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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뎃뽀’ 정신이 역사를 창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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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스님  /  2014 년 3 월 [통권 제11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4,786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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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뎃뽀’의 어원

 

무뎃뽀(無鐵砲, むでっぼう)는 ‘무모하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속어이다. 철포(鐵砲)는 소총(小銃)을 말한다. 따라서 무뎃뽀의 본래 의미는 ‘소총도 없는 상태에서 무모하게 전투를 벌인다’는 뜻이다.  

 

1543년 포르투칼 상선이 일본 가고시마(鹿兒島) 남쪽 해상에 있는 다네가시마(種子島)에 상륙하면서 처음으로 소총이 들어온다. 이를 모조하는데 성공하였고 그 기술은 본토에 전해진다. 그런 연유로 ‘다네가시마’라는 이름은 당시 철포(소총)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 무렵 최고 불패의 기마군단을 자랑하던 다케다 가츠요리(武田勝賴, 1546~1582) 부대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1534~1582)의 신생 조총부대에 의해 전멸한다. 당시 전투는 기병과 보병이 한데 어울려 맞부딪치는 백병전 형태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1. 조총을 쏘고, 2. 뒤로 빠지고, 3. 장전하는’ 3단계 사격술을 이용하면서 원거리 전투방식을 도입한 나가시노(長篠) 전투는 이후 동아시아 전쟁방식까지 바꾼 획기적인 전술로 평가된다.  

 

이때부터 나온 말이 ‘무뎃뽀(無鐵砲)’다. 총도 없이 무모하게 전투를 벌인다는 뜻이다. 그 말은 일제강점기 때 한반도로 건너왔고 오늘까지 언어 생명의 유지는 물론 그 사용영역을 무한대로 넓혀왔다. 이제 ‘무뎃뽀’라는 말은 전쟁 뿐만 아니라 우리생활 전반에서 ‘무모하다’는 의미로 통용된다.  

 

하지만 그 무모함은 때로는 도전정신의 상징어가 되기도 한다. 앞뒤를 자로 잰 듯한 행동은 안전이야 담보되겠지만 맨 날 해봐야 ‘본전치기’로 끝나기 십상이다. 위험이 없으면 댓가도 없다(No risk, No gain). 살다보면 무뎃뽀 정신이 필요한 경우가 더러 있다. 반전과 창조의 계기가 되는 까닭이다.      

 

무뎃뽀 정신이 새로운 역사를 만든다

   

선종 역사에서 무뎃뽀 정신의 전범을 보여준 이는 대비(大悲) 스님일 것이다. 성은 김 씨다. 경주 백률사 스님으로 당시 당나라 유학 중이었다. 그는 열반한 6조 혜능 선사 등신불의 머리 부분을 신라로 모셔오겠다는 담대한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실행에 옮긴 인물이다. 그 전체적 스토리를 정리한 최초문헌은 『보림전』(801년 간)이다. 하지만 이 기록이 담겨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보림전』 권9, 권10은 현존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용문으로 『조정사원(祖庭事苑)』 권6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보림전』에는 혜능 스스로 입적하기 전에 자기의 취수(取首)사건이 일어날 것이라고 유언하였다. 제자들은 그것을 염려하여 입적 후 미리 철엽(鐵葉, 쇠판)으로 스승 목을 감쌌다. 그런데 개원(開元, 713~741)연간 밤에 혜능의 탑 안에서 쇳소리가 나기에 대중이 놀라 일어나 보니 일효자(一孝子)가 탑 가운데서 뛰쳐나갔다. 혜능의 목을 살펴보니 상처가 있었다. 당시 현령(縣令, 군수급)인 양류(楊流)와 자사(刺史, 도지사급)인 유무첨(柳無添)은 석각촌(石角村)에서 범인을 붙잡아 심문하였다. 일효자는 여주(汝州) 양현(梁縣) 사람인 장정만(張淨滿)이었다. 그는 홍주(洪州) 개원사(開元寺)의 신라 스님인 김대비(金大悲)로부터 돈 이십천(二十千, 2만)을 받고서 조사의 머리(頂相)를 해동(신라)으로 가져가 공양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자사 유 씨는 그런 전후사정을 듣고서야 조사 유언의 영험을 알게 되었다. 이에 그를 풀어주었고, 6조에 대한 공경심이 더욱 증가되었다.” 

 

신라인에 의한 기록도 아닌 중국인의 기록인데도 ‘도둑’을 “한 효자(一孝子)”라고 부르고 있다. 머리를 정골사리인 양 모시고 가겠다는 발상자체가 어찌 보면 참으로 ‘엽기적’이다. 비록 미수에 그쳤다고 했지만 그 행위자체를 ‘효도’라고 표현한 것도 엽기적이다. 그렇게 행동한 사람도 기록한 사람도 모두 무뎃뽀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런 무모한 행동이 아이러니하게도 선종사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었다. 더불어 혜능 스님에 대한 존경심이 동아시아 전체에 퍼져있다는 사실을 덤으로 알 수 있다. 

 

지리산에 혜능 선사의 ‘머리’를 봉안하다

 


육조정상탑이 모셔진 쌍계사 금당의 모습 

 

이 무뎃뽀 사건은 훗날 ‘육조정상동래설(六祖頂相東來說 : 혜능 선사의 머리가 우리나라로 왔다는 설)’로 확장된다. 최치원(857~?)은 쌍계사 진감(眞鑑) 선사의 비문에서 “혜소(慧昭, 774~850)가 삼법(三法) 화상의 유기(遺基, 옛터)에 당우를 세우고 아울러 육조의 영당을 건립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이것이 실마리가 되어 삼법(?~739) 화상이 그 사건의 총괄 기획자로 부각된다. 삼법 스님은 『육조단경』 덕이본을 읽던 중 육조 대사의 취수(取首)유언 부분에서 필이 꽂혔다. 그리하여 “내가 모시고 와서 우리나라에 만대(萬代)의 복전(福田)을 짓겠다.”고 발원한다. 재정적 후원은 영묘사(靈妙寺)의 법정(法淨) 비구니(김유신 장군의 부인 지소智炤로 뒷날 출가함)가 맡았다. 곧장 중국지리와 문화에 익숙한 ‘중국통’인 대비 스님의 협조를 구했다. 힘을 합해 거사에 성공한 후 항주(杭州, 항저우 절강성)에서 배를 이용하여 신라로 돌아온다. 후원사찰인 영묘사에서 하룻밤을 머물며 정상(頂相, 머리)에 성대한 공양을 올렸다. 그날 밤 꿈에 나타난 금란가사를 입은 노화상(6조로 추정)의 지시에 따라 지리산에 봉안했다는 것이 우리나라에서 전하는 구전과 기록의 전말이다. 

 

엽기적 사건의 단초제공은 신회 선사였다

 

남종의 최고 책사(策士)인 신회(神會, 684~758) 화상은 『보리달마남종정시비론(菩提達摩南宗定是非論)』(732년 간)에 이 ‘엽기적’사건을 최초로 언급하고 있다. 북종의 보적(普寂)은 혜능계의 남종을 멸망시키기 위한 작업으로 개원2년(714) 3월에 장행창(張行昌)을 승복으로 위장시켜 혜능의 두상(頭上)을 취하게 하였으며, 대사의 영질(靈質, 신성한 몸)에 삼도(三刀, 칼자국 3개)의 피해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 사건을 북종 공격의 빌미로 이용한 것이다. 하지만 주변에서 자작극이라고 수군댔다. 소문이 사실이라면 신회 역시 필요하다면 자작극도 마다하지 않는 무뎃뽀 정신을 유감없이 보여준 셈이다. 어쨌거나 신회 화상은 갖가지 지략과 행정수완 그리고 육조 현창사업을 통해 남종을 탄탄한 반석 위에 올려놓은 일등공신이다. 

 

혜능선사가 동쪽으로 온 까닭

 

광동성 남화선사(南華禪寺)에는 육조혜능 선사의 등신불이 온전히 잘 모셔져 있다. 물론 머리 부분도 별다른 이상은 없다. 친견도 가능하고, 말만 잘하면(?) 사진도 찍을 수 있다. 따라서 동래설(東來說) 자체가 사실의 역사가 아니라‘이념의 역사’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육조혜능의 정통법맥은 해동선종(海東禪宗, 대한불교조계종 전신)으로 이어졌다는 자부심의 현현인 것이다.  

 


중국 남화선사에 모셔진 육조혜능 진신상 

 

불교는 각자가 세계의 중심이라는 가치체계를 바탕에 깔고 있다. 그래서 세존께서 깨달음을 얻은 붓다가야는 해인사의 가야산이 되었고, 자주 설법하던 기사굴(耆闍堀, 독수리)산은 통도사의 영축산(靈鷲山. 鷲 : 독수리 ‘취’이나 ‘축’으로 읽었다)이 되었다. 더불어 6조 역시 쌍계사의 지리산으로 터를 옮겨왔다. 붓다께서 동쪽으로 나투신 것처럼 혜능 역시 동쪽으로 오신 것이다. 그런 까닭에 오늘 내가 서 있는 이 자리가 바로 부처님이 머무는 자리요, 또한 육조선사의 앉은 자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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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스님
원철 스님은 해인사, 은해사, 실상사, 법주사, 동국대 등에서 경전과 선어록을 연구하고 강의했다. 그리고 일간지와 교계지 등 여러 매체에 전문성과 대중성을 갖춘 글로써 주변과 소통해왔다. 『할로 죽이고 방으로 살리고』『절집을 물고 물고기 떠있네』등 몇 권의 산문집을 출간했다. 번역서에는『선림승보전』상·하가 있으며, 초역을 마친『보림전』의 교열 및 윤문작업 중이다. 조계종 불학연구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해인사승가대학 학장(강주) 소임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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