세하게 만들까? 안정된 데이터를 다 알고 있는데도 자신의 색을 찾기 위해서 과감한 시도도 서슴치 않는다. 그리고 과감히 다 깨버린다. 단순함은 그냥 나오는 게 아니겠지 …. 몸과 마음이 정돈되면 마음에 여유도 생기고 그동안 보지 못했던 세계가 보이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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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미
소천素泉 김선미

귀신사에서 찻그릇을 보고 무작정 도천陶泉 천한봉 선생에게 입문하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그릇을 만들기 위해 정진중이 다. 현재 운산요雲山窯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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