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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론학 강설]
구마라집 문하의 삼론학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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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수  /  2019 년 3 월 [통권 제71호]  /     /  작성일20-06-17 22:53  /   조회5,365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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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수 | 불교학자 · 번역저술가

 

후진後秦의 홍시弘始 3년(401) 중국의 장안에 도착한 구마라집이 후진의 왕 요흥姚興(재위 393~416)의 비호 아래 수많은 대승의 경론을 번역하자, 그 문하에서 삼론과 사론의 연구와 저술 활동이 북지北地의 장안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후 북방의 흉노가 침입하는 것을 계기로 북벌北伐의 군대를 일으킨 동진의 장군 유유劉裕가 의희義熙 13년(417) 장안을 점령하고, 3년 후 송宋을 건국하여 유송劉宋의 개조 무제武帝(420~422재위)가 되었다. 유유가 장안을 점령한 직후 남지南地 건강建康으로 돌아간 틈을 타, 흉노족 혁련발발赫連勃勃이 장안을 침략하여 불교도를 닥치는 대로 살상하였다. 중국불교사상 불교를 탄압한 폭군으로 삼무일종三武一宗이 유명하지만, 그 이전 훙노의 혁련발발도 많은 불교도를 살상했다.

 

사성四聖과 팔준八俊​

 

전란의 참화로 말미암아 순식간에 위태로워지자 중국판 엑소더스가 벌어져 구마라집의 문도들은 장안을 탈출하여 사방으로 흩어지고, 일부는 강남으로 건너가 남지에서 삼론학을 연구 선전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여 구마라집 문하의 삼론학자와 활약을 전후前後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구마라집 생존시 그 문하에 3천명의 문도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 중에 가장 뛰어난 넷을 사성四聖 사철四哲이라 하였고, 여기에 넷을 더한 여덟을 팔준八俊 또는 팔숙八宿이라 칭하였다. 그러나 이 사성의 선정에는 문헌에 따라 조금씩 다른 점이 있고, 팔준 역시 한참 후대에 그 명칭이 열거되었다.

 

사성에 대하여 길장吉藏의 자술에서는 도융道融 · 승예僧叡 · 도생道生 · 승조僧肇를 거론하였다.(주1) 그러나 『고승전高僧傳』에서는 승예를 빼고 혜관慧觀을 추가하였고,(주2) 후대에 저술된 주석서에서는 승조를 누락시키고 혜관을 포함시켰다.(주3) 문헌에 따라 사성의 선정에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팔준에 대하여 우선 길장은 그 명칭을 거론하지 않고, 여덟 명의 준재들이 있다고 하였다. 역시 후대의 같은 문헌에 따르면 길장이 거론한 사성에 도항道恒 · 담영曇影 ·혜관慧觀 · 혜엄慧嚴을 더한 여덟 명을 말한다. 이들 사성 팔준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승도僧導 · 승숭僧嵩 · 승업僧業 · 승천僧遷 · 승략 · 법흠法欽 · 담무성曇無成 등 대략 30명의 중요한 인물들이 있었다. 구마라집 문하의 이들로부터 삼론학 뿐만 아니라, 열반학 성실학 등 중국불교에서 교학의 본격적인 연구가 촉발된 것이다.

 

 


 

 

훗날 섭산의 신삼론학 이후 삼론학파와 다른 불교학파 종파와 대결하게 되는데, 그 중에도 같은 구마라집 문하에 의하여 성립된 성실종 및 열반종과의 대결이 벌어져 주목을 끈다. 때문에 구마라집 문하에 의하여 성립된 열반학 성실학의 종파적 이해는 필수 사항이다. 이들 사성 팔준을 중심으로 삼아 그들의 학설과 업적을 정리해 본다.

 

승조의 격의불교 비판

 

승조는 구마라집 문하 중에 누구보다 많이 알려져 있어, 새삼 자세히 논의할 필요는 없다.(주4) 승조의 업적을 간략히 정리하기로 한다.

① 『조론』 저술. 승조에게는 유명한 『조론肇論』을 비롯하여 『주유마힐경註維摩詰經』과 「백론서百論序」 등이 있다. 이 중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은 당연히 『조론』이다. 이 저술은 당시에도 주목을 끌었지만, 후대에도 여러 왕조를 거치면서도 수십 종류의 주석서가 제작되었다. 없어진 주석서를 제외 하고도, 진陳의 혜달惠達이 찬술한 『조론소肇論疏』 3권부터 당唐의 원강元康의『조론소』 3권, 명明의 감산덕청憨山德淸(1546~1623)의 『조론약소肇論略疏』 6권 등 대략 십수 종류가 남아 있다.

 

그 구성 내용은, 구마라집이 먼저 반야경을 역출하자 「반야무지론般若無知論」을 지어 바쳤고, 이어서 「부진공론不眞空論」과 「물불천론物不遷論」을 지었으며, 스승 구마라집이 입적하기 전인 413년에 「열반무명론涅槃無名論」을 지었다. 이 네 가지에 「종본의宗本義」 를 더하여 『조론肇論』이라 편집 한 것은 다소 후대의 시기일 것이라고 추정한다. 저서의 내용을 관통하는 중심 사상은 반야경과 중론 등에 의거한 무자성無自性 공성空性의 역설 외에 다름 아니다. 『조론』에 표현된 반야와 공에 대한 승조의 사상은 후대에 전개된 중국불교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 가되고 있다.

 

② 삼가三家의 학설 비판. 구마라집 이전부터 반야경에서 말하는 공에 대한 이견이 분분하여 도안 같은 뛰어난 학숭으로 하여금 깊이 탄식하게 하였는데, 구마라집이 홍시 5년(403) 『대품반야경』을 역출하자 승조는 홍시 7년(405) 전후에 「반야무지론」을 저술하여 반야의 뜻을 해명하였다. 다시 「부진공론」을 지어 공의 의미를 역설하였다. 여기에서 격의불교에서 말하는 심무의心無義 · 즉색의卽色義 · 본무의本無義 삼가三家의 세 가지 설을 비판하였는데, 그 소개된 내용도 간략하고, 그 비판도 역시 그러하다.

 

그런데 승조는 그 세 가지 설의 발설자가 누구인지 거론하지 않았다. 「부진공론」을 저술한 당시에는 누구의 설인지 숙지했을 텐데, 무슨 이유로 발설자의 이름을 생략한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이로 말미암아 후대에 저술된 여러 저서와 『조론』의 주석서들이 때로 서로 다르게 말하여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예를 들면, 물질적 사물의 요소인 色에 대하여 설명한 즉색의卽色義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하였다. “즉색卽色이란, 색色은 그 자신 본래 색이 아니다. 그러므로 비록 색이라고 해도 색이 아니라는 것을 해명하는 것이다.”(주5) 승조는 이 즉색의가 누구의 설인지 명시하지 않았지만, 후대의 주석서들은 대부분 즉색의 비판 대상이 지둔支遁(혹은 지도림支道林)의 설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길장은 해석하기를, 여기에 관내關內의 즉색의와 지둔의 즉색의로 구분하여, 『조론』이 비판한 것은 전자이고, 후자는 옹호한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그러나 현대의 관점에서 양자의 차이점이 명쾌하지 않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또 지둔의 반야사상의 이해가 정확하여, 길장의 소론所論에 대해 부정하는 학자도 있다.(주6) 나머지 심무의心無義 등의 비판 대상과 해석에 있어서도 의견이 다양하여, 어느 하나 간단명료하게 판정나기는 요원해 보인다.

 

특기할 점은, 구마라집 문하 중에 저술과 서문을 지은 이들이 여럿 있었으나, 격의불교 가운데 삼가의 설을 소개하고 비판한 것은 오직 승조 뿐이라는 것이다. 승예도 격의불교의 폐단을 한탄하며 비판하였으나, 그것은 몇 가지 경론의 서문에서 간략하게 술회한 정도이다. 그 밖에 다른 문하들도 저술이 있었고, 혹은 전체 혹은 일부가 없어져 이 시점에서 정확하게 판단할 수는 없으나, 남아 있는 자료에 의거하는 한 격의불교를 비판하고 시정한 이는 다시 발견되지 않는다. 왜 승조가 유별나게 거론되고, 나아가 삼론학의 시조로 간주되었는지 짐작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③ 「백론서百論序」 작성. 구마라집이 번역한 반야경과 사론 가운데 승조는 『백론』의 서문을 지었다. 이에 대하여 승조는 서문에서 밝히기를, 먼저 역출한 『백론』은 구마라집이 한어漢語에 능숙하지 못하였으나, 이후 홍시 6년(404) 구마라집이 이치를 아는 사문들과 함께 정본正本과 대교하여 헤아렸다고 기록하였다.(주7) 길장은 이를 부연하여, 홍시 4년(402) 먼저 번역한 것은 구마라집이 방언方言에 융통하지 못하여 승예가 지은 서문도 조예롭지 못하였으며, 홍시 6년(404) 다시 번역하자 문의文義가 바르고 승조가 지은 서문도 좋다고 하였다.(주8)

 

『중론』 등의 서문을 지은 승예

 

종래 학계에서 삼론학자로서 승예僧叡를 과소평가한 면이 있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그것은 승조처럼 뛰어난 저술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고, 학계에서 충분히 조명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삼론학을 대성한 길장은 구마라집의 3천명 문도 중에 (가장 뛰어나) 입실入室한 사람은 오직 8명이고, 그 중에 승예僧叡가 수령이었다(주9)고 하였다. 그리고 근래의 연구자들 중에는 승조와 승예를 구마라집 문하의 제일인자로 보는 학자도 있고, 승예를 구마라집 문하 삼론연구의 제일인자로 보는 학자도 있다.(주10) 대품과 소품의 반야경과 『중론』 · 『십이문론』 · 『대지도론』의 서문을 승예가 지운 것에 근거하여 그렇게 평가한 것이다. 승예가 제일가는 삼론학자라는 근거에 대하여 조금 더 설명해 본다.

 

① 물론 알려져 있듯이 승예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동안에는 승조처럼 삼론학 분야의 단독 연구서를 저술하여 남기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승예를 구마라집 문하 중에 제일인자라고 간주하는 일차적인 이유를 서문의 작성에서 찾고 있다. 구마라집이 번역한 반야경과 중관학의 경론 대부분의 서문을 지은 장본인은 다름 아닌 승예다. 곧 반야경 중에 『대품반야경』과 『소품반야경』의 서문과, 중관학 논서 가운데 『중론』 · 『십이문론』 · 『대지도론』의 서문을 지었다.(주11)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하여 논의하자면, 앞의 승조 조항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현재 남아 있지 않지만 『백론』의 서문도 승예가 먼저 지었다. 이 점을 추가하여 고려하면 일단 사론의 서문 모두를 지은 것은 오직 승예 뿐이라는 말이 된다. 반야경과 삼론 사론의 서문 작성만 놓고 보면 단연 승예가 제일인자임에 분명하다. 승예의 학식이 누구보다 뛰어난 점이 가장 큰 이유일 수도 있겠지만, 혹시 승예의 문장력이 누구보다 탁월한 점도 작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조심스레 해 본다.

 

② 승예의 경우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이후 승예는 다른 이름으로 남지에 가서 삼론학을 전파하게 되는데, 이 부문은 다음에 알아보기로 한다.

 

주)

1) 吉藏, 『中觀論疏』 제1권 本, “門徒三千 入室唯八 睿爲首領 老則融睿 少則生肇” (T42-p1a) 

2) 慧皎, 『高僧傳』 제7권 慧觀傳, “時人稱之曰 通情則生融上首 精難則觀肇第一” (T50-p368b) 

3) 文才, 『肇論新疏遊刃』, “生公融公能通人疑情 叡公觀公善精其問難” (續藏經一·二·一·三·265左上-左下) 

4) 『고경』 62~70호에 연재된 「승조와 『조론』」 참조. 

5) 『肇論』 「不眞空論」, “卽色者 明色不自色 故雖色而非色也” 

6) 尾山雄一, 「僧肇に於ける中觀哲學の形態」, (『肇論硏究』, 法藏館, 1955, p.204) 

7) 僧肇, 「百論序」, “先雖親釋 而方言未融 至令思尋者 躊躇於謬文…以弘始六年 歲次壽星 集理味沙門 與 什考挍正本” (T30-p168a) 

8) 吉藏, 「百論序疏」, “百論有二序 一叡師所制 二肇公小作…又叡師序是弘始四年前翻 什師初至方言未融 爲此作序猶未中詣 肇師序卽是此文六年重翻 文義旣正 作序亦好” (T42-p232a) 

9) 吉藏, 『中觀論疏』 제1권 本, “門徒三千 入室唯八 睿爲首領 老則融睿 少則生肇” (T42-p1a) 

10) Richard H. Robinson, Early Mādhyamika in India and China, Chap. Ⅴ, Seng-jui, Motilal Banarsidass, Delhi, 1978. 平井俊榮, 『中國般若思想史硏究』, 제2장 僧叡, 東京 春秋社, 1976. 

11) 이상의 서문들은 모두 승우僧祐의 『출삼장기집出三藏記集』에 수록되어 있으며, 『중론』 서문처럼 서문이 해당 경론에 첨부되어 유통되는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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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수

동국대 불교학과 졸업. 동대학원 불교학과에서 「용수龍樹의 화엄사상華嚴思想 연구」로 박사 학위 취득. 동국대 불교학과 강사 역임. 동국대에서 『한국불교전서』 제13권과 제14권(『유가사지론기』) 공동 교정 편찬. 고려대장경연구소 책임연구원으로 돈황불교문헌 공동 연구. 번역서로 『삼론현의三論玄義』와 고려대장경의 한글 번역본 몇 가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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