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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암 거사와 배우는 유식]
‘의식’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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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암  /  2019 년 3 월 [통권 제71호]  /     /  작성일20-06-17 11:56  /   조회5,358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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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암 | 불교학자 ‧ 유식

 

지난 호에서는 표층의 마음인 전前오식[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을 설명했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표층의 마음인 ‘의식(意識, consciousness)’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의식은 어떤 작용을 하는 마음일까요? 이전 글에서 의식은 다음과 같은 작용을 한다고 기술했습니다.

 

 


 

1. 의식은 전오식의 활동을 바탕으로 대상을 종합적으로 판단 사유하는 마음인 동시에 전오식에 제약을 받는 마음이다.

2. 의식은 전오식과 함께 작용하여 감각을 선명하게 해주는 마음이다. 

3. 의식은 전오식 배후에서 ‘언어’를 사용하여 대상을 개념적으로 ‘사고’하는 마음이다.

 

첫 번째로 전오식 즉 안식眼識은 안근眼根을 매개로 색경色境, 이식은 이근을 매개로 성경, 비식은 비근을 매개로 향경, 설식은 설근을 매개로 미경, 신식은 식근을 매개로 촉경을 각각 대상으로 삼습니다. 반면 의식은 의근을 바탕으로 전오식의 대상[법경] 전체를 대상으로 삼아 종합하여 판단 사유합니다.

 

그래서 의식은 ‘전오식[감각]’에 의해 인식 범위가 한정되는 마음입니다. 다시 말해 의식은 자신의 지식, 경험, 환경 등에 의해 인식 대상[범위]이 한정됩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우리들은 같은 신문, 같은 지면, 같은 기사를 읽어도 관심분야나 가치관이 다르면 기사 내용도 다르게 보일 뿐만 아니라 기억하는 내용도 다릅니다. 게다가 시력[전오식]의 능력 차이 때문에 자외선이나 적외선을 볼 수 없으며, 청각의 능력 차이 때문에 돌고래처럼 고주파를 들을 수 없으며, 개나 늑대처럼 후각이 뛰어나지 않기 때문에 미세한 냄새는 잘 맡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의식은 감각[전오식]에 의해 인식대상이 제약을 받습니다.

 

의식 - 감각에 한정되는 마음

 

그런데 중국 법상종에서는 의식을 전오식과 관련시켜 오구의식과 불구의식으로 나눕니다. 오구의식(五俱意識, 전오식과 함께하는 의식)이란 의식이 전오식과 관계를 가지고 있는 상태를 말하는데, 오동연의식과 부동연의식으로 다시 세분합니다. 먼저 오동연의식五同緣意識이란 의식이 전前오식[五]과 동일한[同] 대상[緣]에 집중하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예를 들면 책을 읽을 때 안식이 글자를 보고 있고, 의식도 또한 그것에 집중하여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반면 부동연의식(不同緣意識, 전오식과 동일한 대상에 집중하지 않는 의식)이란 감각이 활동하고 있는 것은 오동연의식과 동일하지만, 의식이 전오식과는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안식이 책을 보고 있지만 의식은 다른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불구의식不俱意識은 의식이 전오식과는 별도로 활동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불구의식은 다시 오후의식과 독두의식으로 세분합니다. 먼저 오후의식五後意識이란 전오식을 계기로 의식이 활동하지만, 전오식의 활동이 끝난 이후에도 의식이 계속 작용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예를 들면 좋은 영화를 보고 난 후에 그 감동의 여운이 남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계속해서 음미하는 의식입니다. 독두의식獨頭意識이란 의식이 전오식과 별도로 독자적으로 활동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 독두의식에는 정중의식, 몽중의식, 독산의식의 3종류가 있습니다. 먼저 정중의식定中意識은 선정 중의 의식 상태로 환각이나 환상의 상태를 말합니다. 또는 깨달음의 체험이나 심신탈락心身脫落의 상태와도 관계하는 의식입니다. 몽중의식夢中意識은 꿈속의 의식입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서는 꿈을 무의식과 관계하는 것으로 보지만, 유식에서는 의식의 활동으로 파악합니다. 독산의식獨散意識은 전오식의 활동을 떠나 의식만이 자유롭게 활동하는 것을 말하며, 구체적으로 사고, 판단, 상상력, 이상을 추구하는 등의 마음의 활동입니다.(『마음공부 첫걸음』, 민족사, 2011, 김명우 지음)

 

의식 - 감각을 선명하게 하는 마음

 

두 번째로 의식은 감각[전오식]과 함께 작용하여 감각을 선명하게 합니다. 의식을 스포트라이트〔조명〕에 비유해 보겠습니다. 어두운 무대 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면 비춰진 사람이나 부분이 확실히 선명하게 보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의식의 스포트라이트를 어떤 감각 대상에 향하는가에 따라 우리의 감각세계는 크게 달라집니다. 왜냐하면 의식의 스포트라이트를 어떤 대상에 향하는가에 따라 그 대상이 선명해지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속이 아프거나 손가락이 가시에 찔렸을 때, 그 통증에 의식을 집중하면 통증이 이전보다 확실히 심해집니다. 그러나 그때 우연히 밖에서 들려오는 아름다운 새소리에 의식을 향하게 하면, 속쓰림이나 손가락의 통증이 완화됩니다. 즉 의식의 스포트라이트를 어디로 향하는가에 따라 통증은 심해지기도 하고 완화되기도 합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봅시다. 친구와 대화를 하면서 식사를 하는 것도 즐겁습니다만 너무 대화에 빠져 버리면 음식 맛을 전혀 느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혀 안의 음식 맛에 의식의 스포트라이트를 비춰 봅시다. 그러면 ‘맛있는 음식 맛’이 의식에 선명하게 나타납니다. 이처럼 의식의 스포트라이트를 ‘무엇’에 비추는가에 따라 세계의 상태는 변합니다.

그래서 유식에서는 의식을 ‘명료의明了依’라고도 합니다. 명료의란 ‘의식은 대상을 명료하게 이해[요해了解]하는 원인[의지처]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게다가 신체나 사물뿐만 아니라 의식을 어느 ‘시간’에 향하는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과거에 일어난 것에만 의식이 향하는 사람은 “어떻게 내가 그런 짓을 했을까”라고 후회하면서 고통스러워합니다. 또한 의식의 스포트라이트를 미래에만 향하는 사람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라고 걱정하고 불안해합니다. 물론 과거를 반성하고 미래를 생각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과거는 이미 지난 것이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과거도 미래도 실재하지 않습니다. 실재하는 것은 지금 있는 현재입니다. 그래서 의식의 스포트라이트를 비추어야 할 것은 현재입니다. 그렇지만 ‘지금[현재]’에 집중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명상이나 참선을 해본 분은 잘 알 것입니다. 호흡명상을 할 때 후회스러운 과거의 생각이나 불안한 미래의 생각을 가라앉히고 지금[현재]하고 있는 호흡에 집중하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파도처럼 끊임없이 밀려오는 후회와 불안한 생각을 가라앉히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의식을 계속해서 들숨과 날숨에 집중하다보면, 자연스럽게 호흡에 집중하게 되고 마음은 편안해집니다.

 

세 번째로 의식은 언어를 사용하여 개념적 사고[생각]를 하는 마음입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아리스토털레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파스칼),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데카르트)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특징을 가장 잘 규정짓는 말은 ‘생각[사고]’입니다. 지구상의 모든 동물은 자신의 생각을 몸동작, 표정으로 의사소통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의사소통 수단으로 언어[말과 글]를 사용합니다. 생각을 표현하는 언어활동을 통해 인류 문명은 발전을 거듭했습니다. 그래서 언어와 생각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그렇지만 인간의 모든 사고는 언어를 사용하여 이것저것 생각하고 고민하며 타인과 언쟁을 벌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언제나 ‘언어에 의한 유희遊戱의 세계’에 살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유식에서는 ‘언어대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이 세계에는 실체로서의 사물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려 의식에 의한 무의미한 ‘언어의 유희’로부터 벗어나자고 합니다. 이런 의식을 벗어나 획득한 지혜를 묘관찰지妙觀察智라고 합니다. 여기서 오묘[妙]하게 관찰觀察한 지혜[智]란 사실을 사실 그대로[여실지견如實知見] 관찰하는 지혜를 말합니다. 즉 잘못된 견해 즉 상락아정常樂我淨을 진실된 견해인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 부정不淨으로 보는 것입니다.

 

의식 - 언어를 동반하여 사고하는 마음

 

우리는 말[언어]대로 ‘나’와 ‘사물’은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과연 나와 사물은 존재할까요? 예를 들어 봅시다. 제가 어떤 사람에게 “손을 보여주세요”라고 하고서 “이 손은 누구 손입니까”라고 물으면 ‘내 손’이라고 대답합니다. 이 문장[대답]에는 ‘나’와 ‘손’이라는 두 개의 명사가 있습니다. 명사는 사물을 지시합니다. 그래서 제가 “손이라는 명사가 지시하는 것을 당신 눈으로 확인할 수 있죠”라고 확인 시켜줍니다. 그런 다음 “그렇다면 ‘나’라는 명사가 지시하는 것을 봐 주세요”라고 하면 대부분 망설이고 대답을 못합니다. 간혹 ‘몸 전체’를 가리키기는 분도 있습니다만 결국 못 찾습니다. 이처럼 그 누구도 ‘나’를 찾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라는 언어의 외침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무아[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나’는 언어의 외침뿐이라는 것을 이해하더라도 ‘나’에 대한 집착은 없애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수행이 필요한 것입니다.

 

앞에서 우리는 ‘손’이라는 명사가 지시하는 것을 눈으로 직접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손’은 ‘나’와 다르게 틀림없이 존재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과연 ‘손’은 존재할까요? 제가 “그 ‘손’조차도 사실은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은 “무슨 바보 같은 소리”라고 반론을 제기합니다. 상대는 손을 움직이면서 “자! 이처럼 움직이지 않는가? 한쪽 손으로 다른 손을 만지면서 자! 이처럼 촉감이 있지 않는가? 그러므로 여기에 손이 있지 않는가?”라고 주장합니다. 확실히 시각으로 파악하는 한에 있어서 혹은 한쪽 손으로 만지는 한에 있어서는 손은 있습니다. 이른바 시각 혹은 촉각으로 파악된 ‘손’은 존재합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봅시다. 있는 것은 시각과 촉각뿐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감각의 데이터뿐입니다. 그 데이터에 대해서 그것을 ‘손’이라고 언어로 말하고, 그 데이터를 ‘손’이라는 사물〔물건〕로 가공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가공된 ‘것〔물건〕’은 감각을 떠나 별도로 존재한다고 생각해 버립니다. 무반성적 · 상식적으로 손은 있고, 그것은 신체의 일부라고 언어로 생각해 버립니다.

 

눈앞에 존재하는 사과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우리는 ‘여기에 사과가 있고 그 형체는 둥글고 색은 빨갛다’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좀 더 깊이 관찰해 봅시다. 형체나 색도 시각으로 파악한 것이고 시각 중에 있는 것입니다. 즉 시각이라는 마음의 일부입니다. 그러므로 사과의 형체나 색도 마음속에 있는 셈입니다. 보이는 대상인 사과도 마음속에 있고, 보는 시각도 마음이기 때문에 사실 보는 것은 ‘마음이 마음을 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식에서 설하는 마음의 기본 구조입니다. 유식의 용어로 설명하면 보이는 마음을 ‘상분相分’, 보는 마음을 ‘견분見分’이라고 합니다.(『마음의 비밀』, 민족사, 2013, 김명우 옮김) 어려운 용어라서 상분과 견분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설명 드리겠습니다.

 

이처럼 의식은 다른 마음[전오식, 말나식, 아뢰야식]과 다른 자신만의 독특한 작용을 하는 마음입니다. 다음호에는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말나식’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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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암
불교학자. 유식을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유식삼십송과 유식불교』·『마음공부 첫걸음』·『왕초보 반야심경 박사되다』·『범어로 반야심경을 해설하다』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마음의 비밀』·『유식불교, 유식이십론을 읽다』·『유식으로 읽는 반야심경』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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